

다크초콜릿
W. 뀨페
*사랑엔 성별이 없다는 세계관입니다. 같은 성별이나 다른 성별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네가 못 알아 들었잖아!”
야 쟤네 또 싸운다.
“네가 설명을 못 했겠지!”
누구? 8반이랑 9반 걔?
오늘도?
와… 쟤넨 지겹지도 않나봐.
이 이야기는 서로 안 싸우고 못 사는 두 소년의 이야기이다.
-
맨날 서로 안 싸우고 못 사는 8반 걔와 9반 걔는 서명호와 김민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반이 같다면 모를까. 반이 다른데도 쉬는시간마다 둘 중 하나가 꼭 상대방의 반으로 간다. 보통 움직이기 싫어하는 명호가 가만히 있고 그럴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민규가 온다. 정말 만에 하나 정도 일이 있거나 잠깐 자리를 비워 민규가 오지 않는다면, 명호는 민규의 반으로 가지 않고 귀신같이 민규가 있을법한 장소로 간다. 그래서 그 둘은 종종 교실이 아닌 복도나 옥상이나 심지어는 화장실에서까지 목격담이 정해지고 있다.
이쯤되면 많은 사람들이
‘아 그럼 어렸을 때부터 알고지냈나?’
혹은
‘가족끼리 친한 사이인가보네.’
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둘은 고등학교 입학식 때 처음 만났었고, ‘9반 걔’가 자신의 반을 8반으로 착각해서 들어왔는데, 우연히도 명호의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명호와 민규는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취향이 정말 잘 맞았기에 급속도로 친해졌지만, 출석을 부르기 위해 들어온 선생님에 의해 자신의 반이 아닌걸 알게 된 민규는 결국 첫날 사귄 친구를 두고 자신의 반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허엉.. 명호야.. 형은 간다.”
“누가 형이야. 넌 바보야.”
“바보? 바보~?”
바보라는 한마디가 그 둘 사이의 시발점이었다.
-
그 뒤로 둘은 눈만 마주치면 싸웠다. 그렇다고 맨날 싸우는 이유가 거창하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것도 아닌 것으로 싸우고는 한다.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싸우고, 기분이 나쁘면 나쁘다고 싸웠다. 어제는 민규가 모자를 쓰고와서 싸웠고, 그저께는 명호가 급식을 먹으러가지 않아서 싸웠다.
위의 싸움은 큐브를 맞추고 있는 명호에게 민규가 재밌어보여서 가르쳐달라고 한 상황이다. 명호 딴엔 하나하나 정성들여 설명해줬지만, 자신의 생각보다 설명이 길어져 지루해진 민규가 중간에 끊는 바람에 또 싸움이 났다.
“진짜 개싫어. 김민규.”
“넌 또 왜 화가 나있냐.”
“아니 사람이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는데 지가 말해놓고 듣기싫다고 하면 돼?”
“너넨 진짜 안 맞는다. 왜 붙어있냐 둘이?”
“그러니까. 다음 쉬는시간부턴 그냥 무시하려고.”
라고 명호가 다짐하기 무색하게 다음 쉬는 시간에도 민규는 8반을 찾아왔다.
“명호야, 매점가자.”
“싫어. 너나 가.”
“에이~ 그러지말고. 형이 쏠게. 5천원까지.”
“콜”
“야 서명호. 아까 무시한다 하지 않았어?”
“내가 언제? 형 나 바나나우유!”
야! 너 1시간 전까지만 해도-라는 같은 반 학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듯이 싸우던 표정들은 어디가고 한 명은 매점쪽으로 윙크를 하지 않나, 다른 한 명은 형이라고 부르면서 평소엔 짓지도 않는 미소까지 짓는다. 매점으로 사라진 한 쌍을 뒤로한 채 어이 없어서 벙쪄 있는 친구의 모습은 덤이다.
그렇다. 이 둘은 맨날 싸우지만 맨날 붙어다닌다. 눈만 마주치면 싸우면서 붙어있을 때는 어느 커플 못지 않다.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그냥 넘어가는 기념일도 예외는 아니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빼빼로데이, 심지어는 서로의 생일까지 지독하게 챙겨준다. 기념일을 챙기는 것 이외의 다른 것도 챙겨 준다. 예를 들자면 멘탈같은 것 말이다. 하루는 민규가 선생님한테 왕창 깨져서 울먹거리면서 명호한테 가자, 명호는 아이 달래듯이 안아서 토닥여줬다. 명호는 놀림 반 진심 반이었지만, 덕분에 그 모습을 봤던 반 애들만 어우 쟤네 또 시작이네-를 연발하며 자리를 비켜줬지만…
그렇다고 주변에서 사귀냐고 물어보면 민규는 입이 댓발 나오면서 아니라고 하지만, 명호는 인상을 팍 쓰면서 자신과 민규를 번갈아 가르키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저거랑?”
“야. 저거? 저어거어~?”
“어. 누가봐도 내가 아깝잖아.”
“너가 아까운거랑, 내가 저거인거랑은 다르지.”
산뜻하게 매점을 갔다와 민규에게 바나나우유와 초콜릿 하나를 얻은 명호는 우유에 꽂은 빨대를 문 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질문자를 죽일듯이 째려봤다. 옆에 착 달라붙어있던 민규는 어느새 ‘저거’에 심통이 났는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삐쳐서 혼자 팔짱을 끼고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저봐 저봐. 완전 애라니까?”
“그래? 그럼 너 나랑 만나볼래?”
“어..?”
“뭐냐? 서명호. 번호라도 주기만 해봐.”
“너 니 반으로 안 돌아갔냐?”
정확하겐 돌아갈 뻔했다. 누가봐도 나 지금 삐쳤어요-포즈로 뚜벅뚜벅 반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명호에게 관심있어하는 학생 하나가 둘이 떨어진 틈을 타서 명호에게 고백하는 소리가 들려 그대로 몸을 유턴해서 또 다시 옆에 찰싹 붙었다. 학생에게 둘은 절대 안 된다는 말까지 덧붙이고, 질색하는 표정으로 알았다는 대답까지 듣고 나서야 민규는 자신의 반으로 다시 향했다.
“…고마워. 살짝 난감했는데.”
“에이 뭐. 쟤가 아깝지 너가 아깝냐?”
“야 김민규.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어 아니야. 수업 종 쳤어. 형은 이만 갈게!”
“형같은 소리하네. 야이씨 너 일로 안 와?”
아, 그냥 지네 반 들어갔네. 내가 저 얼굴 다시 마주치면 내가 사람이 아니고 개다 개. 민규가 들어가고 굳게 닫힌 9반을 보며 오늘도 명호는 다짐했다.
그렇게 명호의 다짐이 무색하게 ‘8반 걔’와 ‘9반 걔’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까지 계속 붙어다녔다. 2학년 때는 반이 1반과 12반이어서 층수도 달랐는데 계속 같이 다녔다. 이동수업 시간이면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수업 장소까지 데려다주거나, 점심시간이 되면 항상 입맛 없다는 명호를 끌고 급식실에 가는 것은 민규의 몫이었다. 사람은 하루에 세 끼중 두 끼만 먹어도 별 탈 없다는 명호의 변명이 무색하게 항상 급식실에 데려갔다. 처음엔 약간의 짜증과 함께 괜찮다던 명호는 이주일이 지난 뒤엔 민규가 먼저 찾아오지 않아도 순순히 급식실로 갔다.
-
2학년 겨울방학 전, 민규가 탈이 나서 2일정도 점심을 먹지 못해 명호의 반 친구에게 나 대신 밥좀 먹여달라고 부탁했는데, 막상 점심시간이 되자 명호에게 간 친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민규에게 말했다.
“그냥 둘이 맛있게 먹어라.”
“뭐래..나 아파서 죽 싸왔잖아.”
“어어. 그러니까. 쟤도 지극정성이다 진짜 둘이 떨어지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냐?”
“그게 무슨 소린데.”
“뭔 소리긴. 천하의 서명호가 죽을 싸왔다는 소리지. 쟤 애초에 급식실 갈 생각이 없었던거 같은데.”
뭐라고? 라는 민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12반 문을 쾅 소리나게 열어재낀 명호는, 한손에 보온 도시락을 싸들고 민규 옆 책상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자신의 도시락을 꺼내 민규 앞에 두고는, 숟가락 하나도 마저 꺼내서 죽을 한 술 떠서 후 불기 시작한다. 또 쟤네 저럴줄 알았다는 듯이 멍하니 둘을 쳐다보는 친구들에게 이제는 가봐도 좋다는 말까지 잊지 않았다. 어이가 없는건 민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떻게 급식실 가는 버릇을 들여놨는데..
“자. 밥, 아니 죽먹자 민규야”
“뭔소리야. 난 내 죽 싸왔거든?”
“어. 니 죽 먹으라고. 난 내 죽 준다고 한적 없는데?”
“너 진짜 죽을 준비나 해라. 아픈 사람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진짜.”
“그래서 죽 준비해서 왔잖아. 아플 때 혼자만 맛있는거 못 먹으면 서러워.”
얼른 죽이나 먹어. 오늘 점심 돈가스라는데. 그 맛있는 것도 못먹어서 어떡하냐? 평소에 소식하는 명호도 돈가스만 나오면 밥 한공기는 비울 정도로 좋아하는 메뉴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고 죽을 싸왔다고? 아니 도대체 왜? 안 그래도 아프던 몸인데 머리까지 아픈 것 같았다. 결국 태평하게 죽을 먹는 명호와는 달리, 민규는 죽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머리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갑자기 열이 확 오른 것 같았다. 머리가 아픈게 아니라 배가 아픈데 얼굴이 뜨거웠다.
이 날. 18년 인생 처음으로 민규가 밥을 남겼다.
배탈이 괜찮아져 다시 민규가 급식을 먹기 시작했을 때 쯤, 민규는 명호를 눈에 띄게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원래 그 둘의 사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럴리 없다고 펄쩍 뛸 정도로 명호와 떨어져 지냈다. 쉬는시간마다 1반에 명호를 보러 가는 것도 그만 두었고, 집에서 잘못을 저질러 용돈이 끊겼다는 핑계로 같이 매점에 가는 것도 그만 두었다. 점점 만나는 일 수가 줄어들었다. 항상 같이 가던 급식실도 가지 않으려고 다이어트 때문에 당분간 급식을 먹지 않겠다는 핑계를 댔으나, 명호가 멱살잡고 끌고가는 바람에 급식실에선 같이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처음 하루 이틀은 그렇다고 쳐도 계속해서 자신을 피해다니는 민규때문에 명호는 화가 났다. 주변에서 보면 명호 주변에 불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하루 종일 짜증이 났다. 매점을 가자고 하면 돈이 없다고 피해, 이동수업 데려다주려고 하면 교실에 뭘 놓고왔다고 피해, 무슨 일이 있나보다 하고 어디 아픈가 해서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하면 갑자기 집에 급한일이 생겼다고 피해.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기엔 자신을 피하는게 선명했다.
결국 참다 참다 겨울방학 날, 명호는 화를 냈다. 방학날엔 점심을 먹지 않으니 급식실에 갈 이유가 없었다. 평소에 종례가 짧기로 유명한 1반 선생님의 종례가 끝나고 명호는 12반으로 달려갔다.
“이상. 겨울방학 잘 보내고. 너네 이제 고3이다 정신 바짝차려.”
다행히 12반은 지금 막 종례가 끝난 참이었다. 교실 문 밖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이 부랴부랴 짐을 싸 나가려는 민규의 모습이 보였다. 이럴 줄 알고 달려왔지 김민규.
“너 나랑 잠깐 얘기좀 해.”
“명호야. 나 진짜 미안. 오늘 빨리 가야 돼.”
“뭐가 그렇게 맨날 급해? 너 자꾸 나 피하잖아.”
“…”
“알긴 아나보다? 어어. 어딜 가려고 해. 오늘은 이유 말하기 전까지 안 보내줄거야.”
“명호야”
“…왜”
“나 비행기 시간 늦어.”
“뭐?”
“나 2개월동안 캐나다에 홈스테이 하기로 했어. 진짜 미안. 개학 때 보자.”
“뭘 개학 때 봐. 핸드폰은 장식이냐?”
“나 핸드폰 두고 갈거야. 그럼 진짜 이만.”
“왜 두고가는데. 야. 야! 김민규!”
그러고는 명호가 잡기도 전에 정말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전력질주 해서 사라졌다. 저 자식이 진짜! 참을성이 많고 평소에 화를 명상으로 다스리는 명호는 눈앞에 사라진 민규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2개월만 참자. 2개월.. 공교롭게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며 야심차게 피아노 학원을 끊은 민규가 피아노를 그만 둔 기간도 2개월이었다.
맞다. 민규 피아노도 작심 이개월이었지.
민규 생각하지 말자니까. 왜그래 서명호.
정신차려… 정신.. 김민규 진짜 넌 뒤졌어
계속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 생각이 났다. 이럴려고 명상하는거 아니잖아 서명호. 다시 다짐하기 무색하게도 계속 민규 생각이 났다. 어떻게 쟤만 보면 화가나지. 쟤만 보면 웃기고. 지가 뭔데 자꾸 생각 나고 난리야 정말. 어라.
뭐야. 나 쟤 좋아하나?
그럼 쟤는?
명호는 말 없이 씨익 웃었다.
-
그래서 민규가 캐나다로 갔느냐, 그건 아니다. 명호가 씩씩대며 화를 삼키는 동안, 민규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 방문을 걸어잠궜다. 그러고는 가방만 벗어 던진 채로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썼다. 미쳤어 김민규. 또 거짓말 했어. 아까 핸드폰으로 연락하면 되지 않냐는 말엔 당황해서 아무 이유나 둘러댔는데 심각하게 고민하는 명호의 모습을 보자니 마음 한켠에 양심이 아파왔다. 그와 동시에 또 명호 생각을 하니 달아올랐다.
“나 진짜 왜 이러지..”
결국은 오늘도 명호를 볼 자신이 없어 심각한 거짓말과 함께 도망친 것 밖에 없었다. 나 진짜 나쁜 놈이네. 친한 친구 얼굴도 못보고. 잠깐, 친구? 계속 명호와 붙어있는 민규에게 친구들이 둘이 사귀냐고 물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마다 아니라고 화를 내면서 말했지만, 하루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왜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야 너네 사귀냐?’
‘아니? 근데 왜?’
‘아니, 너네 붙어있는 거 보면 사귀는 것 같아서.’
‘도대체 어디가?’
‘너네 빼고 다 알 걸. 옆반 준성이 커플 봐봐. 너네보다 붙어있는 횟수도 적잖아. 진짜 염장 쩌는 커플인데도.’
‘그런가?’
내가 명호랑? 사귄다고?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장난치지 말라며 그냥 넘겼었는데 같이 죽을 먹은 이후부터는 아니었다. 사귀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또 귀 끝이 달아올랐다. 으 진짜. 이불속에서 민규가 고개를 팍 숙였다.
“나 명호 좋아하나..”
그 와중에도 명호가 보고 싶었다.
-
혹시나 확인차 폰으로 연락이 올까 걱정했던 민규와는 달리, 명호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도망쳤다는 것을 들키지 않았다라는 안도감과 동시에 이유모를 섭섭함이 들어갔다. 약속했던 2개월이 지나고 2월 13일 개학날, 민규는 지난 두 달동안 깔끔하게 정리했던 상황을 다시 복기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명호를 좋아하는 거고, 나는 오늘 명호한테 고백할 거고, 만약 명호가 받아주면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만약 안 받아주면…
“민규 왔어?”
“…어.”
“캐나다는 잘 다녀왔고?”
“그렇지.”
“그래서 나는 왜 피했고?”
“…”
망했다.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열심히 손가락까지 접어가면서 한 정리는 소용이 없었다. 저 멀리 자신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는 명호에 머리 속이 새하얘지고마는 민규였다.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속사포로 말하는 명호에 겨우겨우 대꾸만 하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명호의 얼굴이 훅 들어온다.
“왜 나 피했냐니까? 내 눈 보고 얘기해.”
오 이런. 김민규 19년 인생 최대의 위기다. 시선도 피하지 못하게 명호가 민규의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쁠르 믈흐르 김민규. 입술은 또 꽉 물어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민규에겐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렸다. 어, 그러니까, 그게…
“나…”
“어. 그래 너.”
“너… 좋아해.”
“어. 그래.”
“…”
“…”
“어?”
“왜. 대답을 바라는거야? 나도 너 좋아.”
“…어?”
“그러면 사귀는 건가?”
그럼 잘 부탁해 민규야. 마치 민규가 그런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명호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오늘부터는 다시 붙어다닐 수 있겠다. 밥도 같이 먹고. 집도 같이 가겠네? 여전히 웃음기 띄며 조잘대는 명호와는 달리 민규는 아직도 얼이 빠져 있었다. 쟤가 날 좋아했다고? 언제부터? 아니 그보다 쟤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았다는 거잖아. 언제부터? 고백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기쁨과 함께 자꾸 배신감이 들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엄청 마음 졸였는데. 뭐가 그렇게 쉬워? 감정적으로 가면 지는 건데 자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무튼, 오늘부터 나 피하기 없기야.”
“언제부터 알았어.”
“겨울방학에 너 캐나다간다고 했을 때부터?”
“뭐야, 그러면 나 캐나다 안 간 것도 알고 있었어?”
“그렇지?.”
“그럼 연락은 왜 안 했는데.”
“너가 연락 안 될 거라며.”
“그래도 한번은 해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너가 연락 안 받으려고 그런 거짓말 한 거 아니야?”
“…”
“뭐가 그렇게 또 속상해 김민규. 너 나 싫어?”
“…아니”
“그럼 됐네. 너도 나 좋고, 나도 너 좋고. 뭐가 문제야?”
속상하냐고 물어볼 때만 너가 속상하면 나도 속상하다는 것처럼 잠깐 우울해했다가, 후엔 전혀 문제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명호가 민규한테는 썩 달갑게 보이진 않은 모양이다. 다시는 자신을 피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수업시작 종이 울리자 그대로 자신의 반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봐 민규야. 마지막까지 환한 미소를 잃지 않은 명호였다. 와 어쩜 저렇게 약오르지? 내가 강아지를 키운 줄 알았는데 여우를 키웠네. 어느 순간 눈물은 쏙 들어가고 얄미움과 귀여움만이 남았다. 그 와중에 쟨 또 귀엽고 난리야. 진짜 너무 싫어. 아닌데 좋은데.
그래도 복수는 꼭 해야겠다고 다짐한 김민규였다.
-
복수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어떻게 하면 ‘나 삐쳤어요.’처럼 보이지 않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한 끝에, 일단은 날짜부터 정하기로 했다. 복수라는 것을 눈치채면 안 되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진행할 것. 그리고 개학하고 2주일 뒤에 다시 봄박학이 진행되니 이번주 내로 끝낼 것. 조건에 맞는 날짜를 찾다보니, 내일이 발렌타인데이였다. 지금까지 모든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챙겨줬었고, 내일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평소에 군것질은 좋아하던 명호였기에,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때 민규가 초콜릿이나 사탕을 주면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민규는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초콜릿에 캡사이신이나 와사비를 넣으면 누가봐도 티가 날테니, 원래 초콜릿에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를 빼기로 결정했다. 시판 초콜릿을 녹여서 만들었던 작년과는 달리, 이번에는 특수 수제 초콜릿을 위해 코코아 파우더도 직접 구매했다. 코코아 파우더를 버터에 녹이고, 뜨거운 물에 섞고는, 다시 우유를 넣어 부드럽게 만든 뒤 모양을 잡아 굳혔다. 원래는 뜨거운 물에 섞은 뒤 설탕을 넣어줘야 하지만, 민규는 명호에게 쓴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중의적인 의미로도, 라임으로도 민규는 만족했다. 혹시나 맛이 없다고 한다면 여태 먹던 초콜릿과는 다른 다크초콜릿이라며 초콜릿을 그동안 헛먹었다고 핀잔을 줄 생각이었다. 원하는 모양으로 만든 특제 다크초콜릿을 냉동실에 넣으며, 민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번 골탕 먹어봐라 서명호.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그래봤자 하룻밤 자고 일어난 것이지만, 민규는 너무나도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너무 기분 좋게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씻고 바로 학교에 갈 뻔 한 것을 동생이 뭐 잊은 것 없냐는 말로 불러 세웠다. 아 맞다! 초콜릿! 이런, 복수를 시작도 못 할 뻔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핀잔은 무시했다.
3학년 때는 다행히 같은 반이었기에 명호네 반의 열쇠를 챙길일 도 없었다. 2학년 때 초콜릿을 몰래 명호의 사물함 속에 넣으려다가 너무 이른 시각에 단 한명도 도착하지 않아 다시 교무실에서 열쇠를 가지러 갔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보통 명호가 민규보다 일찍 도착하는 편이지만, 그 날 하루는 초콜릿을 준 사람이 자신인지 모르도록 하기 위해 민규는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나서 준비했다. 물론 1반에서 제일 일찍 도착하는 명호가 열쇠를 가질러 교무실에 들렀을 때, 1반과 12반 키가 동시에 사라졌다는 저에서 이미 눈치챘지만 말이다.
오늘은 몰래 줄 이유도 없으니 초콜릿만 챙겨서 평소처럼 학교로 갔다. 역시나 반에는 제일 먼저 도착한 명호가 있었다. 저 또 마냥 좋은 얼굴을 하고 있네. 괜히 또 심통이 났다.
“민규 왔어? 평소보다 일찍 왔네?”
“아닌데? 평소처럼 왔는데?”
“뭐래. 10분이나 빨랐는데. 자 여기.”
“오. 직접 만든거야? 남친 하나는 잘 뒀네.”
“뭐, 뭐래. 작년에도 직접 만들어서 줬거든? 너도 좀 만들어 주라. 난 항상 만들어 오는데.”
“선물은 정성보단 가격이랬어 민규.”
“누가 그래. 누가!”
“내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명호가 마침 당이 떨어진 타이밍이라는듯이 초콜릿 포장지를 뜯었다. 단지 설탕만 빠졌기에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드디어 초콜릿 하나를 입으로 가저간 순간.
“헐…”
“왜? 설마 애인이 밤을 새서 손수 만들어준 초콜릿이 맛이 없다는 건 아니겠지?”
“대박. 어떻게 만들었어? 완전 맛있는데?”
“…엥?”
“요리 엄청 잘하네. 그렇게 나 좀 집에 초대해 달라니까 초대도 안해줘서 못하는 줄 알았는데.”
“…”
“뭐냐. 그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은?”
“…그럴리가.”
“여태 먹던 초콜릿과는 다른 맛이네. 조금 더 쌉싸름한게 완전 내 취향이다. 다른 초콜릿인가?”
“어.. 그거 다크초콜릿이야.”
“아무튼 고마워 민규. 잘 먹을게. 너무 맛있어서 다른 초콜릿은 못 먹겠다.”
“그..그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길게 칭찬하지 않던 명호가 민규보다 말이 많아지면서 초콜릿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시중에 파는 초콜릿은 단 맛이 너무 강해서 카카오 본연의 맛을 느끼기 어려웠다는 둥, 쓴 맛도 5가지의 맛의 일부분이고 맛있게 쓰긴 어려운데 적절한 씁쓸함이 잘 어울린다는 둥, 단점을 부각시킨 초콜릿을 전부 장점으로 바꾸어버렸다. 씁쓸함은 개뿔 지금 내 상황이 씁쓸했다. 혹시나 눈치 빠른 명호가 설탕을 뺀 것을 눈치를 채고 일부러 맛있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명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해도, 저건 순도 100%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의 표정이었다. 너는 어떻게 내가 복수하려고 해도 안 되냐. 순간적으로 급하게 울컥했다. 지난 시간동안 마음 졸이면서 혼자만 짝사랑 했던 때가 생각났다. 내가 진짜 명호 앞에서는 안 울려고 했는데 이씨. 서명호 진짜 싫어.
“나 다음에도 이렇게 만들어주… 민규 울어?”
“너 진짜 미워.”
“민규 또 속상해?”
“몰라. 너 때문이야.”
“뭐가 그렇게 서러워. 어제 너무 놀렸나… 그건 미안. 근데 너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
“시커먼 고등학생이 뭐가 귀여워. 너나 귀엽지. 난 하나도 안 귀여워.”
“울면서 고백은 하지마 민규. 되게 없어보여.”
“너 진짜 싫어.”
서명호 나쁜놈 으허어어엉-
그래, 그래. 내가 나빴어. 미안해 민규야.
소리 없이 혼자서 우는 명호와는 달리 민규는 나 지금 울고 있다며 그간 서러움을 한꺼번에 토해내 듯 세상 서럽게 울었다. 명호는 익숙하게 민규를 안아줬다. 그리고 토닥여줬다. 그리고 여전히 반 친구들은 반을 들어오려다가 뒷걸음질 쳤다.
“하이. 좋은 아침… 어이쿠 반을 잘못 들어왔네.”
“뭐냐. 부승관. 아침부터 싸우고싶냐?”
“뭐래. 니네 사귀지도 않으면서 계속 붙어먹냐?”
“사귀는데.”
“뭐?”
“사귄다고.”
“에이, 김민규 너 혼자 사귀냐? 연애는 혼자 못해.”
“괜찮아. 우리 민규 혼자서 연애 안 해.”
“뭐? 우리 민규? 우우리이 미인규우?”
“그렇지 민규야?”
“당연하지. 명호야.”
“…그래 니들 붙어먹고 살아라. 우욱. 토할거같아.”
그러고는 자신은 커플과 대화하는 취미는 없다며 정말로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승관은 가방만 내려놓고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본 둘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어 민규,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는데? 아니거든? 완전 그사세다. 반에 들어오는 친구마다 전부 승관이같은 반응을 보이고는 그럴줄 알았다며 별일 아닌 것처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결국 모든 학생이 등교하고 난 뒤에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회 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와서 둘을 떼어냈다. 학교에서 애정행각은 자제해달라는 경고는 덤으로.
그렇게 민규의 복수 작전은 끝이났다…?
-
“…아무튼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그 초콜릿 써서 못 먹는게 정상이라고.”
“엥. 그 초콜릿이 제일 맛있었는데 진짜 나 골탕먹이려고 만든 거라고?”
“그래. 너가 자꾸 그 초콜릿 만들어 달라고 해도 못 만들어주는 이유가 있었던거지.”
“어쩐지. 다른 다크초콜릿을 먹어봐도 그 맛이 안 나더라. 다크초콜릿이라고 해도 달던데.”
“그래. 원래는 그게 정상이야.”
“아하, 그러니까 10년동안 그 초콜릿을 못 만들어줬던 이유가 그 때만 잘 만들어진게 아니라 그 때만 잘못 만들어진거다?”
“그런 셈이지?”
“와, 맛있었으니까 망정이지. 맛없었어봐. 바로 그날 차였어 너.”
“뭘 초콜릿 하나가지고 차여. 그래서 내가 차일 걱정 없이 결혼하고 밝혔잖아.”
“뭐야. 걱정은 했네?”
“…”
“그래 차일 걱정은 없겠다. 대신 한 달만 각방 쓰고.”
“아 명호야 진짜 미안해…”
“나는 초콜릿의 쓴 맛을 느끼고 있을테니까, 넌 인생의 쓴맛을 느껴보는게 어때?”
“…”
“장난이야 민규. 왜 또 울상이야.”
에휴, 형이 또 안아줘야겠네. 일로와 민규.
뭐래 내가 형이지.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안기는 민규였다.
씁쓸한데, 달긴 달다. 난 그래서 너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