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리꽃
W. 오도
“카메라 들어갈게요. 서로 마주 보시고. 네, 시작할게요!”
유독 볕이 쨍쨍한 여름이다.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뜰 수도 없는 강한 빛에 명호는 눈을 찌푸렸다. 조명까지 받으며 고군분투하는 배우들은 아니나 다를까 땀을 뻘뻘 흘리며 와이셔츠가 다 젖게 만들고 있었다. 서명호는 뻐끈한 고개를 한 번 돌리고 옆에 있던 스태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더우니까 쉬는 시간 좀 가지게. 배우든 스태프든 쉬는 시간이 필요하긴 했는지 다들 쉬기에 바빴다. 서명호가 일어서서 쭉 둘러보고 있으니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감독님 이거 저희 팬 분들이 준비해주신 건데……. 혹시 빵 좋아하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김민규는 울망한 눈망울로 쳐다보더니 축 처져서 자리로 돌아갔다. 스태프들이 안 좋게 본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는지 촬영장에서는 유독 축 처져있는 김민규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다닌다. 서명호가 그걸 알면서도 김민규를 내친 이유는 캐스팅 과정 때문이었다.
“아니 PD님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이서진이 하고 싶다고 했다니까요?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잖아요, 이유가.”
“캐릭터가 안 맞잖아. 대본 안 봤어? 투박한 시골 청년 연남동을 이서진이 어떻게 연기해.”
“아니 그러면 다른 배우들도 있잖아요. 네? 왜 하필이면 김민규인데요.”
“김민규가 제일 어울리고, 제일 잘생겼으니까.”
그 말을 하는 서명호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과 의심이 없었다. 스태프는 얼이 나가 자리를 슬쩍 피했다. 그 이후로 스태프들의 눈초리와 압박이 있었지만, 명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장 어울리는 사람 중 얼굴은 제일 베스트로. 그게 서명호 PD의 철칙이었다. 김민규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까지 스태프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진행했다는 것은 통칭 얼빠 PD 서명호에게 김민규의 얼굴이 취향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인에 스태프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도는 소문이 있었기에 김민규는 환영받지 못했다. 서명호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친해서 캐스팅한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촬영 첫날까지만 해도 활기차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지만 서명호는 애써 무시했다.
“명호야, 나랑 사귀자.”
침대가 크게 덜컹하면서 서명호는 눈을 떴다. 이것도 직업병이라고 생각한 명호는 일어나서 물을 한 잔 마셨다. 영화 촬영이 들어간 지 5일째 되는 날이면 늘 이런 꿈을 꿨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꿈에 나온 건 남주인공인 김민규가 맞지만, 부르는 이름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서명호의 이름이었다.
과음했던 어제를 떠올리며 서명호는 찌푸린 얼굴로 한여름의 매미처럼 울어대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공일공 구구팔팔 구구팔팔? 무슨 번호가……. 대리운전이야 뭐야. 손가락이 화면 위를 떠돌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서명호 감독님. 저 연남동 역 맡은 김민규인데 통화 괜찮으세요?”
“네, 말하세요.”
따분한 일적인 얘기라서 그런지 서명호의 입에선 하품이 절로 나왔다. 열심히 얘기하는 애를 두고 끊을 수도 없고. 적당히 대답해주니 김민규는 고맙다며 전화를 끊었다. 쉬면서 생각해보니 오늘 역시 빡빡한 일정이었다. 스케줄러에 대충 메모를 하던 중 띠링하고 알림 소리가 울렸다. 공일공 구팔구팔……. 아까 그 번호였다. 척 봐도 장문인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감독님, 오늘 조언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회식 말고도 저랑 한 번 저녁 같이해주세요. 진짜 감사합니다. 촬영장에서 뵐게요! 감독님 오늘 진짜 멋있으셨고……. 끝없이 길어지는 문자에 서명호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마저 할 일을 했다. 김민규의 애타는 속도 모르고 답장 대기 시간은 길어만 갔다.
“지연아, 좋아해.”
“미안해.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서명호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날카롭게 지적을 하던 이미지가 남아있는 터라 스태프들은 긴장하며 서명호를 쳐다봤다. 서명호의 바로 옆에 있던 스태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연신했다. 정작 이목의 주인공인 서명호는 민망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물론 스태프들은 민망해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감독님이 또 화가 났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그중에 몇 명은 속으로 김민규의 탓을 하기도 했다. 딸꾹질을 하던 스태프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적혀있는 문으로 들어가 15분 뒤에야 생수를 들고 나타났다. 그래서 서명호가 왜 일어났나? 답은 간단했다. 연기에 몰입하고 보던 서명호가 어젯밤 꿈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서명호의 목 뒤 빨개져 있었다. 뒷부분만 빨개져서 마침 긴 뒷머리가 가렸기 때문에 다행히도 들키진 않았다.
“감독님, 이 부분 이렇게 해도 될까요?”
문제는 서명호가 김민규를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서명호는 김민규를 연애 상대로 느낄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어쨌든 일적인 관계고 사랑보단 우정을 쌓는 의도로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명호가 간과한 부분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김민규가 서명호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었고, 하나는 사람은 감정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서명호가 25살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너는 애가 뭘 제대로 하는 게 없냐.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가 없어요, 응? 이 세계가 얼마나 각박한데. 이런 거 팔아선 돈 못 벌어. 평생 남 밥만 얻어먹고 살래?”
서명호는 항상 뭐가 되었든 참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앞뒤 없이 무조건 화내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몇 번하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유난히 기분이 안 좋았던 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여느 영화처럼 비상구 계단에서 조용히 떨어지는 눈물만 쓸어 넘기고 있던 명호는 그날 김민규를 처음 만났다.
“괜찮으세요?”
김민규는 어떤 마음으로 던진 말인지는 몰라도 서명호는 그저 자신의 감정을 보고 있는 김민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민규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서 있는 저 배우가 자신의 이미지를 챙기기 위해서 묻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눈 바로 밑에 있던 눈물까지 말끔히 닦아내고 일어서니 이번엔 앞에 있던 김민규가 울고 있었다. 당황한 서명호는 손에 쥐고 있던 휴지를 얼굴에 내밀었다. 연기하는 것 같이 보이진 않는데 그렇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눈앞의 이 신인 배우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명호는 상황이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어깨를 토닥이며 갖가지 위로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원래 제가 잘 안 우는데……. 오늘따라 왜 이러지.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아, 제가 차가운 걸 못 마셔서요. 저한테 주지 마시고 눈에 대고 가세요.”
김민규는 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지 입술을 꾹 물고 커피를 다시 받아들었다. 서명호는 머뭇거리며 입을 떼려다가 그만두었다. 애써 참고 있는 울음을 금방이라도 터뜨릴 것 같아 어깨만 몇 번 두드려주고 김민규를 보냈다. 갑자기 우는 자신을 보고 눈물을 흘린 김민규의 뒷모습은 촬영 때보다 훨씬 작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감독님. 김민규가 『검은 나비』 촬영 때는 중반 되고선 스태프들 완전 개무시했대요. 와, 저희한테도 그러면 어떡해요?”
“인터넷에서 그래? 안 그러니까 걱정 마.”
서명호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검은 나비』 촬영장에도 직접 있었기 때문에 소문을 믿지 않고 쭉 자신의 이미지로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스태프는 민망한지 시선을 돌려 촬영하는 것을 집중해서 보는 척했다. 몇 분 지나고 김민규가 웃는 장면이 나오는 순간 스태프는 손을 올려 입을 막고 말했다.
“민규 씨 확실히 주인공이랑 어울리네요.”
“소문이 좀 있어서 그렇지 확실히 다른 배우들한테 없는 게 있어요.”
옆에 지나가던 스태프도 동조하는 걸 보고 서명호는 선택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벌써 가을이었다. 촬영은 어느새 중반쯤 와있었고, 스태프가 우려하던 갑질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무난하게 흘러가는 촬영이 반복되었다.
“감독님, 이거 보셨어요?”
“뭔데?”
스태프가 눈치를 보더니 서명호의 귀에 가까이 붙어 입을 뗐다.
“김민규요. 찌라시 도는 게 좀 있었는데 이번에 일이 커져서…….”
스태프의 핸드폰을 받아서 드니 왼쪽 상단엔 HOT이 떠있는 글이 보였다. 대충 김민규가 검은 나비 때 갑질을 했고, PD한테 폭력을 행사했으면서 아직도 활동하는 게 싫다고 하는 글이었다. 댓글 창을 보니 김민규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이긴 했지만, HOT이 뜰 정도면 한두 명 본 것도 아닐 테고 좀 영향이 클 듯했다. 모르던 사람들이 김민규를 찾아보는 건 홍보가 되겠지만 안 좋은 건 늦게 대처할수록 독이 그냥 퍼지는 수준이라 가만히 둘 수도 없었다. 김민규의 소속사는 꽤 큰 곳이었지만 어찌나 일을 못 하는지 김민규를 아예 버리고 드라마 하나로 대박 친 배우만 밀어주고 있었다. 하여간 중형 소속사들은 이래서 안 돼……. 혀를 차니 스태프들이 몸을 움찔였다. 그나저나 큰일이었다. 애초에 제작비가 덜 들어가는 연애물이더라도 최소한의 자금은 있어야 영화를 제작할 수 있을 텐데.
“다 뺐다고?”
“네 애초에 피디님 믿고 반신반의하게 투자한 분들이 많아서…….”
“일단 민규 불러와”
고민에 잠기려던 찰나 김민규가 멀리서 허겁지겁 뛰어왔다. 쟤를 어쩌면 좋니……. 오랜만에 보는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촬영이 중반쯤이 되니 뜬소문은 슬슬 걷혀서 기가 죽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엔 꽤나 기가 죽어있었다.
“죄송합니다. 회사에 얘기를 해뒀는데……. 좀 늦는 것 같아요.”
“어깨 좀 펴. 주인공이 그게 뭐야. 다 알고 있으니까 불안해하지 마.”
어깨를 토닥이니 김민규는 눈물을 꾹 참았다. 뒤에서 스태프들이 의외라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서 조금 민망해져 손을 떼니 김민규가 덥석 손을 잡았다. 비장한 얼굴로 잡아서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조용했다. 상체를 숙여 올려다보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니 손이 더 떨렸다. 그러고 보니 좀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이마에 손을 짚으니 정말 몸이 뜨거웠다.
“열나는 거 아냐?”
“아뇨. 울어서……. 괜찮아요.”
“좀 쉬다 와. 눈 붓기도 좀 빼고.”
대기실로 돌려보내니 메이크업이 많이 지워졌는지 매니저가 등을 때리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제 큰 문제를 해결할 차례다. 그래도 예산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메꾸면……. 계산기를 10번 두드려도 적자가 나왔다.
“어쩌죠, 감독님.”
“일단 소속사에 계속 문의 넣고, 계속 잡아봐야지.”
그 이후로 서명호는 종일 쉴 수가 없었다. 온종일 발 벗고 홍보를 해도 설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숨만 절로 나왔다.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배가 되는 손해 때문에라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회사가 공지를 띄우긴 했어도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지 않았는지 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았다.
“감독님 괜찮으세요?”
에너지 음료를 건네주는 김민규의 얼굴이 웃겼다. 진지하면서도 걱정하는 눈썹이 서명호의 웃음 버튼을 누른 것인지 아니면 2주 동안 잠을 총 14시간 자서 그런지 서명호는 김민규를 보며 웃었다.
“귀엽네, 고마워.”
스태프들은 의아한 듯 둘을 쳐다봤고 김민규는 이미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누가 보면 오늘 소품이 토마토인 줄 알 정도로 새빨갰다. 그 이후로 서명호가 죽어갈 때마다 김민규는 각종 음료수를 사와서 스태프들에게 나눠주었다. 꼭 마지막 순서는 서명호였고 그럴 때마다 서명호는 김민규의 손을 잡고 한참 얘기를 나눴다. 사실 둘의 얘기 속엔 별 내용이 없었다. 연기 디렉팅이 80%를 차지했고 나머지 20%는 김민규의 사심 질문과 서명호의 성의 있지만 짧은 답변 뿐이었다. 서명호의 다크서클이 짙어질수록 김민규가 음료를 사러가는 빈도가 높아만갔다.
“PD님 이거 진짜일까요?”
“LSD 미디어?”
“네, 이서진이 퇴짜 맞았는데 LSD 미디어에서 지원해주겠다고 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꽤 큰 금액이라서 받으면 분명 적자는 안 날 것이었다. 하지만 의도가 문제였다. 스태프의 말처럼 이서진을 퇴짜 놓았는데 굳이 왜?라고 생각하며 화면을 보니 메시지가 하나 더 와있었다.
[저 이서진입니다. 나리꽃 내용이 너무 좋아서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서명호 PD님 팬입니다. 나중에는 저도 주인공으로 뽑아주세요. ㅎㅎ]
공식 계정이니 사칭일 리도 없고, 피드에도 감독으로 참여한 작품이 꽤 있으니까 이런 이유라면 그나마 말이 되긴 하는데…….
[팬심이라기엔... 너무 많은 금액 아닌가요?]
[제가 너무 좋아서 드리는 건데... 아니면 밥이라도 한 끼 같이 해주시면 어떠실까요?]
[일단 감사히 받겠습니다. 편하신 날 잡아서 보내주세요.]
[제가 더 감사하죠... 너무 팬입니다 PD님]
일단 한시름 덜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니 음료수를 들고 오던 김민규가 달려와서 옆에 앉았다. 오다가 스태프들이 눈에 띄었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눠주느라 더 걸렸지만, 자신의 음료수와 내 캐모마일 티만 남았을 때 옆에 앉아 내가 입을 떼기까지 기다렸다.
“고마워.”
“오늘 마지막이니까 특별히 쿠키예요.”
“다행이네. 오늘 딱 지원금이 들어와서 개봉은 할 수 있겠다.”
무슨 일인지 궁금한지 눈치를 보는 게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났다. 대충 설명해주니 기뻐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설명을 잘못했나? 고개를 기울이니 돌변해서 기뻐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안 기뻐?”
“그럴 리가요. 드디어 촬영이 다 끝나서 좋기도 하고 상영되는 게 너무 기대되는데요? 솔직히 검은 나비 이후로 저한테 작품이 들어올 줄 몰랐거든요. 잘됐으면 좋겠어요.”
“근데 왜 그런 헛소문이 돌았던 거야? PD 때렸다는 거.”
“글쎄요. 그때 PD님이 제 뺨 때린 적이 있었는데 볼이 따가워서 만지려고 손 올리던 걸 봤나? 잘 모르겠어요.”
하긴. 검은 나비 때 PD가 유독 김민규를 싫어하긴 했지. 아무 이유 없이 싫어하기 장인이었지 아주. 김민규는 그 때를 떠올리는지 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괜히 뻘쭘해져 김민규의 어깨만 몇 번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태프들은 마지막 회식이라며 배우들에게 사인을 받고 있었다. 벌써 차가운 겨울이었다.
“갈까?”
고개를 끄덕이는 김민규의 손을 잡고 끌고 스태프들 사이에 끼었다. 모자를 꾹 눌러써서 그런지 아무도 못 알아보니 그게 또 나름 재미있었다. 김민규 키가 너무 커서 금방 들통나긴 했지만.
“PD님 어디 가세요!”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나도 저랬다. 다들 돈 때문에 마음고생을 꽤 했는지 술자리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겨우 빠져나오니 밖에는 담배를 물고 있는 김민규가 서 있었다. 옆을 보니 다른 스태프도 꽤 있었고……. 지나쳐 화장실을 갔다가 나오니 스태프들은 들어가있고 추운지 몸만 덜덜 떨고 있는 김민규만 남아있었다.
“담배 피우는 줄은 몰랐는데. 냄새가 안 나나?”
가까이 붙으니 김민규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왜 담배 냄새는 안 나지? 앞으로 걸어가며 김민규에게 붙을 때마다 점점 멀어지는 게 귀여워 계속 돌진하던 차에 가로등 앞에서 김민규가 딱 멈췄다. 그 덕분에 서명호는 김민규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멈춰.”
“추워서요.”
“다시 들어갈래?”
“손잡아주세요.”
서명호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잡으니 김민규는 그대로 편의점으로 서명호를 데려갔다. 둘 다 대외적으로 얼굴은 많이 안 알려져 있는 터라 편의점 알바생도 대충 인사만 하고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계산대 근처에 있는 따뜻한 유자차와 좀 깊숙이 들어가야 있던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하나씩 쥐고 주변 거리를 조금 걸었다. 둘이 없어진 걸 안 스태프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서명호는 패딩까지 울리는 진동을 애써 무시했다.
“나 차 좋아할 것 같은 이미지인가? 맨날 차만 주네. 이번엔 유자차야?
“차가운 거 싫어하시잖아요.”
“내가 그런 거 말한 적이 있었나?”
아무 말 없이 입가에 쌉쌀한 미소만 띠고 있는 김민규를 본 서명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해서 핫팩 없이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손을 놓아야 할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았다. 따뜻한 손바닥과 달리 차가운 바람에 손등은 얼기 직전이었다. 김민규는 괜찮나 싶어 고개를 든 서명호가 추워서 빨개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고서야 옆에 있던 공원에서 몸을 녹였다. 김민규를 그네에 태워 레모네이드와 유자차를 바꿔 쥐여주고 레모네이드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유자차를 잡고 있는 손 손등에는 핫팩을 대주려 더 가까이 붙었다. 다른 쪽 손등으로도 옮겨가며 몇 번 반복하니 어느새 잔뜩 취한 얼굴로 잔뜩 취한 서명호의 행동을 바라보는 김민규를 발견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민규는 울고 있었다. 따뜻한 눈물에 얼어버린 듯 차가운 손은 독인가 싶어 서명호는 핫팩 대기를 반복했다.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 입술까지 도달했다. 사람의 본능이란 원래 흐르는 액체를 빠르게 혀로 핥으려는 본능이 있다. 얼마 전 신입이 떡볶이를 먹다가 흐른 소스를 재빨리 핥는 것은 서명호는 두 눈 똑똑히 봤었다. 그 당시 서명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흐르는 액체를 막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서명호는 바로 실행했다.
“눈물은 꽤 짜네.”
이후에는 별일이 없었다. 주머니에 있던 휴지가 생각난 서명호가 김민규의 눈물을 닦아줬고 그대로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서로의 온도는 통해있었다. 서명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자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까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기에 가까스로 이겨냈다. 실온에서 미지근해진 편의점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는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김민규는 다음 날 3시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사실 중간에 4번을 깼지만 4번 모두 서명호와 있던 일이 꿈이라고 생각해 이어 꾼다면서 다시 잠에 들었다.
어느새 개봉일이 한 달 뒤로 다가왔을 때, 슬슬 기사가 나기 시작했다. [김민규X서명호 감독. '나리꽃'으로 새로운 장르를 꽃피운다], [김민규X서명호 5월 19일 개봉 ‘나리꽃’ 예고 공개!], [이서진 소속사 LSD 미디어가 알아본 ‘나리꽃’ 흥행할까] 등등 다양한 헤드라인이 쏟아져 나왔다. 서명호가 일을 끝내고 지쳐 잠들어있을 때 김민규는 착실하게 하나씩 서명호와의 갠톡방에 기사 링크를 옮겨 담고 있었다.
[한 달 뒤에 보겠네]
[보고 싶ㅇ]
김민규는 타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던 자신의 손가락을 질책했다. 애매한 오타로 남겨진 카톡에도 다시 답장이 왔다.
[보고 싶네]
서명호와 김민규가 사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촬영 날 이후로 카톡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면 진전이 없다고도 할 수는 없었다. 따로 데이트나 약속은 몇 번 잡지 않았지만, 그게 김민규와 서명호에게는 큰 의미였다.
다시 한 달이 지나고 제작 발표회가 열리는 날 김민규와 서명호는 만났다. MC는 서로 어색한 듯 편안해 보이는 분위기에 집중해 질문했다. 별 특별한 것 없이 진행되는 제작 발표회 사이에서도 두 사람에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제작 발표회를 마치고 만나자고 약속이 되어있어서 그런지 제작 발표회 날이라 그런지 두 사람은 평소보다 많이 상기되어있었다.
제작 발표회가 끝나고 둘은 마땅한 곳이 없어 김민규의 집으로 향했다. 김민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문 앞에서 5분만 기다려달라며 들어가 3분 만에 나왔다. 뭘 했는지 바로 꼬질꼬질해진 모습이 서명호는 좋다고 생각했다. 서명호가 김민규의 머리를 쓰다듬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좋은 집은 아니었으나 인테리어는 꽤 서명호의 취향이었다. 서명호는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하는 김민규를 관찰했다.
“너무 빤히 보시는 거 아니에요?”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파를 써는 모습이 또 서명호의 웃음을 불렀다. 김민규는 적당히 깔끔한 사람이었고, 요리도 아직 본 적 없지만 적당히는 하는 사람 같았고, 적당히 귀엽게 굴었고, 몸이랑 얼굴도……. 이건 적당히가 아니라 많이 좋았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음식을 다 했는지 접시로 옮겨 담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서명호는 이것까지 귀여우면 진짜 큰일 나는 건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김민규는 벌렸던 입을 다물고 얼마 안 남은 음식을 마저 덜고 식기를 챙겨 서명호의 앞에 앉아서야 입을 뗐다.
“멋있으시잖아요, 다정하시고.”
“뭐가 멋있었는데?”
서명호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어봤지만 진지한 표정을 하는 김민규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저 캐스팅해주셨을 때부터…….”
“그때부터? 되게 빨랐네.”
“그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고 그냥 저 작품 활동이 많이 없어서 불러주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지 궁금해서 계속 PD님 옆에 있다가……. 아니 근데 PD님 보고 안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 이서진 씨도 연락 왔었잖아요. 일도 열심히 하시는데 잘하시고…….”
장황하게 멋있는 말들을 쏟더니 이젠 부끄러운지 귀가 붉어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샐러드에 있는 방울토마토. 딱 그 색이었다. 서명호는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꾹 눌러 입에 담았다. 시선을 피하던 김민규가 할 말이 있는지 타이밍을 엿보는 게 느껴졌다. 그게 또 귀여웠던 서명호가 말을 끊임없이 하며 몇 번 놀리니 김민규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나는 왜 너 좋아하냐고 안 물어봐?”
“좋아……. 좋아하세요?”
이 숙맥을 어쩌면 좋니.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오늘 처음 만난 이 포크도 알걸? 그제야 조심스럽게 왜요? 하는 묻는 김민규가 웃겼다. 이래서 좋아하는 건데. 서명호는 김민규의 손을 위에서 덮어 잡고 말했다.
“멀리에서 네가 보이면 세상이 영화 속 같아. 또 어쩜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가 있을까. 그래서 좋아.”
“저 그렇게 티 났어요?”
“응, 그리고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어.”
괜히 비장하게 무게를 잡는 서명호에 김민규는 서명호 쪽으로 귀를 내놓았다.
“얼굴이 내 취향이야.”
김민규는 그 말을 듣자마자 힘이 풀렸다. 아 뭐예요 진짜. 서명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먹으며 잡고 있던 손을 고쳐 손을 잡았다. 서명호의 목까지 덮은 머리 때문에 김민규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서명호도 김민규와 같은 방울토마토였다. 손을 잡고 있던 서명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김민규의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요?”
“너 왼손잡이니까 이러면 계속 손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슨…….”
김민규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싫냐고 물었더니 그건 또 아니라며 빨간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서명호는 김민규가 좋았다. 김민규는 서명호를 좋아했다. 둘의 관계는 그럴 뿐이었다. 좋아하는 것엔 이유가 있었지만, 관계에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