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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잊혀지는 기억

​W. 익명C

  -

 

  또 다시 계절이 돌아 이곳에서 추운 겨울을 맞이했다. 입사 때만 해도 회사에 이렇게 오래 머물 거라고 명호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뜻대로 되겠는가. 명호는 이제 자신의 자리에 놓인 파란색의 서류철이 오늘 할 일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단 걸 알 수 있었다.

  출근 바코드를 찍은 명호는 사원증과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고 탕비실로 향했다. 유일하게 명호만 마시는 홍차 티백을 뜯어 종이컵에 넣는 것이 그의 회사 일과의 시작이었다. 차례로 전기포트에 물을 대피고, 뜨거워진 물을 종이컵에 부으면 무사히 회사에서의 첫 번째 할 일이 끝난 것이다. 다음은 자리로 가서 서류를 확인하고 할 일을 분리하는 것이 명호의 두 번째 일이었다.

 

 

  어제랑 비슷한 업무, 저번 주에 제대로 처리 못한 업무, ‘그렇게 하자.’ 해놓고 다시 내려온 업무, 또 했던 업무... 명호는 어제나 오늘이나 별 다를 것 없는 일들에, 오늘도 별 다름 없는 하루구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밖에서 무슨 소식을 듣고 왔는지 권주임이 시끄럽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명호에게 여러 사담을 늘어놓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명호 씨, 그거 들었어?”

  “아니요.”

  “오늘 우리 팀에 신입사원 들어온대.”

 

  아, 그래요? 명호는 권주임의 말에 대충 반응을 해준 후, 마저 서류를 분리했다. 서류철 정리가 끝날 쯤, 그나저나 이 시기에 신입을 뽑네, 생각하던 명호는 아차하며 손을 멈칫했다. 책상 중앙에 각을 잡고 정리되던 서류철이 한 순간에 삐뚤거리며 쓰러지는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명호는 쓸데없는 업무가 하나 더 늘었다.

  사수.

 

 

  -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김민규입니다.”

 

 

  -

 

  “그럼, 이거 가르쳐준 거 하고 있어요. 저 잠시 커피 좀 타올게요.”

  “네!”

 

  명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탕비실로 향했다. 일종의, 첫 만남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었다. 탕비실 문을 열자 누가 봐도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던 권주임이 “명호 씨”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아마 동질감에서 온 반가움일 것이라고, 명호는 생각했다.

 

  “신입 일 하는 건 어때?”

  “뭐... 이제 막 설명해 주는 거라”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 명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직 모르겠다는 말을 대신했다. 물을 적게 넣어 그런지 금방 딸각하며 커피포트의 버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명호는 미리 인스턴트커피 가루를 담은 종이컵에 물을 붓고 권주임을 쳐다봤다. 커피는 이미 다 마셨는지 손에는 구겨진 종이컵만 있었다. 자신의 자리에 펼쳐진 서류를 쳐다보던 권주임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명호씨 막내 탈출이네. 일도 좀 줄겠다.”

  “하지만 당장은,”

 

  명호는 탕비실 창으로 보이는 민규를 또 다시 쳐다봤다.

 

  “일이 늘어난 거니까요.”

 

  명호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일도 가르쳐줘야 하고…, 회사 얘기도 좀 해줘야 하고요.”

  “에이, 일 가르쳐주는 건 금방이지. 그거 끝나면 이제 일 좀 더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명호는 권주임의 말에 눈동자를 한번 굴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고 있던 형체를 잃은 종이컵을 버린 권 사원은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아련한 표정을 한번 지어보이고, 자기 먼저 다시 자리에 앉는다며 탕비실을 나갔다. 탕비실 문이 닫히고 명호도 시계를 확인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많이 지나버린 시간에 명호는 처음보다 식어버린 커피를 입 안에 다 털어놓고 사무실로 나갔다.

 

 

-

 

  제 업무 보랴, 신입 일 가르치랴. 명호는 오늘 집에 가면 꼭 와인 한 잔을 하고 자리라 다짐했다. 명호의 옆 자리에서는 민규가 시킨 일을 잘 하고 있는 건지, 연신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가 났다.

  얼마 안가 소리가 멈추더니, 민규는 똑똑하고 명호 쪽의 파티션 두들겼다. 막 작업 메일을 보낸 명호가 민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수님 밖에 눈 오는데요.”

  “눈이요?”

 

  민규의 말에 명호는 놀라, 일어나서는 창밖을 바라봤다. 언제부터 온거야… 갑자기 펑펑 쏟아지는 눈에 명호는 허,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뱉었다. 쓸데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산을 집에 두고 나온 것이 생각난 탓이었다. 어이없어진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명호의 얼굴을 쳐다보던 민규는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명호가 설명해준 것을 다시 점검하려 스크롤을 옮겨보았다.

  창밖을 보던 명호가 민규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자신이 설명해준 것을 잘 끝내 놓았다며 칭찬을 바라는 눈빛을 한 사내 한 명이 제 앞에 있었다. 명호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금방 잘 하겠네요.”

 

 

  -

 

  내일까지 올 생각인지, 쉼 없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쓰레기들에 명호는 출구 쪽 로비에 서서 고민 중이었다. 택시를 부를지 역까지 걸을지 하는, 자신의 지갑 사정에 대한 고민. 그러다 명호의 옆으로 붙는 거대한 그림자에 그는 흠칫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지 칭찬에 눈을 반짝이던 민규였다. 꽤나 멍한 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순간 명호는 자신의 옆에 선 거대한 체구에 감탄하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금방 아차, 싶었는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민규를 올려 봤다.

 

  “민규씨, 이제 가는 거예요?”

  “네. 내일 할 일 미리 체크하느라. 근데 사수님은 왜 아직 여기 계세요?”

 

  명호는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택시 탈지, 역까지 걸을지 고민하고 있어서요.”

 

  아아. 민규는 회사 밖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태워다 드릴까요?”

 

 

  -

 

  아직 서로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지 몰라 감도는 정적, 그리고 따뜻한 차안의 공기. 명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금방 제게 말을 걸어오는 민규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원래 지하철 타고 다니세요?”

  “설마요. 차 끌고 다니죠.”

  “오늘은 왜 로비에 서 계신 거였어요?”

  “자동차 검진 때문예요. 어제 카센터에 맡겼거든요.”

 

  대답을 들은 민규는 잠깐 고개를 갸웃 거리나 싶더니, 아아, 하며 또 아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 하시는 구나, 라며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는 명호가 듣지 못한 듯 했다.

  “그럼 내일은 차 끌고 오시는 거예요?”

  “네. 내일은 차 끌고...”

 

  아, 내일.

 

  민규의 말에 이제 생각난 것이 있는지 명호는 민규와 차 앞을 번갈아서 쳐다 보다 휴대폰을 꺼내 캘린더를 확인했다. 민규가 얘기한 내일 날짜에 ‘반차’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민규씨, 제가 아까 얘기를 못 했는데, 저 그거 때문에 내일 반차 썼어요.”

  “반차요?”

  “네, 반차.”

 

  때마침 내비게이션이 한마디 거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

 

  창밖에 선 명호는 민규에게 미안해했다.

 

  “오후에야 갈 거 같은데, 민규씨 혼자 하실 수 있겠어요?”

 

  민규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웃었다.

 

  “네! 아까도 잘 했으니까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명호는 얼른 들어가 보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요, 혹시 도움 필요하며 전화해요. 고마워요, 데려다 줘서.”

  “네. 들어가세요.”

 

  창문이 다 닫히기도 전에 차는 눈앞에서 멀어졌다. 금방 시야에서 차가 사라지자 명호는 추위에 몸을 감싸며 아파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오늘 민규의 얼굴에서 느낀 기시감이 생각났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한참을 생각하던 명호는 집 앞까지 가서야 생각을 관뒀다. 그냥 신입이니 신경 쓰이는 것이겠지. 명호는 잠깐 고민하다 현관에 서서 민규에게 문자를 남겼다.

 

  [ 내일 점심 밖에서 같이 먹어요, 내가 살게요. ]

 

  이럴 거면 반차 괜히 썼네.

 

 

  -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문자를 본 민규는 곧바로 명호에게 전화를 걸다가 아차 싶어 통화종료를 눌렀다. 전화는 역시 그렇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은 민규는 명호에게 알겠다며 문자를 남겼다. 전송된 문자를 확인한 민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서 한참동안 소파에 누워 흰 색의 천장을 바라보던 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야한다고 생각만 한 게 벌써 두 시간이 흐른 후였다. 첫 출근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익숙하지 않은 건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하는 명호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지인이 많았던 민규는 명호의 소식을 이미 충분히 들었고, 그럴 것이라고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를 실제로 다시 마주 했을 상황은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민규가 처음 명호의 소식을 접한 건, 겨울 자습이 막 시작 무렵이었다.

 

 

  *

 

  민규는 교실에 걸린 시계 한번, 자신의 책상 아래 몰래 넣어둔 휴대폰 액정 한번 번갈아 쳐다보다, 지쳤는지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이미 명호의 실기 시험이 다 끝났을 시간인데, 지금까지 연락 한 통 오지 않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명호와의 메신저 창에는 민규가 아침에 보낸 응원 문자가 읽히지 않은 채 있었다. 쓸데없이 불안했던 민규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어제했던 얘기가 문득 생각났다.

 

 

  -

 

  “너는 좋겠다, 민규야.”

  “저요? 왜요?”

  “그냥. 공부도 잘 하고,…”

 

  무표정으로 버스 창밖을 한참 쳐다보던 명호가 민규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얼굴도 잘 생겼고. 민규는 예상외인 명호의 칭찬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눈동자를 굴리다 그냥 웃어보였다.

 

  “형도 잘 생겼어요. 그림도 잘 그리고요!”

  “...그런가.”

 

  명호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내일 실기 마지막이야.”

 

  명호의 말에 주먹을 쥐어 보인 민규는 창에 비추는 명호의 얼굴과 눈을 맞췄다.

 

  “이번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형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 창에 비춰졌다. 명호도 그 얼굴을 잠깐 마주했다.

 

  “... 그래, 넌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 좋겠어.”

  “네?”

 

  작게 내뱉은 명호의 말과 함께 버스 문이 열렸다. 빠르게 버스 뒷문으로 향한 명호는 데려다줘서 고맙다며 민규에게 손을 흔들었다. 금방 문이 닫혔다. 민규는 그림자진 명호의 표정에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

 

  화장실을 나온 민규는 터벅터벅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자습치고 계속 커지는 웅성임에 뭔가 싶어 교실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한 자리에 몰려들어 같이 뉴스를 보고 있는 듯 했다. 뉴스는 오늘 한강으로 학생 하나가 뛰어들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불안이라고 믿고 싶던 민규의 생각이 부질없어지는 순간이었다.

 

 

  *

 

  어떻게든 연락하고 싶었지만 절대적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명호의 부모는 명호에게로 오는 모든 만남도 연락도 차단했다. 민규도 그렇게 차단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게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까, 다시 들은 명호의 소식은 ‘기억상실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통째로 날려먹었단다. 민규에게 친구가 전한 말이었다.

 

  명호의 기억에 민규가 없었다.

 

 

  민규는 원래 가고 싶던 대학은 뒤로하고 점수에 맞춰 원하는 과를 들어갔다. 겪고 싶지 않았던, 돌릴 수 없는 무너진 시간의 결과였다. 다행히도 마음에 맞지 않았던 대학생활 탓에 군대도 금방 다녀와 버리고 졸업도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큰 아버지 손에 이끌려 회사에 취직한 것이다.

 

 

  -

 

  서명호입니다.

 

 

  *

 

  습관은 역시 무서웠다. 나름 반차 쓴 날인데, 저절로 떠지는 눈에 명호는 평소 출근하는 것처럼 씻고 아침을 먹었다. 역시 습관이란 어쩔 수 없나, 설거지까지 끝낸 명호는 점심까지 한참 남은 시간을 쳐다보며 손을 털었다. 아직까지 신입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잘 하고 있겠지. 명호는 메신저 창을 넘기며 먼저 연락해볼까 고민하다가 됐다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

 

  그러다 생각난 게 있는지 명호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생각났어.

 

 

  -

 

  “별 일 없었나 봐요, 오전에 연락이 없어서.”

  “네! 괜찮았어요. 중간 중간에 권 주임님이 봐주셔서.”

 

  자리에 앉은 민규는 떠온 물 컵 하나를 명호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그에 명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컵을 쥐었다. 근데 민규씨 혹시 S고 나왔어요?

 

  “네?”

  “아니 민규씨가 그, 동창인가 해서요.”

 

  명호는 잠시 말이 없다, 이런 말해도 되려나, 하며 짧게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마저 말을 꺼냈다.

 

  “제가 그 학교를 다녔는데, 사고로 그때 기억을 잃어서.”

 

  말하던 명호는 지금은 정말 별 거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 민규씨한테 물어본 건, 그때 병원에서 다시 깨어나고서 폰을 봤던 게 생각이 나서요. 메신저 창에서 유일하게 즐겨찾기 되어있던 친구였는데, 그때 그 사람 이름도 민규였고, 프사도 민규씨랑 닮았던 거 같아서요.”

 

  민규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연락을 못 했어요. 그때는, 두려웠어요. 혹시라도 안 좋았던 것들이 기억날까봐. …지금 생각하면 그게 참 아쉬운 일인데.”

 

  명호는 괜히 물 컵 안을 들여 보았다. 미안해요, 갑자기 이런 얘기해서. 명호는 다시 옅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민규도 그에 답하듯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는 사수님이 이런 얘기 해주셔서 좋은 걸요.

 

  “다만, 제가 그 민규가 아니어서 아쉬운 마음이네요.”

 

 

 

 

 

  #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해서는 양 손 무겁게 캔버스와 받침대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민규는 대낮에 한강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유일한 사람은 명호였다.

 

  “민규야!”

 

  민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표정이 환해져서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금방 명호와 눈이 마주쳤다.

 

  “형!”

 

  명호는 무거움 짐을 들고 달려오는 민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꽤나 한 사람을 사랑스러워 하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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