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의 상상
W. 뛰는개
1.
'살면서 가장 후회해본 일이 뭐에요?'
누구는 대학교 전공 선택을 말했고, 누구는 손해만 본 투자 이야기를 하고. 남의 시시콜콜한 중대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가장 마지막 순서는 자연스럽게 명호가 됐다. 명호는 멋쩍게 웃으며 고민에 빠지고는 했다. 이걸 사실대로 말할까, 어쩔까.
퇴근길 구호선에서 남의 의지로 실컷 흔들리다가, 쏟아지듯 내려 개찰구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을 몇 번이고 재차 확인했다. 눈을 뜨고 출근을 해서 근무하는 내내 머릿속으로 그려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출구를 통해 지상으로 나오니 저 먼 곳에 아직도 해가 떠있는게 보였다. 명호는 훅 끼쳐오는 습기와 열기 사이를 걸었다. 비가 온 바로 다음 날의 여름이 독했다. 현기증이 나고, 입이 탔다. 더운 것 뿐만이 아니라 긴장해서다.
오후 일곱 시 반 예약 환자인 명호는 그보다 오 분이 지나서야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접수처에서 꺼내 들었던 외국인 등록증을 도로 지갑에 넣으며 헛기침을 했다. 베드에 걸터앉은 명호는 무신경한 의사의 옆얼굴을 지켜보았다.
"시술 부위 한 번 확인할게요."
명호는 그 소리에 제 바지의 왼쪽 밑단을 말아 올렸다. 오로지 오늘 있을 진료를 위해 입고 나온 편한 옷이었다. 왼쪽 무릎이 휑하니 드러났다. 사진을 찍고 크기를 쟀다. 비보험 치료에 관한 설명, 회차, 강도 등등의 설명을 들었지만 귓바퀴를 맴돌다 사라지는 듯 했다. 모조리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도통 실감이 나질 않았다. 머리에 남은 것은 단 하나. 아무리 적게 잡아야 일 년은 걸린다는 것 뿐이다.
무릎에 마취 크림을 바르고 랩핑을 했다. 명호는 상아색 벽을 보며 눈을 꿈뻑였다. 막상 치료가 시작되니 긴장이 싹 가셨다. 아침부터 하던 걱정이 헛수고 같았다. 발목을 이리저리 톡톡 꺾다가 무릎을 내려다 보았다. 희뿌연 크림 아래에 있는 것은, 손바닥 반의반만 한 나팔꽃이다. 보라색의 꽃 주변을 파릇한 덩굴 두어 줄기가 감싸고 있다. 새길 때에 색소를 하도 쓴지라 꽃이 새겨진 부분은 어루만질 때마다 늘 어색한 촉감이었다.
살면서 가장 후회해본 일이라. 자주 받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명호는 골몰했다. 지금의 내가 가장 이해할 수도 없고 결심도 않을 멍청한 일. 그러다 고백하듯 꺼내놓았다. 저는 타투 받은 거요. 그러자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타투가 있느냐며 온 얼굴로 놀라기. 이들은 숨 집어먹는 소리를 내고는 이내 어디에 받았느냐며 물어왔다. 내가 타투 하나 즈음 품고 있을 인상은 아니었던 건가. 명호는 그들의 반응으로 지레짐작했다.
명호를 정말 곤란하게 한 것은 나머지의 경우였다. 그들은 명호가 가장 후회하는 일로서 타투를 꼽자마자 탄식하며 말을 흐렸다. 꺼내놓지도 않은 뒷이야기가 모조리 읽힌 것만 같았다. 명호는 그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다짐했다. 다시는 사실대로 말하지 말아야지. 살면서 가장 후회해본 일 같은 질문을 들으면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며 얼버무려야지.
그렇다 보니. 명호가 제 타투를 돌본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 피부가 다 아문 뒤 기껏해야 몇 달. 의식하는 일이 적어지다 보니 몸에 박아넣고도 잊고 살더라.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앉을 때에야 이게 여기 있었구나, 하고 자각하고는 했다. 그것도 제 무릎을 안을 때마다 매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불현듯이.
이름은 커녕 이니셜도, 하물며 생일 하나도 기록하지 않은 채 덩그러니 놓인 내 나팔꽃.
크림 십 분 더 방치하고 추가 마취 진행할게요. 명호는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술을 받는 내내 민규가 생각났다. 고통이 물어다 준 플래시백이었다. 레이저를 쏘는 기기에서 빛이 퍽, 전구가 망가지는 소리를 내며 터질 때마다. 부러 눈을 감고 고통이 가시기를 기다리는 내내. 기이한 기분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을, 숨을 쉬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너는 살집이 없어서 더 아프겠다, 안 그래도 뼈랑 가까운 데가 진짜 아프대.'
무릎에 나팔꽃을 새기던 날. 민규는 샵에 들어가는 내내 중얼거렸다. 겁먹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과 마음은 정반대로 흩어졌다. 명호가 먼저 베드에 앉았다. 민규는 명호에게 자꾸만 아프냐 물었다. 명호는 그게 조금 귀찮고 많이 얄미웠다. 그래서 제 차례가 끝나고 민규의 순서가 오자마자 카메라를 들었다. 민규의 어수선한 엄살과 비명을 모조리 촬영했다. 명호는 한참을 깔깔 웃었다.
한참 후 무릎 네 개가 거울 앞에 섰다. 퐁당퐁당 셈을 하듯 빨간 무릎과 빨갛지 않은 무릎이 번갈아 놓여있었다.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도안. 그 미묘한 몰개성함. 다른 그림을 하네, 레터링으로 바꾸네, 어디에 받네, 그냥 아예 하지를 마네 어쩌네……. 민규는 졸랐고 명호는 거절했다. 너 나랑 평생 만날 거야? 옥신각신 하던 와중에 던진 말이 도화선이 되어 크게 싸웠다. 그러고서 화해할 때 민규가 한 말. 명호는 아직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너랑 평생 못 만나도, 지금 내 최선은 너거든?
그렇게 돼서. 거진 반 년 가랑을 골몰하고 싸워댔건만, 술 한 방울 들어가지 않은 맨정신으로 샵을 찾았다. 그날 유독 민규와 죽이 잘 맞았기도 했고. 마음이 홀가분했다. 드디어 해치웠다는 안도감과 별것도 아니었다는 젠체가 뒤섞였다. 괜스레 민규의 허리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민규는 그때까지도 엄살을 부리다가 명호의 손등을 쥐었다. 그 손바닥, 엄청 축축했었지.
이걸 몽땅 지워버리면 민규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게 될까.
"할부 하세요?"
"아뇨, 그냥……."
명호는 비실대며 카드를 건넸다. 거즈로 감싼 피부가 작열했다. 화끈한데, 데인 것과는 다른 느낌. 속부터 익은 것 같았다. 고지받은 진료비는 예상한 것보다 조금 더 비쌌다. 비보험을 등에 업은 소염제와 연고의 값이 부담스러웠다. 명호는 요즈음 자주 들춰보던 고민을 떠올렸다. 몇 년 동안이나 월세를 내는 것보다 시 외곽에 전세를 얻는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명호는 그 고민을 부끄러워하며 접었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은 생각임에도. 당분간은 식비부터 쪼개야 할 판이네.
카드와 함께 영수증을 돌려 받았다. 몇 걸음 안 되는 입구를 향해 발을 돌렸을 때. 명호는 무의식처럼 피부과 안을 둘러보았다. 순서를 기다리며 카우치에 눌어붙은 사람, 초조한 듯 다리를 떠는 사람, 환부가 눈에 고스란히 보이는 사람…… 온백색 전등 아래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명호는 발견했다. 까만 반바지와 그 아래 보라색 나팔꽃.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주치는. 뚜렷한 눈매.
옛날 옛적에 헤어진 애인 잡고 안부 묻는게 얼마나 구질구질한지 아니. 명호는 순간 제가 이 말을 소리 내어 했나, 싶어 살풋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민규는 제 상의에 음료를 쏟고는 허둥대고 있었다. 캔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의 달짝지근한 냄새. 채 옷감에 스미지 못한 것들이 땅으로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그 옛날 옛적 같으면야, 어디서 휴지라도 한움큼 뜯어다 닦아주었으리라. 오늘의 명호는 민규가 커피를 털어내고 짜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너는 아직도 덤벙대냐며 첨언하기도 힘들다.
"잘 지냈어?"
결국 진부한 소리가 나오고 만다. 발원지는 민규가 아닌 명호의 입이다. 닦을 것 한 장 없이 맨손으로 커피를 털어대던 민규가 부러 먼 곳을 보았다. 어, 나야 뭐.
"그럼 됐네."
그럼 어떻게 할까. 이대로 집에 가버릴까. 아무 것도 마시지 않은 명호는 민규가 시선을 던진 곳으로 고개를 꺾었다. 야밤의 한강. 나이 홀짝 먹고 이야기나 나누기에는 소탈한 곳. 병원을 빠져나온 둘은 한강이 보일 때까지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민규가 조금 앞서 걸었고 명호는 뒤를 따랐다. 보폭도 거리도 엉망인 동행이었다. 연애가 한창일 때에는 한강에서 데이트를 자주 했었다. 가로등이 듬성듬성 서있는 산책로를 걸으며 강물의 소리를 들었다. 정강이에 스치는 얇은 거미줄을 소리 없이 끊으면서, 이따금 조깅하는 사람들이나 자전거가 지나가면 잡은 손을 살그마니 놓기도 하고. 돈도 없고 차는 당연히 없는 학생 시절 밤 데이트의 최선이었다.
병원에서 민규를 보자마자 든 예감이었다. 확신은 아니고. 곁눈질 하다 들킨 사람 같은 표정이 나를 잡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런 고리타분한 예감. 잡혀도 그만이었고 잡히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잡히지 않는다면 잡히지 않는 것이고. 잡히면 적당히 둘러대며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 집에 들어가 환부를 훔쳐보며, 당분간 금주라는 말에도 냉장고 구석에 처박힌 캔맥주를 떠올렸겠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멀찍이서 들렸다. 민규는 달고 끈적이는 커피로 흥건한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명호는 못이기는 척 제 가방을 뒤적여 다 써가는 물티슈를 꺼냈다. 몽땅 뽑아내니 손을 적신 것을 닦아낼 정도는 되었다. 밤공기를 비집고 들어온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냄새. 명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뭐가."
"나 왜 끌고 나왔는데."
명호는 잘 골라진 산책로를 툭툭 차댔다. 제 물음이 짐짓 불퉁하게 들렸을까 뒤숭숭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러길 바랐다. 민규가 대화에 흥미를 잃었으면 했다. 조용히 걷기만 해도 좀, 벅차잖아.
"그냥, 우리 오랜만에 보잖아."
"……."
"인사나 좀 하려고."
그래. 명호는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새카만 한강을 들여다보았다. 잠 못 이루고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내는 불빛이 강물 위로 어른어른 퍼졌다. 우리. 명호는 입안에서 단어를 굴렸다. 혀끝이 써서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민규는 얼룩덜룩한 물티슈를 여태껏 쥐고 있었다. 명호는 이별 이후 들인 습관을 꼽아보았다. 창가에 둔 화분과 엽차와 혼자 보는 영화 같은 것. 명호는 담대해져야만 했다.
"그, 명호야."
"응."
"어디 아픈데 있어?"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병원을 빠져나온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를 가장 소중히 여겼던 때가 떠올랐다. 명호는 다시금 되새겼다. 화분과 차와 영화. 그러자 사실을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뿌리 썩겠어요."
아. 명호는 그제야 기울였던 오백 밀리리터 생수병을 바로 세웠다. 화분 밑에 뚫린 구멍으로 멀건 흙탕물이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소원을 빌듯 중얼대며 티슈를 뽑았다. 갈무리한 화분을 다시 창가에 두었다. 식곤증처럼 밀려오는 햇볕이 화분 위를 감쌌다. 살짝 웃자란, 통통한 다육식물. 명호는 잎 끄트머리를 매만지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인정이라는건 으레 대상을 가린다. 남한테는 쉬이 던져줘도 제 스스로 뒤집어쓰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명호는 제 이마를 가볍게 덮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소리 내어 한숨을 쉬고 싶었다. 물은 좀 있다가 주고 그냥 담배나 한 대 태우고 들어올 걸.
'타투 지우려고.'
둘이서 한강을 멀찍이 내다보았던 그날 밤. 민규는 휘둥그레해진 눈으로 되물었다. 무슨 타투? 다급하게 반문하기까지 했다. 알면서. 내가 그 이후로 무얼 더 그리고 썼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명호는 간단하게 제 무릎을 가리켰다. 명호는 자부할 수 있었다. 적어도 민규와 연애하는 동안, 나는 저 애가 지을 수 있는 모든 표정을 다 관찰했노라고. 웃고 울고 화내고. 그런데 저렇게나 해괴한 표정은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명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왜?'
'왜냐니?'
'그걸 왜 지워?'
민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명호는 본능처럼 제 얼굴을 구겼다. 민규의 헛웃음은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싸우자는 신호였다. 명호는 비참하게도 열 번의 헛웃음 중 열 번 모두 걸려넘어갔다. 민규가 불씨면 명호는 그걸 불어 나르는 꼴이었다. 싸움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십 분이면 끝나는 것도, 몇 주 동안이나 서로 꽁무니만 보이면 으르렁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이별의 근원이 된 싸움을 빼면 모조리 화해했다. 잡아먹을 듯이 뜨겁거나, 찜찜하도록 미적지근하거나. 화해는 대부분 민규가 제안했고, 명호는 어째서인지 사과를 받으면 받을 수록 찝찝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린 자랐잖아. 소싯적 버릇이 나온다 치더라도 알맹이는 여물었을거 아니야. 명호는 훅 차오르는 딴죽을 꼭꼭 삼켜냈다. 눈을 빠르게 두어 번 깜빡이고 조곤조곤 말했다.
'계속 내버려 둘 이유가 없잖아.'
'지울 이유도 없잖아!'
'뭐?'
그제야 아차 싶었나보다. 민규는 아니, 야, 같은 군말만 하며 얼버무렸다. '우리'한테 왜, 라는 말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자각한 모양이었다. 명호는 그 꼴이 다소……기가 찼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한심했다. 명호는 민규를 관망했다. 어디 한 번 실컷 민망해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민규는 참 한결 같은 면모가 있는 인간인지라.
'야, 나도 이거 아직까지 달고 잘 살거든!'
민규와 애인이었을 때에도, 지금 같은 남남일 때에도, 민규의 단점으로서 가장 먼저 꼽고 싶은 것은 저놈의 자존심이었다. 사랑한다고 떠들 때에는 간이고 쓸개고 죄다 내던지고 떠벌댔으면서. 생각 이상으로 똑똑한 애가 왁왁대는건 가끔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로 볼품 없었다. 진짜 미치겠네. 명호가 골머리를 앓던 말던, 민규는 제 무릎을 굽혀 들어보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다.
'내가 너랑 같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아니면 나한테 미련 있어?'
'없거든!'
미련 있냐니. 놀린다거나 공격하려는 요량이 있던 건 아니다. 명호도 제 질문을 설명할 수 없었다. 대화 템포를 따라가다 반사적으로 꺼내놓은 물음이라고, 변명 같은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민규는 바락 대들듯 소리치고는 씩씩거리며 흥분을 삭였다.
그리고 바로 두 번째로 꼽고 싶은 단점.
'그래, 됐다.'
'…….'
'내가 뭐라고, 구남친 타투 지우는 것까지 사사건건 간섭하겠냐?'
민규는 입술을 비죽였다. 명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너는 매번, 너 혼자 결론 내고 끝이야. 너는 벌써 훌훌 털고는 저만치 앞서가는데 나는 아직도 여기서 곱씹고 있다고. 그게 얼마나 비참한지 너는 모르지. 눈 깜짝할 사이 벗은 옷가지처럼 널부러진 상념들. 결국 명호는 쉽게 우울해졌다. 내가, 아직도, 너무 치졸한 사람일까 싶어 머리가 아팠다.
'……너 꼭, 나한테 미련 있다는 것처럼 구네.'
명호는 결국 인정했다. 어떻게든 민규를 이겨먹고 싶었다.
2.
빨래를 돌리고 청소기도 돌린다. 창가에 내어놓은 화분은 잎이 타지 않게 자리를 바꿔주었다. 가끔 냉장고를 한 번 뒤엎고 싶어지지만 상상으로 남겨두었다. 명호는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우유팩을 꺼냈다. 컵에 모조리 따라 부었더니 겨우 반절을 채웠다. 렌지에 짤막하게 데워 마셨다. 주중에는 밖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자취방의 밀린 집안일을 하는 것. 새삼스럽게 고리타분했다. 그래도 어떻게 해. 냉장고 청소는 못해도 욕실 구석에 락스는 뿌려둬야 했다. 다음 주중에 진료 예약이 있고, 병원을 한 번 다녀오면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그걸 첫 진료로 깨달았으니 미리미리 움직이는게 좋지.
일요일 오후는 꼭 모래 같았다. 꽉 붙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꼭 줄줄 새고 만다. 하늘이 아직도 저렇게 파란데. 곧 있으면 오후 여섯 시였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애매하게 늦은 시간. 늦게 떨어지는 여름 해를 보며, 명호는 작은 거실 바닥에 제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튜브의 마개를 열고 연고를 짜냈다. 내 피 같은 돈.
살갗 위로 연고를 도포했다. 곧 무릎 한 면이 잘 닦아놓은 유리마냥 번뜩거렸다. 명호는 제 무릎을 점술구처럼 들여다보았다. 옅어졌나. 아니면 기분 탓일까. 명호는 제 타투를 들여다보았다. 색소를 앗아가는건 매일 바르는 연고가 아니라 단발적인 레이저 치료임을 아는 데도 그랬다. 큰마음 먹고 해낸 지출과 통증이 제값을 해내야만 했다. 아까우니까.
가만히 보고 있자면 군데군데 옅어진 부분이 보였다. 명호는 그 아주 작은 얼룩을 보며 골몰했다. 그때 민규는 왜 병원에 왔을까. 어쩌면 걔도 나처럼 이 인식표 같은 나팔꽃을 지우러 왔을지도 몰라. 걔가 거짓말은 잘 못해도 박박 우기는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흐음, 명호가 제 구부린 목을 똑똑 꺾었다. 아주 평온한 상상이었다. 이게 왜 기분이 나쁜지 도통 알 수가 없네. 그나저나 민규는,
또 병원에 올까.
민규와의 연애담은, 아니면 전 애인 민규는. 반추하기 좋은 종류는 아니었다. 동기들이 캠퍼스 커플은 진짜 멍청한 것이라며 농담처럼 웃어댈 때. 그때 그 말을 조금이라도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하는게 나았을까. 연애는 발랄하고 산뜻했으나 무너지는 과정이 진창이었다. 서로 언질 없이 늦게 귀가해서는, 열심히 서로를 탓했다. 나만 잘못했냐는 유치한 이유였다. 나중에는 그간 서운했지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일까지 동원되었다. 이기적이야, 라는 말을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썼었지.
그 이후로는 일절의 대화도 없었다. 한참 왁왁대고 나면 소강상태에 돌입하기 마련이었다. 한참 열을 내다가 이러다가는 죽겠다 싶어 쉬어가는 타이밍. 진짜 누구의 잘못인지 냉정하게 판가름하는 귀한 시간. 그런데 그것과는 달랐다. 기싸움도 눈치 주는 것도 아닌 거북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운무처럼 에워쌌다. 일주일을 넘어섰을 때에는 화가 나기보다 지쳤다. 민규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명호가 근처에 오면 입을 닫고 초연해했다.
'우리 좀 오래 만났나 봐.'
결별 선언은 머잖아 명호의 입에서 나왔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이 땅에서는 백 세 시대가 왔다고 떠들어대고, 정말 모든 사람이 백 살까지 살 수 있다면 나는 고작 수명의 이십 퍼센트를 조금 넘게 채웠을 뿐인데. 그 조금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찰나를 너와 함께했을 뿐인데. 명호는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민규는 아주 오랜만에 명호를 제대로 마주보고는, 온순하게 수긍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끄덕.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민규가 없었던 예전처럼. 한동안은 잘 지냈다. 수업을 듣고 여가를 보냈다. 그러다 덜컥 사라졌다. 오며가며 머리꼭지만 보다가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니, 그제야 상실감이 쩍쩍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거다. 잘 지낸 것도 아니고, 그냥 지낸 것도 아니고. 버텨냈을 뿐이었던 거다.
그 후로 한동안 울적하게 지냈었지. 울다가 잠든 날도 있었다. 문제는 당시 지내던 곳이 학교 기숙사라는 거다. 그것도 룸메이트 셋으로 만실을 채운 방. 숨죽여 눈물을 찍어내다가 눈코입이 모두 퉁퉁 부은 새벽으로 보름은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연락해볼까, 하며 고민해본 밤은 그보다도 더 숱했다. 웃긴게, 줄줄 울던 기간에는 유독 밥이 잘 넘어갔었다. 마음 쏟는 것도 결국은 다 체력이다 이건가. 평소보다 과식하고는 기어이 체한 밤. 명호는 짤막한 꿈을 꾸었다.
'야, 명호야. 이거 봐.'
민규의 자취방이었다. 명호는 민규의 옷가지를 주워입고 민규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무릎을 세운 민규가 바지를 걷어 올렸다. 무릎 위 나팔꽃이 곧장 보였다. 민규는 손톱이 바싹 깎인 제 손끝으로 나팔꽃의 외곽선을 더듬었다.
'나 여기 번졌어.'
살이 잘 접히고 펴지는 곳이라 색이 좀 번진다더니. 민규의 선 바깥은 명호의 것보다 좀 더 흐릿해 보였다.
'너도 번졌냐?'
물어보는 얼굴이 너무 태평해서. 명호는 금세 눈가가 달아오르는걸 느꼈다. 그걸 들키기가 싫어서 양손을 모두 치켜들어 민규의 어깨며 팔뚝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가슴께가 펑 터질 것 같았다. 심장이 뛸 때마다 폐가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명호는 생각나는 것들을 아무거나 주워던지듯 말했다. 민규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이럴 거면 타투 왜 했어? 말문이 터지고 오래지 않아, 명호는 더는 민규를 때릴 수가 없었다. 헤어지자고 말했던건 나잖아. 그러나 명호는 더없이 건조한 얼굴로 잠에서 깼고, 여전히 속이 울렁거릴 뿐이었다.
별안간 전화가 울렸다. 선잠에서 깬 것처럼 놀란 명호는 진동하는 핸드폰을 뒤집었다. 발신자, 민규. 잊고 지낸지 꽤 된 열한 자리 숫자가 이름 아래에 놓여있었다. 연락하고 싶을 때에 무작정 꾹꾹 참기만 했지, 지우거나 차단할 생각도 못 했었다. 명호는 드르륵 움직이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이 번호를 안 쓰고 있다면 어떡하려고.
"여보세요."
"……."
아이들이 와아, 하고 뛰노는 소리가 들렸다. 명호는 그 사이 연고 뚜껑을 닫았다.
"너 다음 예약 언제야?"
"그건 왜."
"언젠데."
"알려주기 싫은데."
"나도."
타투 지우려고.
조금 불퉁한 목소리. 명호는 제 귀 언저리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새기는 것도 같이 했는데 지우는 것도 같이 하다니. 명호는 뜸 들이다 날짜와 시간을 일러주었다. 민규는 그새 다른 제안을 했다. 식사 하고 들어갈래? 명호는 거절했고 민규는 재차 물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패턴이었다.
명호는 실랑이를 하며 잠시 딴생각을 했다. 민규가 지나간 뒤에 찾아온, 또 다른 지난 연애'들'을 떠올려보았다.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제 무릎을 가리키며, 친구 따라서 해봤다는 거짓말. 그 거짓말을 욕실 거울 앞에서 미리 연습했던 날들. 그들에게서 민규가 보일 때마다 이별을 고하고는 했던.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이 타투도 얼룩도 아니게 될 것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잔업은 때를 가리고 찾아오는게 아니더라. 점심 식사 시간 이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명호는 허둥지둥 가방을 챙겼다. 사원증을 찍어 퇴근 기록을 남기고 역까지 달렸다. 러시아워를 조금 빗겨났다고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명호는 열리지 않는 쪽 문에 기대어 다리를 떨었다. 그래봤자 늦은걸 되돌릴 수는 없지.
멀찍이 민규가 보였다. 병원 근처 라멘집의 허리까지 오는 간판 옆.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에서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미묘하게 차려입은 것 같은 모양새. 명호는 초연해지려고 애썼다. 늦어서 서두른 주제에 그 사실을 들키기 싫었다. 그거야 너랑 나는,
"미안."
간섭하면 안 되는 사이잖아. 명호는 결단을 내렸다.
"됐거든. 하나도 안 미안해 보이거든."
민규가 투덜거렸다. 도저히 저녁을 먹고 진료를 받을 만한 시간이 못 됐다. 둘은 아주 느리게 걸었다. 보폭도 좁고 디딤도 느렸다. 명호는 길게 나열된 가로등을 보다 시선을 발끝으로 내렸다. 느린 걸음은 암묵적인 합의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민규가 명호의 보폭을 맞추는 거였다. 답지 않게 걸음이 느린건 나 혼자구나. 명호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너 번호 안 바꿨더라."
"응."
명호는 대강 목울대만 울려 답했다. 어색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느낌. 명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걸어갈 길을 보았다.
"지우는거 아파. 많이."
"……나도 알아보고 온 거거든."
"그럼 됐고."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먼 길은 아니었다. 병원이 있는 빌딩이 코앞이었다. 명호는 민규와 저녁 약속을 잡은 이래로 틈만 나면 연습해왔다. 혹시나 내가 헛다리를 짚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기. 착각이 과하다고 핀잔을 들어도 그래서 뭐, 하며 넘기기. 반짝반짝한 시절은 멀지 않은 과거에 있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타향살이도 이만하면 됐지 싶다가도, 몇 번의 연애가 실패를 향해 곤두박질치다가도. 결국은 가계부에 다음 달 예산을 적던 이유가 민규 때문은 아니라는 거다.
"나 너랑 다시 만날 생각 없어."
진짜야.
별로 반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껄끄러운건 아니지만. 나도 너도 그때보다 더 어른이잖아. 키가 크는건 아니지만 충분히 자랄 수 있는 시간이었잖아. 조금 더 유연하게 생각해보자. 네 평생의 사랑이 내가 아닐 수도 있고, 내 평생의 사랑도 네가 아닐 수 있는데. 뒤에 이을 말을 줄줄 쏟아낼 수 있었지만 하지 못했다.
명호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민규는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서서 층계참 가득 걸음 소리를 울리웠다. 그마저도 문이 닫혀 희끄무레해졌다. 어쩌면 민규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몰랐다. 정곡을 찔렀던 아니던, 민규의 자존심을 벅벅 긁어버렸을 테니까. 명호는 제 명치께를 살살 쓰다듬었다. 속이 조금 쓰렸다. 아마 오늘 약속에 늦지 않아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면. 그리고 하자고 마음먹었던 말을 지금처럼 그대로 했더라면. 그럼 귀가할 때에는 잔뜩 체해서 손발이 차가웠을 거다. 볼썽 사납게 얼굴을 허옇게 띄우고.
접수를 마치자마자 이름이 불렸다. 그때까지 민규는 병원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버튼식 자동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명호는 유령처럼 처치실로 끌려들어갔다.
분명 첫 회차는 살살해준 거야. 모처럼 온 환자가 도망가면 안 되니까. 환자가 다녀야 돈을 벌잖아.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통증 덕에 정신이 없어서 지갑 정리도 채 하지 못했다. 타투가 정강이나 팔뚝 같은 데에 있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관절을 덮은 피부는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열감과 통증이 한데 뒤엉켜서 걷기가 어려웠다.
"택시 잡아줄까?"
민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호는 조금 놀란 마음에 민규를 뒤돌아봤다. 기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상처받은 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치밀자 다시금 속이 아팠다. 약들이 하나같이 속 깎이는 것들이라, 귀가하면 뭐라도 간단히 먹으라던데. 약을 처방받으며 들은 주의가 귓가에서 흐늘거리다 사라졌다. 민규가 건물 밖으로 앞서 나갔다. 차도를 향해, 그리고 명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머잖아 대교 방면으로 넘어가던 택시 한 대가 갓길에 섰다.
"고마워."
이제 진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작별 인사 즈음은 해두는게 좋을 것 같았다.
"잘 지내."
"너도. 밥 잘 먹고."
여기서는 다른 사람 걱정해줄 때에 밥 먼저 찾아. 언젠가 민규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식사 꼭 챙기세요. 잘 챙겨 먹고 다녀. 덕분에 관용구처럼 쓰게 되었던 말들.
"나 팔뚝 긁혀서 왔었어.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가지고."
"……."
"……그냥 내가 옛날 생각 좀 하다가 감성에 젖었었나보다, 하고 넘겨."
묻지 않은 질문들과 조금은 알아내고 싶었던 대답들. 어쩌면 민규도 또 한 번의 안녕을 직감했을지 몰랐다. 기사가 경적을 울렸다. 탈 건지 말 건지. 이보다 더 어색해지지 않을 마지막 기회를 잡으라는 소리 같았다. 알았어. 명호는 머뭇대다 택시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제 대답을 민규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주행 중인 차들의 배기음과 먼 클락션과 노랫소리가 흥건했다.
미터기에 적힌 숫자가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신호 대기가 길었고 일부 구간은 아직도 막혔다. 명호는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싱숭생숭하다는 표현보다 다른 말이 더 필요했다. 조금 더 복잡한 심경을 표현할 수 있는 걸로. 명호는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을 차곡차곡 늘어보다 곧 포기했다. 너에게 모진 사람이 된 것 같아서가 아니라, 네가 또 너 혼자…….
명호는 민규의 말을 곱씹다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오판할 수가 없었다. 이번만은 민규 혼자 만들어 내놓은 결론이 아니다. 그냥, 나한테 져준 거지. 생각이 행진하는 개미 떼처럼 줄줄이 늘어졌다. 민규는 병원으로 돌아갔을까. 오늘 당장 진료를 받을 수 없으면 다른 날에 예약을 잡을까. 너는 그동안 누구를 만났을까. 만났다면 네 나팔꽃을 무어라 설명했을까.
왜 대수롭지 못할까. 너도 나도.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쓰며 지나쳤을 수도 있었고.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를 설명해주고 포옹 따위와 함께 쿨하게 헤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쓸만한 선택지가 이렇게나 많은데.
택시가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흔들렸다. 콩,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머리를 부딪쳤다. 다시 맥이 풀린 것처럼 차창에 기댔다. 명호는 이대로 기절했다가 며칠 뒤에 깨어나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 불 나갔다.'
한참 껌뻑이더니. 민규의 자취방 욕실에 달린 두 개의 전구 중 하나가 수명을 다했는지 켜지지 않았다. 어둑하고 좁은 욕실에 둘이 나란히 서서 이를 닦았다. 같은 향 나면 누가 의심하는거 아니야? 제 발 저려 몸을 사렸던 것도 다 옛날이야기다. 샴푸도 치약도 바디워시도 같이. 민규는 마트에서 생필품을 두 배로 사면서도 실실 웃었다.
얼마 전부터, 민규는 밑도 끝도 없이 커플 타투를 하자며 졸라댔다. 주변에서 누가 했어? 아는 사람이 도와달래?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꺼내 봐도 민규는 오롯이 제 의견이라 답했다. 떼쓰는 민규는 아직 제법 난처한 일이어서, 명호는 질문을 던지며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었다. 뭘 하고 싶은데? 나팔꽃. 서로의 이름이나 생일도 아닌 것.
'왜 나팔꽃이야?'
입안에 든 치약 거품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다. 치카치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이를 닦던 민규가 움직임을 멈췄다.
'비밀인데.'
'그럼 안 할래.'
뭔지도 모르고 대뜸 새겨? 못마땅해서 고개를 돌리자 민규가 다시 매달려왔다. 억지로 팔짱을 껴오는걸, 좀 더 편하라고 팔을 벌려줬었지.
'탄생화야?'
'몰라. 아닐걸? 너나 나나.'
'그럼 뭐냐니까?'
민규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잠시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거울에 손을 짚었다. 세로로 긴 선을 그어 내리고는, 용수철 모양을 그리며 구불구불하게 상승했다. 명호는 거울 속 민규를 보고 있었다.
'얘네는 자랄 때 옆에 있는걸 감으면서 자라잖아.'
'그렇지.'
'이렇게, 딴딴하게 붙어가지고…….'
그러고는 와락, 명호를 힘주어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휘청거렸다. 미끄러지면 어떡하려고! 한 소리 해주다가도, 제 몸을 잔뜩 구기고 안긴 민규가 좋아서. 그게 정말 애교스러운 행동이어서. 명호는 거품을 뱉지도 못한 채 웃었다. 간지럼을 타듯 상쾌하게 깔깔거렸다. 응, 그래도 안 할래. 거절도 잊지 않았었는데.
3.
주말에는 여전히 빨래와 청소기를 돌렸다. 냉장고 청소는 간소하게나마 했다. 며칠 내내 날이 흐려 커튼을 열어뒀더니, 집에 둔 화분 이파리가 아주 조금 탄 것이 발견됐다. 이 광량을 못 버텼구나. 명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회사에 둔 다육식물을 떠올렸다. 무엇이 문제인지 조금 더 웃자랐지만 아직도 동글동글했다. 머잖아 겨울이 오면 온실 속 화초처럼 돌봐주어야 했다. 무릎의 나팔꽃은, 훨씬 더 얼룩덜룩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보기 흉해졌다. 지난 시술은 눈에 띌 정도로 차도가 있었다. 돈 잡아먹는 귀신과 다름 없었으나 신기하긴 했다. 이게 정말 되는구나, 싶고.
다음 시술을 기다리고 있던 때. 민규에게 전화가 왔었다. 미안, 잘못 걸었어. 그러고는 끊었다. 사실일까, 아닐까. 가늠해봤자 민규를 전부 헤아릴 수는 없었다. 사실이던 아니던 내가 뭘 더 할 수 있나. 통화를 마친 명호는 민규의 번호를 지웠다. 그 이름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저녁에는 집 근처 마트에 다녀왔다. 냉장고가 비어있으면 허전한데, 뭐든 사두면 지나치게 오래 먹었다. 무른 야채를 치우는 일은 끔찍하지만 제때 배를 못 채우면 서글펐다. 야채 몇 종류와 다섯 개 묶음 라면 한 덩이를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손에 든 봉투를 갈무리하며 꺼내 들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의 수신 전화. 명호는 번호를 유심히 보다가, 그냥 손에 쥔 채 마저 걸었다.
끊겼던 전화는 곧바로 다시 걸려왔다. 방금 전과 같은 번호였다. 오래도록 울리는걸 또 무시했다. 그리고 또다시 울렸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떤 쪽으로든 소소하게 나쁜 것들. 곤경에 처한 상태라면 어떡하지. 결국 명호는 전화를 받았다. 여차하면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만나서 얘기 좀 해."
여보세요, 하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들이닥쳤다. 하도 황당해 되물어보니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네 번호도 지웠는데. 차단은 못했지만. 명호는 제 속으로 실토했다. 봉투를 든 손이 더 꾹 쥐여졌다.
"전화로 해."
"지금 만나."
"안 돼."
"밖이야?"
"나는 네가 이럴 때마다 진짜 힘들어."
이럴 때, 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대체 얼마나 오래전이었나. 명호는 실언을 한 기분이었다. 수화기 너머 민규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그래.
식사를 하자고 졸라댔을 때처럼 실랑이를 할 수도 있던 노릇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랐다. 명호는 민규가 가 전 애인한테 매달리는 사람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제 마음이 들쑤셔지는 것 같은 기분은 더 싫었다. 오래 끌 이유가 없었다. 장을 본 것을 정리하고, 슬리퍼에서 스니커즈로만 갈아신었다.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한강공원이요.
민규는 나무 벤치에 앉아있었다. 편안한 차림이었다. 그 모습을 명호는 어쩐지 결연해졌다. 빈 옆자리에 가서 앉는 대신 민규의 앞에 섰다.
"……이제 말 해."
"너 나한테 왜 헤어지자고 했어?"
제발. 진짜 마지막 정으로서 네가 구남친짓 하는건 원하지 않아. 그래도 나는 너도 나도, 이제는 무난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이게 한 토막짜리 해프닝이었으면 좋겠다고. 명호는 반사적으로 질색했다. 민규는 눈을 깜빡이지 않을 사람처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라고 날 불러서 물어봐.
"그게 궁금해서?"
너 이겨보겠다고 바득바득 애쓰는 것도 싫고, 그러자니 의젓하게 구는 것도 싫어서. 아무도 나한테 어른스럽게 굴라고 시킨 적 없는데. 속에서는 집채만한 파도가 치는데 겉으로는 잔물결 하나도 안 띄우려고 기를 쓰고 버티는게 지겨워서. 피로하고 지쳤단 말이야. 속내가 튀어나오려는걸 꾹꾹 견뎌내니 콧대가 시큰거렸다. 울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그냥 말해버릴까. 고양된 감정은 실수를 빚어내기에 딱 좋다. 가끔 무릎 위 나팔꽃을 자각할 때마다, 온종일 널 생각했다는 것까지 말해버리면 어쩌지. 그런데 말하면. 말 한다고 네가 알아줄까. 그런데 뭘 말해야 하지. 명호는 이제 제가 무얼 말해야 좋을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알면 편해질 것 같아?"
"너랑 제대로 헤어지려고."
나도 너처럼 싹 털어내고 싶어서 그래. 삽시간에 힘이 빠졌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느끼는게 허탈함인지 안도감인지도 몰랐다. 너 편하려고. 아니지. 편해지기는 할까. 흐리멍텅하게 합의된 이별에게서 무얼 돌려받을 수 있을까. 명호는 그간의 제 생활을 헷갈려했다. 내가 널 싹 털어냈었나. 아니면 묻어두고 애썼나.
"그런 거나 물어보는 거면 난 갈래."
쏘아붙이기 무섭게 비가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물자욱의 지름이 꽤 컸다. 드문드문 내리던게 땅을 뒤덮었다. 명호에게는 억지 같은 대화를 끝낼 또 다른 무기다. 이걸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나. 예고 없던 빗줄기는 거세지는 속도 마저 기이하게 빨랐다. 척척 걸어 나가고 있자니, 뒤에서 민규가 소리쳤다.
"야!"
"왜!"
명호는 뒤돌지 않았다. 부르니 맞섰을 뿐이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따듯한 물로 씻고 차로 몸을 덥힌 다음, 오늘만은 타투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깊게 자고 싶었다.
"비 오잖아!"
"그게 내 잘못이야?!"
"우산 사서 가!"
"됐어!"
민규가 쫓아오는 듯 말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런 비에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과, 어쩐지 새침한 얼굴로 우산을 펴드는 사람들. 그 사이를 소리치며 달렸다. 천둥이 치면 비명을 지르듯 반사적이었다. 낯익은 감각이었다. 공원 출입로에서 이렇게나 많이 걸어왔던가. 길은 끝이 없는 것 같았고 어깨가 시렸다.
"……나도 좀 그만하자, 진짜."
비 오는 날은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린다. 명호는 자세한 원리까지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작게 말해도 다 들릴걸 광고라도 하듯 고래고래 질러댔던 거네. 헤어진 연인들의 질척질척한 뒷이야기 생중계. 자각과 동시에 과부하가 왔다. 정말 지친 목소리. 명호는 뒤돌고 싶지 않았다.
"타투 지우지 말라고 안 할게. 왜 지우냐고 짜증 냈던 거, 이거는 솔직히 미안해. 근데 다시 한 번 생각 좀 해주면 안 되냐? 너는 헤어지자는 소리 함부로 안 하잖아."
안 하잖아. 확신이었다.
"진심이었으니까 그러자고 한 거라고! 너랑 별로 헤어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거든!"
"아, 크게 말하지 마!"
명호가 성을 내며 뒤돌았다. 쫄딱 젖은 김민규.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근육이 당기나, 아니면 소리치며 걸어서 숨이 차는 건가. 양 무릎에 손을 디딘 채 서있었다. 쫙 펼친 손바닥 아래로 나팔꽃이 보였다. 살갗이 젖어서 더 선명해진 색이 보였다. 어딘가 비어 보이지도, 주변이 울긋불긋하지도 않았다.
민규는 빗속을 올곧게 걷는다. 그래서 그 모습에, 그 말에, 명호는 으밀아밀히 상상을 하고 만다. 어쩌면 다시 만날 '우리'를. 나는 네 최선이지만 최고가 되지는 못할 수도 있잖아. 그때 동기들이 그랬잖아. 캠퍼스 커플은 멍청한 짓이라고. 그런데 이게 캠퍼스 커플보다 멍청한 짓이면 어떡하려고. 첫 이별보다 더 꼴불견인 모습으로 헤어지면 어떡할래. 그러면 차라리 누구든 찾아가서 뒤통수라도 때려달라 해. 싹 다 잊어버리게……. 비관적인 상상 속에서, 본 적도 없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땅에 박힌 대가 아니라 서로를 얽은 덩굴들. 휘청이며 자라난 꽃대 같은 것들.
정말 우리는 서로를 지탱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얄팍한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