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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시작

​W. 치악산규잇당도최고

  " 미안해. "

 

 

 

  더운 공기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단순 더위에 흐르는 물방울인지 아닌지 구분은 안 했다. 딱히 달라질 건 없으니. 시선을 맞추기 위한 목 움직임이 아닌 시선을 피해 바닥을 향한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네가 고개를 숙이는지. 여름의 시작이었다. 이번 여름은 길겠다.

 

  중학교 딱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명호는 꽤 떨려있었고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교실은 냉랭했다. 번호순대로 앉을 걸 예상하지만, 굳이 맨 뒤 창가를 택해 앉았다. 새 학교 새 학기를 시작하는 교실이 낯설기만 했다. 많이 클 것이라는 근거 없는 논리에 의해 한 치수 크게 산 교복은 그리 빡빡하진 않았지만 부직포 같은 질긴 질감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깨를 두어 번 으쓱거리며 일어나 학교 탐방에 나섰다. 여긴 자기주도실, 여긴 방송실 그리고 또 여긴 소각장. 그 뒤편엔... 고양이? 키우는 고양이인지 목줄까지 차곤 사료를 아드득 씹어먹고 있다.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지만 괜히 경계심만 키울까 쭈그려 앉아서 보며 말을 걸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사료는 누가 줬어? 대답을 기다린 질문은 아닌지라 그냥 혼자서 중얼거렸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조례를 시작하는 소리가 울렸고 그제야 명호는 저린 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급하게 뛰어갔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빈자리 없이 꽉 채운 자리 주인들이 고개를 돌렸고 시끌시끌한 분위기도 단번에 무중력 공간이 됐다. 낯선 시선들이 모인 순간에 명호는 몸이 굳고 눈만 도르륵 굴려댔으나 그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들이 생각한 인물이 아니라는 듯 다시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조용히 뒷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는 어느새 채워져 있었지만 짝꿍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타이밍은 못 잡았다는 확신한 명호는 에어팟을 꽂고 창밖이나 바라봤다. 가장 먼저 가고 싶었던 도서관도 문이 닫혀있어 빌릴 수 없으니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취향들로 가득한 플레이리스트뿐이었다.

  며칠이 흘렀을까 자신의 자리가 변경 됐을 거라 예측한 명호의 추리는 완벽히 빗나갔다. 몇 번이고 자기소개를 할 텐데 굳이 자리를 맞출 필요가 있겠냐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따라 명호는 안락한 뒷자리를 사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 이름도 모르는 태권도부 걔는 또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아무랑도 통성명을 하지 않았는지 아무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드디어 짝꿍이 생겼다. 자신에게도 드디어 옆짝꿍이 생겼다는 사실에 앉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 짝꿍은 환하게 웃으며 통성명을 먼저 했고 그에 따라 명호도 통성명을 했다. 이름은 김민규. 그게 민규와 나눈 첫 마디였다.

  그리고 3주가 지났다. 민규는 여전히 바빴다. 여러모로. 5교시마다 사라져서 반 애들은 밍데렐라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모두 밍사빠라 부른다. 분명 우리보다 이성과 접촉할 시간이 적은데 어찌 그런 많고도 많은 사랑을 하는지 밍사빠라는 별명에 걸맞은 사랑을 하고 계신다. 처음엔 옆반 민지를, 그다음엔 방송부 누나 그리고 그다음엔 프린트를 주워줬던 이름 모를 여자애까지. 민규는 많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달이 지났다. 시험이 끝나고 모두 체육대회에 정신이 팔려있다. 종목 중 변경할 예정자가 있는지, 점심에 시켜 먹을 메뉴 고민 틈 속 반티 누락 건으로 명호와 민규반은 더 시끌벅적해졌다.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놀 생각만 가득한 17살들이었다. 여기서도 집중력을 발휘한 명호는 차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민규는 명호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 단잠에 빠졌다. 자기 직전 그 짧은 시간에 민규는 어김없이 짝사랑에 대해 풀어놓았고 고양이도 누르면 운다는 책을 읽는 명호를 방해하다 잠에 빠졌다.

  동아리 시간도 정신이 없었다. 명호는 CL이라는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쉽게 말해서 Cat love, 고양이 사랑동아리다. 얼마 남지 않은 체육대회를 앞두고 중성화 수술을 할 예정인 고양이에 대해 계획을 잡고 있었다. 부장인 원우의 의견을 따라 날짜를 잡고 병원을 예약했다. 예산을 제외한 계획들이 쉽게 풀려 자투리 시간이 생겨 서로 사소한 사담을 나눈다.

 

 

 

  “ 나 며칠 전에 태권도부 걔 봤다? ”

  “ 어 진짜? 뭐하던데? ”

  “ 고백받는 거 같던데, 걔 인기 많잖아. ”

  “ 하긴 그 얼굴에 없는 게 이상하다. ”

  “ 명호 너 그 친구랑 친하지 않아? ”

 

 

 

  응. 친하지. 턱을 괸 채로 종알종알 얘기하는 부원들을 바라봤다. 남 얘기에 관심이 많은 점도 신기했으나 민규가 인기가 많다는 것도 신기했다. 꽤 오래 보고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자기가 모르는 민규가 많았다. 명호는 그 부분에서 부럽다는 감정보단 조금 더 무거운 감정을 느꼈는데 정확히 형용하기 어려워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머릿속 한 켠에 자꾸 말 하나가 맴돌았다. 민규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였으면 좋겠어.

  체육대회가 다가왔다. 첫 고등학교 체육대회인 만큼 멋있는 반티였으면 좋겠다고 밀어붙인 반장의 반티는 결과적으로 낙찰이 되었고 현재 명호가 입고 있었다. 동아리 친구 석민이 다가와 멋있다. 명호랑 그 옷이랑 어울려! 라며 엄지를 여러 번 치켜세워 칭찬을 잔뜩 해주곤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명호도 석민에게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죄수 반티를 입고 있는 석민에게 어떤 칭찬을 해줘야 할지 몰라 칭찬만 덥썩덥썩 받으며 고맙다고만 말하고 끝났다. 이윽고 좌측에서 갑자기 여자애들이 시끄럽게 환호를 질렀다. 얼추 예상가는 등장이었다. 우리에겐 금사빠인 걔. 민규가 경찰복을 입고 오고 있었다. 분명 싸구려 반티인데 민규가 입으니 꽤 태가 났다. 정작 김민규는 관심이 없겠지만. 체육대회가 시작하고 여러 경기와 응원들이 오고 갔다. 명호는 딱히 운동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체육대회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것과 별개로 단거리 달리기 성적이 좋았던 터라 반강제로 전 학년 단거리 달리기 예선에 진출했다. 발목을 돌리며 자세를 잡았고 탕 소리와 함께 달렸다. 짧은 시간에 끝난 명호는 손등에 2등이란 도장을 받고 반으로 돌아갔다. 턱걸이 결승 진출이지만 결승 진출만으로 득점을 얻는 상황이기에 반 친구들이 명호에게 환호하며 좋아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달려와 최고라고 외칠 줄 알았던 민규가 없다. 그리고 자신의 휴대폰도 없다. 민규에게 맡겼던 휴대폰은 민규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결승까지 시간이 남은 명호는 근처를 돌아다니며 민규의 행방을 찾았고 자신이 서 있는 뒤편에서 미세한 고백이 들렸다. 목소리는 민규가 아니지만 느낌이 찌릿왔다. 몰래 보는 건 명호 취향이 아니지만 호기심이 이겼기에 벽에 붙어 빼꼼 그곳의 상황을 살펴봤다. 역시나 민규가 맞았다. 그것도 고백을 받는 상황인데 명호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고 벽에 기대어 멍하니 있었다. 민규... 키도 크고 잘생겼다. 충분히 인기가 많을법하다. 명호도 그걸 알고 있었는데 드라마 속 반전을 발견한 사람처럼 멍해있었다. 또다시 알 수 없는 감정이 명호를 불렀고 명호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해답을 내리려 하고 있었던 순간이었다.

 

 

 

“ 명호? ”

 

 

 

  민규다. 그 순간 알 수 없던 감정은 사라지고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미안. 민규. 몰래 들을 생각은 없었어. 휴대폰 찾다가 우연히... 민규는 명호와는 다른 대답을 내뱉었다.

 

 

 

  “ 나 고백받은 거 아니야. 나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

 

 

 

  횡설수설하는 민규를 보자니 명호는 웃음이 났다. 왜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대변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푸스스 웃으면서 민규에게 휴대폰을 받고 함께 돌아갔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기말고사까지 끝났다. 밀려오는 해방감과 진도를 다 나간 선생님의 시간은 그야말로 자유였다. 작년에 유행하던 공포 영화를 틀어놓고 시끌벅적 할일을 했다. 민규는 체육대회 이후 또 바빠져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간간이 얼굴을 내비칠 때마다 애들이 앞서 이번엔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물어왔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도 찾은 마냥 민규는 뒷머리를 어색하게 쓸며 아직 안 바뀌었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운명의 여자를 만났길래 그러냐며 깔깔 웃어대기도 했다. 그때쯤 민규의 별명은 바뀌었다. 밍순남 김민규순정남이라는 줄임말인데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며 간혹 유쾌한 선생님들이 민규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 좋아해. ”

 

 

 

  방학식에 민규의 고백이었다. 잠깐 체육관을 갔다 오겠다며 기다려달라는 민규의 말에 명호는 잠깐 교실에서 기다렸고 민규는 애들이 다 빠지고 한참 뒤에야 많이 기다렸냐며 달려왔다. 괜찮다는 말과 함께 가방을 건네는 명호 앞에 민규는 우물쭈물 꿀 먹은 입을 가지고 멀뚱히 서 있다 고백을 내뱉었다.

  ‘ 우린 친한 친구인데 가능한 건가? ’ 명호의 머릿속에 첫 번째로 지나갔던 생각이었다. 민규랑 명호는 서로 친구 관계다. 정말 마음이 잘 맞고 오래갈 친구. 의문이 들었다. 곧바로 따라붙은 질문은 ‘ 내가 민규를 좋아하나? ’였다. 명호의 머릿속이 복잡할 때 한마디의 말이 더 얹어졌다.

 

 

 

  “ 미안해. ”

 

 

 

  명호의 대답을 듣기도 전 민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명호는 뭐가 미안한지 물어보려다 풀이 죽은 민규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화가 났다. 나를 좋아하는 것이 기죽을 행동이라면 안 해야지. 명호는 민규에게 먼저 갈게.라는 한마디만 한 채 혼자서 문으로 향했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이번 여름은 길겠다.

 

 

 

  *

  *

  *

 

 

 

  그로부터 이주가 지났다. 항상 집에만 있던 명호의 방학 중 첫 외출이었다. 고양이 건강검진 핑계로 남아있던 예산을 다 쓸 예정인지 점심엔 초밥을 먹자며 난리였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카톡과 달리 모인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부장 선배인 원우와 석민 그리고 오고 있는 순영이 전부였다. 아. 여담으로 순영이 없을 때 원우가 말했는데 고양이 사랑동아리에 첫 멤버가 순영이었다고 한다. 명호가 새 학기 첫날에 마주친 고양이 목줄의 주인도 순영이라는데 이유는 호랑이 대신 키우는 거라나 뭐라나... 털 알레르기가 있으면서 뭘 키우냐는 원우의 중얼거림은 덤이었다. 늦었지! 라며 후다닥 뛰어오는 순영의 등장에 여담은 마무리됐다.

 

 

 

  “ 근데 명호야 너 무슨 일 있어? ”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다 원우가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명호는 머쓱하게 반대 측 어깨를 문지르다 입을 조심히 뗐고 시곗바늘이 어느새 7칸을 느릿느릿 넘어갈 때쯤 얘기를 끝마쳤다. 가만히 듣고 있던 순영이 물었다.

 

 

 

  “ 근데 명호 이상형은 원우 같은 사람이라 하지 않았어? ”

  “ 네? 제가 언제... ”

  “ 전에 차분하고 잘생기고 배려 있는 사람이 좋다며. 원우 아냐? ”

  ” 물론 선배가 제 이상형이 맞긴 하는데... ”

 

 

 

  너 그거 좋아하는 거 맞아? 원우가 가장 원초적이며 단순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명호는 눈치 보다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공간은 조용해졌고, 목 넘김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명호야, 너는 원우형이랑 안고 싶고 손잡으면 좋고 옆에 없으면 보고 싶고 그래? 석민이 도르륵 눈을 돌리다 명호에게 말했다. 명호는 갸웃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나 스킨십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민규는?

 

 

 

  “ 민규는 괜찮아. 민규는 좋아. ”

 

 

 

  답은 이미 정해졌다. 민규는 명호를 좋아한다. 명호도 민규를 좋아한다.

 

 

 

  *

  *

  *

 

 

 

  “ 김민규! 밖에 누가 너 부른다. ”

  “ 나를? ”

  “ 어~ 휴식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갔다 와. ”

 

 

 

  문을 여니 더운 바람이 밀어져나왔다. 신경질적이게 반팔을 팔락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날씨와 반대인 시원한 색을 입고 벽에 기댄 명호를 발견했다. 예상치도 못한 인물에 민규는 몸이 굳었고 발걸음을 멈췄다. 시선을 느낀 명호가 민규를 바라봤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갔다.

 

 

 

  “ 좋아해. ”

 

 

 

  더운 공기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단순 더위에 흐르는 물방울인지 아닌지 구분은 안 했다. 딱히 달라질 건 없으니. 시선을 맞추기 위한 목 움직임을 했다. 걔가 나를 보고 웃고 나도 걜 보며 웃었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이번 여름이 길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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