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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 코어 러브

​W. 헤네시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폐부를 찌르는 3월의 저녁이었다. 찬 기운이 감도는 바닥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구겨져 있는데 누군가가 쿵쿵쿵 문을 두드렸다. 고막을 때리는 소음. 잠이 확 깼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머리통이 지끈거렸다. 인상 쓰고 걸어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그새 배달원이 떠나버렸는지 상자 하나만이 문 앞에 덜렁 놓여있었다. 현관에 서서 상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예감이 불길했다. 까치 새끼라도 왔다 갔나 보네. 비꼬듯 중얼거렸다. 커터 칼로 상자를 난도하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애완용 씨앗인간 키우기 세트: 24시간 안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관찰 가능합니다!

 

  이게 뭐지. 포장지 위에 쓰여진 문구를 읽었다. 이상야릇한 내용이었다. 애완용. 씨앗인간. 24시간. 요람에서 무덤까지. 관찰 가능. 연관성이 하나도 없는 단어들의 나열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 사고방식을 가진 대중들을 상대로 판매하기엔 적합한 물건이 아닌 것 같다는. 

 

  형태가 망가진 상자엔 고객보관용 송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천천히 살펴보았다. 주문자 김민규. 확실히 내 이름이 맞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대로 정지했다. ‘그것’이었다. 일주일 전 만취 상태로 인터넷 서핑을 하다 홧김에 질러버린 바로 그 상품.

 

  그러니까 그날 화가 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개강 첫날부터 지각해서. 허겁지겁 뛰쳐나가다 새로 개시한 신발 밑창에 껌이 달라붙어서. 씹퉁거리고 있는데 버스를 놓쳐서. 빡쳐서 이 꽉 깨물고 지하철 탔는데 동성의 중년 변태가 내 엉덩이를 주물럭대서. 사귄 지 일 년 넘은 애인에게 뜬금없는 이별통보를 받아서. (그것도 면대면이 아닌 카톡메시지 한 통뿐이었다. 어이없어서 답장 보내려는데 번호 차단까지 당한 상태였다.)  근데 저랑 헤어진 지 이틀 만에 그녀의 왼손 반지가 다른 걸로 바뀌었단 소문이 들려와서. 실은 그 반지의 주인공이 얼마 전 복학한 같은 학과 선배라는 걸 알아버려서.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길래 그녀가 날 차버리게 만든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선배 에스엔에스를 찾아내 염탐했고, 분노에 휩싸여 쌍욕했다. 아니 얘 진짜 눈깔 삐었나? 존나 못생겼던데. 그냥 못생긴 것도 아니고 개 못생겼던데. 미친 거지? 자존심이 상했다. 여자라는 족속은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단언하며 성질을 냈다.

 

  단순히 애인과 헤어져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그 애와 좋은 마음으로 만나고 있었던 건 맞지만, 그렇지만, 그 애를 붙잡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런 건 내 선에서 사절. 가오 죽게 잡긴 뭘 잡아. 다만 나보다 못난 작자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날 괴롭게 했다. 단언컨대 살면서 누구한테 면상으론 져 본 적 없었으므로. 태생적 일류의 삶으로 태어나 불특정 다수에게 눈길만 받으며 살아 온 인간. 그게 나였다. 

 

  그날 밤 승관을 불러내 술집에 갔다. 이 형 왜 이래. 부승관이 묵묵히 자작하고 있던 나를 이상하다는 듯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서 다 말했다. 그는 내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호들갑 떨며 날 비웃었다. 

 

  “형 맨날 잘난 척 잘생긴 척 나대더니 언젠가 한번쯤 이런 날 올 줄 알았지. 자기가 만나주는 거라느니 어쩌니 하더니 결국 상대한테 차였죠? 김민규도 나무에서 떨어지죠?”

  “야. 차인 거 아니라고.”

  “그럼 뭔데요. 아닌 척 괜찮은 척하면서 자존심 챙기는 거 다 보여. 미안한데 그게 더 꼴 우습거든요 병신아.”

 

  쉬지 않고 꽂혀드는 신랄한 악담. 배알이 꼴려 생맥 오백을 단숨에 털어넣었다. 탄산이 목구멍을 따갑게 쏘아댔다. 잔을 내려놓자 비치는 건 내 얼굴. 그걸 멍하니 응시했다. 누가 봐도 상처받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기분이 팍 상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데. 아니,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런 건 나답지 못한 태도였다. 알콜이 넘어간 뱃속이 쓰리고 더부룩했다. 소화 되지 않는 감정. 그게 내 속에 있었다. 예기치 못한 불행에 무방비로 얻어맞는 기분이 싫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에는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야 상처받을 상황이 닥쳐와도 최소한의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들이킨 알콜의 횟수를 손으로 꼽을 수가 없을 때쯤. 어느덧 시간은 새벽 두 시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꽐라가 됐고 이를 보다 못한 승관에게 귀가조치 당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언덕을 개처럼 기어갔다. 만취한 채로 옥탑 계단을 비틀대며 올랐다. 발을 딛고 서 있는 공간마다 규모 9.8의 대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시야가 울렁거렸다. 그렇게 겨우 집으로 들어가 이불 펴고 누웠는데,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귀를 틀어막았다. 머릿속으로 양을 세려고 노력했다. 그마저도 실패해서 결국 잠들기를 포기하고 머리 맡에 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예약판매특가할인/기간수량한정판매] 애완용 씨앗인간 키우기 세트 / 3월 x일부터 순차발송. 가격 59,900원 (44%할인). ※ 네이버 스토어를 포함한 제한된 판매처에서만 구매 가능한 상품입니다.

 

  광고를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액정 속에서 섬광이 번쩍 튀는 듯했다.

 

  이거다.

 

  그날따라 극도의 우울과 괴랄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는 거꾸로 자라는 반골적 심지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반응해버렸고, 이건 말이야, 주문, 주문을 해야 돼.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고, 주문 후 개운하게 숙면했다. 그 물건이 그렇게 내 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때의 난 그냥 좀 외로웠고 무엇보다 상품명이 마음에 들었다. 애완용 씨앗인간 키우기, 그 현실감 없는 내용이 잠시나마 내 꼬인 속을 위로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던 것도 같다.

 

  하여간 기억이 다 났으니, 각설. 제정신으로 살펴보니 이런 상품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키울 수가 있냐는 거다. 몹시 비윤리적이다. 게다가 이십오 년 평생 살아오며 씨몽키 키우기 세트 같은 건 흔히 봐 왔으나 씨앗인간이라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던 것이다. 과학적으로 뭐라도 증명된 거냐고. 그러나 나라는 인간의 고질적인 문제는,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인간이 너무 긍정적이라는 것. 물건을 반품하기 위해 송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렴 어때. 가보자고. 그냥 키워보자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 나기야 하겠어. 어쩌면 그냥 다마고치 같은 개념일지도 모른다. 혹은 단순히 인간 모양의 식물일지도. 하트 모양의 잎사귀처럼 말이다. 실은 반품 과정이 귀찮은 점도 한몫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나는 상품을 감싸고 있던 포장지를 조심스레 뜯어냈다. 내용물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구성이 단촐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동그란 원형의 씨앗들을 담은 비닐 지퍼백과 배양토가 구성품의 전부였다. 포장지를 다 벗겨내자 그제서야 포장지 뒤에 부착되어 있던 설명서가 보였다. 그걸 소리 내어 읽었다.

 

  1번. 흙 넣기: 동봉된 배양토를 신생아 정도의 크기가 들어갈 정도의 통에 가득 붓고, 물 조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충분히 적셔주십시오.

  2번. 씨앗 파종: 30cm 깊이로 흙을 파고 30-40센치 간격으로 씨앗들을 넣어준 뒤 다시 흙을 살짝 덮어줍니다. 

  3번. 싹 트기: 씨앗인간의 배양온도는 20-25도이며, 배양 기간은 반나절에서 하루가 소요됩니다.

  4번. 싹 치기:  튼튼한 싹 하나만 남기고 작은 싹은 반드시 뽑아주세요. 주의) 파종한 씨앗 개수대로 배양 가능한 씨앗인간의 수량이 증가하며 싹 치기 단계를 건너뛸 시, 장애를 가진 씨앗인간들이 태어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5번. 배양 후: 이후 태어난 씨앗인간을 햇빛(20-28도)과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키우고 피부에 물을 자주 뿌려주세요. 

  6번. 사망 시: 24시간 뒤 수명이 다한 씨앗인간의 사체를 잘게 조각 내어 흙에 묻어주세요. 이것은 곧 흙 속에서 썩어 분해됩니다.

 

  6번 항목을 읽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사체를 도륙해 땅에 묻으라니. 너무 비인간적인 행위가 아닌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씨앗인간이라 하면 인간이 아니라 식물의 개념으로 봐야겠지. 어쩌면 이것은 가장 친환경적인 접근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처리 방법일지도 모른다. 분해와 저장과 순환의 고리. 거대한 대자연의 사이클 말이다. 

 

  약간 엄숙해진 태도로 화장실의 빨간색 고무대야를 꺼내들었다. 이 정도 크기라면 씨앗인간을 배양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배양토를 가득 들이붓고 욕조 위에 올려둔 다음 그 위에 샤워기를 들어올렸다. 쏴아아. 샤워기 헤드에서 찬물이 쏟아졌고 흙은 촉촉하게 적셔졌다. 나는 서둘러 고무장갑을 착용했고 흙무덤을 냅다 파헤쳤다. 깊은 구덩이를 팠고, 한 움큼의 씨앗을 뿌렸고, 고무장갑 낀 손으로 흙을 평평하게 두들겼다. 비록 충동적으로 구매한 상품이었으나 나는 이 원예를 가장한 광기 어린 생산 활동이 점점 괜찮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단 잡생각이 사라졌으므로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할 일을 마쳤다는 보람을 느끼기도 전, 삐삐삐.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휴대폰을 켰다. 승관이었다. 

 

  [야 김민규. 해장하게 사거리 콩나물국밥집으로 나와.] 

 

  기분이 좋아진 나는 칼답하며 집을 나섰다. 해장하기 위해 도착한 콩나물국밥집에서 반주를 한답시고 진탕 술을 먹었다. 나는 일주일 전처럼 또다시 꽐라가 되었고, 이를 보다 못한 승관에게 귀가조치 당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언덕을 개처럼 기어갔다. 만취한 채로 옥탑 계단을 비틀대며 올랐다. 발을 딛고 서 있는 공간마다 규모 9.8의 대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시야가 울렁거렸다. 그렇게 겨우 집 안으로 입성했다. 앞으로 닥칠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고 허파에 바람 빠진 사람마냥 피실대면서 말이다.

 

  한 칸짜리 방은 검게 물든 달빛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방이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창문을 열고 외출한 탓인지 방 안에는 온기 한 점 없었다. 별안간 온몸에 한기가 돌고 심장이 덜컹거렸다.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 있었고 타고나길 겁이 많은 편인지라 그저 빨리 잠에 들고 싶었던 나는 태연한 척 이불을 폈다. 그리고 그 위로 벌렁 엎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이에에에에엥! 이에에에에엥!

 

  정적을 할퀴어 찢어내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집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나는 본능적으로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 주변에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택배상자를 뜯던 커터 칼, 다른 손에는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주방용 가위를 든 채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근원지는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에 가까워질수록 데시벨이 커졌다. 들숨을 참고 천천히 귀를 기울였다. 

 

  아니, 아니다.

  이것은 사이렌 소리가 아니었다.

 

  꼭 고양이 울음 소리 같기도 하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어떤 음성이.

 

  사색이 된 얼굴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맨발로 허둥지둥했다. 소리는 욕조에 가까워질수록 더 크게 들렸다. 기척을 죽이고 아주 천천히, 슬금슬금 다가갔다. ......뭐, 뭐야 씨발. 거기 누구, 나는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 끝말을 흐렸다. 정확히는 할말을 잃은 것이었다. 숨이 멈추는 듯했다. 나는 모든 행동을 정지한 채 겨우 눈알만 굴려댔다. 그렇게 천천히 욕조 안을 들여다보았고, 서 있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 상황이 전혀 믿기지 않아서 애꿎은 눈꺼풀만 비벼댈 뿐이었다.

 

  "이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놀랍게도 욕조 안에는 갓난아이가 들어있었다. 

  정확히는 갓난아이의 모습을 한 씨앗인간이.......

 

 

 

 

 

 

 

 

  오전 00:00

  한밤중 화장실에서 숭고한 생명의 탄생을 목도했다. 

 

  욕조에 넣어두었던 빨간색 고무대야 안에 가득히 퍼 담아두었던 흙 위엔 커다란 덩굴이 우뚝 솟아있었다. 덩굴 뿌리 사이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여성의 자궁을 연상케 했다. 거기서 씨앗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벌거벗은 갓난아이의 모습을 한 채. 잘 쳐줘야 에이포 용지만 한 크기로.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졸도하고 깨어난 사람처럼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두엽 속 뉴런 세포에 마비가 온 듯 굳어있었다. 갈 곳 잃은 시선이 갈피를 못 잡았다. 하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상황.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 레프트 훅에 라이트 훅, 마지막 어퍼컷까지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정신, 정신 차려. 야, 정신 차리라고. 김민규. 나는 침착하려 애를 쓰면서 정신 차리라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자기 세뇌가 효과가 있었던 걸까. 겨우 정신을 붙잡고 뭘 어째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갓난아이를 이 상태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이성적 판단을 했다. 일단 아이를 안전한 공간으로 옮기자. 흙 위에 파묻힌 씨앗인간을 조심스레 들어올리는데, 씨앗인간의 배꼽(으로 추정되는 부분)과 덩굴이 질긴 줄기로 연결되어 있었다. 생긴 게 꼭 탯줄 같았다. 허둥지둥 손에 들려있던 주방용 가위로 그것을 잘라냈다. 잘라낸 줄기의 단면에서는 우윳빛의 끈끈한 액이 흘러나왔다. 샤워기를 들고 아이의 몸에 뿌리면서 흙과 모래와 끈끈한 액체를 씻겨냈다. 샤워기를 틀었을 때 깨달았다. 온수 보일러를 틀지 않았다는 것을.

 

  장장 한 시간을 넘게 씻겼다. 물에 젖은 아이를 안아들곤 작은 몸을 뉘일 만한 마땅한 위치를 물색했다. 태어나자마자 살갗이 푸르게 질릴 정도로 찬물에 씻어냈으니 체온이 많이 내려갔을 터였다. 이걸 맨바닥에 두자니 묘한 죄의식이 들었고 이부자리에 두자니 좀 찝찝했다. 결국 화장실 수납장에서 수건 여러 장을 꺼낸 뒤 넓직이 펼쳐두고 그 위에 아이를 눕히기로 스스로 합의를 봤다. 수건으로 꽁꽁 싸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아이는 진정이 되었는지 울음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고 이내 미약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잠이 들은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잠이 든 씨앗인간을 들여다보았다. 신생아임에도 금세 아이의 머리카락이 자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두개골 위 피부에 솜털이 부숭했다. 순간 포장지 위의 문구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24시간 안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관찰 가능합니다. 이 말대로라면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자란 것이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아이는 순식간에 자라날 것이 분명했다. 수명이 하루뿐이니까.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거짓말처럼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졸음이 쏟아졌다. 이 상황에 어떻게 잠을 청할 수 있겠냐 만은, 나라는 인간이 원래 그랬다. 말하지 않았는가. 나의 최대 단점은 너무나도 긍정적인 성격이라고. 일단은 잠을 청해야 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몸을 무겁게 짓눌러오는 술기운도, 이 말도 안 되는 악몽도 전부 깰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아이 곁에서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오전 08:00 

  시끄럽게 울어대는 알람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참으로 기괴한 꿈이었다. 술김에 주문해서 집으로 배달 받은 씨앗인간을 심었더니 그게 한밤중에 아이가 되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의 꿈. 나는 실소했다. 생각할수록 어이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모든 게 꿈일 뿐이다. 이제 눈을 뜨면 난 다시 현실에 복귀해 있을 것이다. 미소 지은 채로 몸을 뒤척였다. 간밤의 악몽으로 피곤했던 터라 조금만 더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불을 끌어 당기려는데, 어라, 맨바닥 위에서 기상한 것이었다. 뭔가 이상한 탓에 천장을 두리번대는데, 안녕. 공중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두 개의 눈알.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추정되는 얼굴. 웃음기 없이 무표정한 표정. 그리고...... 수건을 걸친, 

 

  벌거벗은 몸?

 

  "으아아아악!"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켁, 켁켁, 흡, 누, 켁, 누, 케켁, 누, 누, 누구세요? 나름대로 쿨한 척 침착하게 질문 하려 하였으나 장렬히 실패.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사레가 들렸는지 재채기가 계속 나왔다. 손으로 입을 막아도 한번 시작한 재채기는 영원처럼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그런 날 빤히 응시했다. 까맣고 고요한 눈동자로. 아무 말 없이. 그렇게 그 애는 내 재채기가 멎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아이답지 않게 차분한 태도는 오히려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것이었다. 이게 바로 인생 2회차라는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안녕, 주인."

 

  이건 또 뭔 개소리람.

 

  "나는 씨앗인간이고 여덟 시간 동안 주인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어."

 

  그러면서 목덜미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벗어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아이가 알몸 상태인 건 둘째치고 가까이서 수건을 본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어라 이거. 그러고 보니 이 수건은 오늘 새벽 내가 씨앗인간을 위해 펼쳐준 것이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이건 꿈이 아니었다는 거군. 그래. 그렇구나....... 근데 이게 왜 진짜인? 입을 떡 벌렸다. 그런 나를 보며 아이는 정중한 투로 쐐기를 박았다.

 

  "그럼 하루 동안 잘 부탁해."

 

  차라리 졸도하고 싶었다. 이럴 바엔 쪽팔려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오전 09:00

  애를 알몸인 채로 계속 놔둘 수가 없어 반팔 티와 팬티 한 장씩을 서랍에서 꺼내 건네줬다. 아이는 순순히 그것을 입었다. 내 키는 185를 손쉽게 넘겼으므로 옷은 아이에게 턱없이 컸다. 그래도 벌거벗고 있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애는 금방 자랄 테니까. 실제로 아이는 한 시간 동안 키가 두 뼘이 더 자랐다. 벌써 중학생처럼 보였다. 

 

  아이와 마주 보고 앉았다. 겨우 통성명을 했다. 통성명이라 해 봤자 그 애는 몇 시간 전까지 갓 태어난 신생아였기에 일방적인 소개였지만. 일단 한숨 푹 내쉬고 얼굴을 감싸쥐며 그 애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안녕...... 나는 김민규고 스물다섯 살이고, 또 뭐냐....... 암튼 그게 다야." 

 

  그러니까 그 주인이란 호칭 말고 그냥 민규라고 불러줘. 그 애는 짧고 영양가 없는 말에도 다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할 지 감이 안 잡혔다.

 

  "근데 있잖아."

  "민규. 편하게 물어 봐."

  "내가 이런 경험이 그런데, 아니 그러니까, 너는 그럼 뭐라고 불러줘야 돼?"

  "그냥 씨앗인간이라 불러줘. 그리고 나도 태어나본 건 처음이야."

  "그건 나도 알거든? 아니 근데, 씨앗인간은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내가 부르기엔 좀 그렇다는 거지. 내 이름이 김민규인 것처럼 너도 이름이란 게 있을 거 아냐. 아냐?"

 

  내 이름? 그 애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 이름이 없는 건가. 하긴 몇 시간 전까지 씨앗 상태였는데 왜 이름이 없냐고 물어보는 것은 억지였다. 흠흠. 민망해진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혹시 불리고 싶은 이름이 있어?"

  "미안하지만 그런 식의 개념은 너무 포괄적이라 어려워. 세상엔 수많은 언어가 있고 그 중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지. 그럼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된 아무 단어나 선택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너처럼 아무 뜻 없는 글자 세 개를 조합해서 언어로 전달해주면 되는 걸까."

 

  얘 뭐라니. 애가 좀...... 특별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좋게 말하면 특별한 구석이고 나쁘게 말하면 미지의 외계인 같았다. 무엇보다 말이 짧았다. 유교 국가에서 배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습은 일절 모른다는 태도. 존댓말을 모른다기엔 그럼 표준국어대사전라는 건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 그냥 내가 지어줄게. 다급히 대꾸하자 그 애는 무심한 얼굴로 어디 한번 내놔보라는 듯 팔짱을 척하고 꼈다. 별 생각 없었는데 저 시니컬한 얼굴을 보니까 반드시 대단한 이름을 지어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불쑥 들었다. 쟤 왜 나 눈치 줘. 속으로만 툴툴거리며 머릿속으로 이름을 쥐어짜냈다.

 

  "어...... 그러니까, 음, 그래, 그렇지, 너 나 일어날 때까지 여덟 시간 기다렸다며. 그럼 그냥 간단하게 팔?"

  "팔?"

 

  애의 표정이 영 구렸다. 팔은 별로인가 보네. 하긴 어떻게 사람 이름이 팔...... 그럼 용팔이?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웃음이 터졌다. 농담이랍시고 말한 건데 못 알아들었는지 자못 심각한 얼굴이었다. 

 

  "아, 그래. 에잇은 어때? 영어로 팔이 에잇이거든. 너 태어났을 때 에에엥 소리 내면서 울기도 했고 뭔가 그냥 팔보단 좀 더 간지나지 않나 해서."

  "에잇......."

  "왜? 이것도 별로야?"

 

  애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순간 쫄았다. 이게 아닌가. 눈치 보며 그래내가생각해도이건아니지구리다구려이름바꾸자. 라고 말할 타이밍을 찾던 찰나.

 

  "아니.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그래?"

  "민규. 고마워. 진짜 고마워."

 

  고맙다고 말하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았다. 연거푸 수그려지는 동그란 머리통을 쳐다봤다. 고개를 든 아이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했다. 기분이 묘했다. 이게 그렇게 감사할 일인가? 고작 작명 하나 해준 게? 당황스러웠지만 애가 좋아하니 됐네 싶었다. 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옆에서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민규. 나 신나. 태어나길 잘 한 거 같아. 민규 나한테 잘해줘야 돼. 나 하루밖에 못 살아도 하고 싶은 거 엄청 많거든? 그거 오늘 나랑 다 해줘야 돼. 알았지?

 

  그래. 어차피 하루밖에 못 산다는데 내가 책임지고 쟤 하고 싶은 거 다 시켜준다. 그렇게 결심하면서 에잇의 얼굴을 쳐다봤다. 잔뜩 신이 난 얼굴을 한참 바라보는데 어쩐지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가 정말 봄에 태어나긴 한 모양이라고. 그래서 저렇게 눈 녹듯이 웃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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