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AboutLove 썸네일_md.jpg
paper-tear-effect-png-1.png

About Love

​W. md

  종강 후 한가해진 민규는 매일 조카를 유치원에서 하원 시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기상 시간은 자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이지만 일어나보면 집에는 아무도 없이 늘 텅 비어있다. 요리 솜씨도 나쁘지 않아 일어나면 그럴듯하게 혼자서 밥을 차려 먹고서는 능숙하게 청소기를 한번 돌리고, 빨래를 개며 나름의 가사노동도 착실히 수행한다. 아침을 먹고 집안일도 얼추 해치우고 나면, 다시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거나 핸드폰을 본다. 그러다 1시가 되면 대강 외출용 추리닝을 입고서 집을 나선다. 언제부턴가 매 하원시간마다 자신을 데리러 오는 삼촌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저 멀리서 민규가 미적미적 걸어오는 것만 봐도 삼촌!! 하며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던지고 달려가는 조카였다. 이름은 박서은. 민규와는 다른 성씨를 가졌지만 조금이라도 섞인 피는 못 속이는 것인지 굉장히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서은이 삼촌이시구나~

  네..ㅎㅎ 안녕하세요

 

  삼촌!!!

 

  선생님의 도움 없이 혼자서 겉옷을 입고 가방까지 멘 서은이는 매번 이렇게 씩씩하게 달려와 삼촌 품에 안긴다. 가방 이리 줘. 응. 민규는 한 손으로 유치원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서은이의 손을 잡는다. 이런 민규는 꽤나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유치원에선 늘 이슈였다. 조카 데리러 오는 삼촌이라니 다정하잖아. 그냥 시간 많은 대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하나로 민규는 다정한 삼촌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민규와 서은이의 하원 길에는 딴 길로 새는 일도 잦았다. 이거 사준 거 너네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야 돼. 응 알겠어. 새끼 손가락을 손에 걸고 난 후 간식 하나씩을 입에 물고 집에 도착하면 두 시간 정도는 서은이와 함께 있어야 했다. 그 이후에는 서은이가 학원을 다니는 터라 민규에게는 자유였다. 처음에는 무슨 애기가 벌써부터 학원을 다녀...; 라고 생각한 민규였으나 학원에서 늘 놀기만 하는지 학원 가는 시간만을 목 빠져라 기다리는 서은이 때문에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딱히 하루 종일 돌봐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너무 귀여우니까 민규는 금방 이 생활에 익숙해졌다. 삼촌 나 머리 묶어줘. 알았어. 끈 가지고 일루 와바.

 

  민규가 느끼기에 요즘 서은이가 하원 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선생님께서 알려주셨다.) 반에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다고 한다. 그날 민규는 그 남자애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서은아 삼촌 오셨어~하는 소리에 그제서야 삼촌을 보러 나오는 서은이는 그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광경에 웃음을 참던 민규는 그만 웃음을 터뜨려 버렸고 웃다가 본 옆에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또래의 젊은 남자가 서있었다.

 

  해준아~

 

  남자가 이름을 부르자 서은이의 손을 잡고 있던 남자애가 달려왔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 마른 몸, 눈에 띄는 옷 스타일. 영락없는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이때까지 서은이를 하원 시키며 봐 온 몇몇의 아빠들과는 너무 달랐다. 민규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 남자가 민규를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헉 네 안녕하세요. 삼촌 분이신가 봐요.

 

 

  어떻게 알았지? 처음 본 그 남자가 아이의 아빠일거라 생각한 민규와는 달리 그 남자는 민규를 보자마자 삼촌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민규가 아빠가 아니라는 것은 눈치가 빠르고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제서야 민규는 제 옆의 이 남자가 아이의 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 학원 선생님인가. 민규가 혼자 짐작할 동안 남자는 유치원 교사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선 아이를 학원 차량에 태워 사라졌다. 그날 서은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던 민규는 자신의 옆에서 웃고 있던 그 남자가 생각났다. 인생이 단조롭다 보니 이제 별 게 다 흥미롭구나. 하며 민규는 넘겼다.

 

 

  *

 

 

  유치원에서 그 남자를 마주치기를 몇 번, 민규는 오랜만에 친구인 석민을 만나기 위해 저녁 약속을 잡았다. 유난히 소란스럽게 느껴지는 술집에서 오랜만에 만나 시답잖은 고민이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석민은 민규가 매일 유치원에서 조카를 하원 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 야 너 나름 쓸모 있다? 석민이 서비스로 나온 과자를 한 개 집어 먹으며 의미 없이 뱉은 말에 민규는 야 나 원래 쓸모 많거든?? 하며 화를 냈다. 알겠어 알겠어. 석민은 웃으면서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나이대의 남자 둘이 모이면 빠질 수 없는 대화 주제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연애 사업이다. 잠시 휴대폰을 보다가 내려놓은 석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야 승철이 형 인스타 봤냐? 아니. 왜? 지금 연애 한다고 난리잖아 그 형. 최승철 연애해?? 몰랐냐? 너 방에만 틀어박혀서 뭐 하는 거야 요즘. 헐….. 적잖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민규가 밥 맛이 다 떨어졌다는 듯 젓가락을 놓았다. 그 형이 옛날에는 어쨌고 등등의 취중 추억 팔이를 하는 석민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던 민규는 불현듯 유치원에서 본 그 남자 생각이 났다. 왜?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엔 이미 혈중에는 알코올의 농도가 짙어진 후였다. 생각해 보니.. 묘하게 내 취향인 것 같기도 하고……

 

 

  그 날의 저녁 약속 이후, 민규는 괜히 그 남자를 의식하게 됐다. 성인 남자 두 명이 들어서기엔 좁은 유치원 현관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먼저 고개를 돌려 멋쩍게 인사를 하는 일도 있었다.

 

  안 나오네……

 

  남자를 의식함과 동시에 민규는 둘만 유치원 현관에 남겨지는 시간이 어색해졌다. 평소 친화력 갑이라는 소리는 듣지만, 어쩌다가 자신의 취향이라 생각해버린 사람 옆에서는 다 부질 없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을 무렵, 그런 민규를 눈치챘는지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기, 대학생이에요?

  네.

  아 그럼 종강해서 이렇게 데리러 오시는구나. 저는 학원 선생님이에요.

  애기들 학원가면 뭐 배워요?

 

 

  민규의 질문에 남자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음.. 저는 중국어 가르쳐주고 있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다중언어를 사용하면 뇌가 발달한다고 해서 보통 배우는 것 같던데,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에요.  

 

  삼촌!!!!

 

  서은이는 오늘따라 늦게 선생님의 손을 잡고 달려 나왔다. 서은이의 한쪽 손을 잡은 민규가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유치원을 나왔다. 삼촌 아까 그 사람 누구야? 음…… 네 남자친구 학원 선생님.

 

 

 

  *

 

  요즘 쓰레기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거야. 민규는 아무도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야무지게 묶은 쓰레기들을 양손에 들고 아파트 분리수거 장으로 내려갔다. 오늘따라 더 귀찮은 분리수거였지만, 이 여름에 쓰레기를 밖에 오래 방치하는 것은 민규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분리수거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민규의 시야에 유치원에서 보던 그 남자로 추정되는 뒷모습이 보였다. 방금 까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돌린 쪽에는 민규가 있었고, 곧이어 눈이 마주쳤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민규였다. 어? 안녕하세요. 남자도 집에 있다가 잠깐 나온 것인지 평소 유치원에서의 모습과 달리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기 사세요? 놀랐다는 듯 남자가 물었다. 네. 혹시 그쪽도…? 당황스러운 건지 반가운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신기함과 선선한 여름 밤 공기가 만나 둘은 어색함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제서야 민규는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서명호. 나이는 동갑.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부모님께서 중국인이셔서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잘함. 현재 종강 후 중국어 학원에서 유아 중국어 보조 강사 및 잡무를 맡고 있고 애기들이 귀여워서 매우 만족함.(?)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천천히 말해주는 명호를 보며 민규는 명호가 차분한 성격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 주위엔 다 기차 화통 삶아 먹은 애들뿐인데.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했다. 알고 보니 명호는 민규의 옆 동에서 혼자 살고 있었고, 혼자 사는 게 조금 외로웠던 명호는 새로 생긴 동네 친구에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도 잃고 신난 티를 냈다.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까지 주고 받은 후 단지 내를 돌아다니며 한참을 떠들다 온 몸이 모기의 출장 뷔페가 된 민규 때문에 둘은 늦은 밤의 짧은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명호가 받은 민규의 연락처로 카카오톡 친구 추가를 했다. 잘 자. 정도의 짧은 인사말을 주고받은 것이 둘의 첫 대화였다.

 

  어제 제대로 치지 못한 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온 아침의 햇살이 민규를 평소보다 일찍 깨웠다. 민규는 일어나 늘 그랬듯이 밤 사이에 온 알림들을 확인하기 위해 대충 눈을 비비고 휴대폰 화면을 켰다. 잠금을 풀자마자 보이는 화면에는 어제의 저와 명호의 대화가 떠있었다. 어젯밤의 일들이 전부 떠오른 민규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평소보다 빨리 하루를 시작했다.

 

  삼촌 이거 봐.

 

  평소와 다름없이 하원 후 민규와 집에서 평화롭게 놀던 서은이는 유치원에서 가져온 색종이로 종이 배를 접어 민규에게 내밀었다.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신경이 휴대폰으로 가있던 민규는 서은이가 만족스러울 만한 반응을 보여주는 데에 실패했고, 삼촌 아파? 같은 말이나 들어 어린 조카를 걱정시켰다. 스스로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했지만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건 민규에게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연애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먼저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없었고 늘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게 다였다. 말하자면, 연애에서 ‘을’이 되어본 적이 없는 김민규에게 지금 이 상황은 명백하게 자신이 을임을 가리키고 있다. 오늘 하루를 명호의 연락을 기다리며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참을 기다리더니 결국 명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담당 선생님이 교무실에 가있는 동안 주어진 짧은 휴식 시간에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한 명호는 새로 사귄 제 동네 친구인 민규에게 카톡을 보내기로 했다. 친구를 하자고 했으면 누구든지 먼저 연락을 해야 될 것 아냐. 잘 자라는 말이 마지막 대화인 민규와의 카톡창을 켜 뭐해? 라는 두 글자를 보냈다. 결국은 명호가 먼저 손을 내민 꼴이 되었다.

 

  헉.

 

  거실에 누워 서은이의 병원 환자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던 민규가 알림 소리에 곧바로 일어나 휴대폰을 켰다. 알림 센터의 맨 위에는 명호에게서 온 메시지가 떠있었다. 그 자리에서 약 일 분을 고민하다 서은이와 놀고 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 후 몇 분이나 쭈그려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 삼촌이 못마땅했던 서은이는 아 삼촌 다시 누워- 라는 말과 함께 민규의 옷을 잡아 당겼다. 서은이가 당기는 대로 스르륵 다시 바닥에 누웠으나 두 손의 휴대폰은 놓지 않았다. 민규가 다시 눕자 서은이는 병원 놀이를 재개했다. 작은 청진기를 목에 건 서은이가 민규의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 댔다. 손님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선생님 저 심장이 아픈 것 같아요.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휴대폰으로만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그건 친해질 생각이 없다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둘 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딱히 휴대폰으로 할 말이 없기도 했기 때문에 사소한 이유라도 만들어내 둘은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하루는 민규가 항상 만들던 야식을 딱 오늘 양 조절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늦은 밤에 명호를 불러내기도 했고, 어떤 날은 명호가 집에 와인이 있는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며 모두가 잘 밤에 민규를 제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둘 다 낯을 가리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모든 사람과의 인연을 제 옆에 잡아두는 타입이라 쌍방의 부단한 노력 하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인간관계에 크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김민규야 요즘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이지만 서명호는 아니었기에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약속을 잡는다면 대부분 명호의 스케줄에 맞추어야 했다. 거의 매일 저녁에 보는 사이가 되어도 익숙한 생활 반경 밖에서 만나는 일은 또 새로웠다. 둘은 취향도 관심사도 너무 닮아있던 터라 주말엔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기도 하며 사람들이 흔히 몰리는 이곳 저곳에 얼굴을 비추었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점은, 둘 다 로맨스 영화 마니아라는 것이었다.

 

 

  야 뭐해애애 ㅐㅐ애 01:35

  나 지금 바빠

  왜? 01:50

  아냐

  오늘 언제 올건데? 01:52

  당연히 시간 맞춰서 가지

조금만 기다려 ㅋㅋ 02:01

 

 

  몇 번을 명호 혼자 사는 집에 방문하고 나서 민규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서명호의 냉장고에는 정말 별 게 없다. 둘이 명호의 집에서 밤늦게 영화를 보던 날, 냉장고에 있는 치즈를 꺼내달라는 명호의 말에 냉장고 문을 연 민규는 자신의 집과 달리 휑한 내부에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사실 일반적인 자취생의 냉장고라 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늘 자신의 냉장고만 봐오던 민규에게는 너무 썰렁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는 명호가 퇴근 하는 시간에 맞춰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일 같이 저녁 식사도 함께 했다. 매번 얻어 먹는 것이 미안하다며 명호는 늘 퇴근길에 그날에 필요한 재료를 사왔고, 민규는 명호가 사온 재료들로 그날의 저녁을 만들었다. 그것이 둘의 일상이 되었고 덕분에 명호 집의 주방 사정은 민규가 더 잘 알게 되었다.

 

  퇴근 후 집에서 밤늦게까지 티비를 보던 명호는 평소에 건강을 챙기기 위해 잘 먹지도 않던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짧은 고민 후 소파에서 일어나 냄비를 찾기 위해 주방을 뒤졌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살짝 짜증이 난 명호가 참다 못해 민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규.

  왜??

  너 냄비 어디다 뒀어?

  왜? 뭐하게?

  어디 있어?

  냉장고 오른쪽부터 두 번째 칸에 있는데?

  알겠어 민규 잘 자.

  야??? 뭐 할건데?

  라면 끓일 거야.

  나도 가면 안돼?

  시간 늦었는데 올 수 있어?

  언제부터 일찍 만났다고?

  알겠어 와. 너가 끓여줘

 

 

  민규는 전화가 끝나기 무섭게 입고 있던 목이 잔뜩 늘어난 흰색 티셔츠 위에 회색 후드티를 입고 주방 서랍에 있던 햇반을 꺼내어 명호의 집으로 출발했다. 그 동안 명호는 가만히 식탁에 앉아 민규를 기다렸다. 전화가 끊기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문 앞에는 잔뜩 신난 표정의 민규와 손에 들린 햇반 두 개가 명호를 찾아왔다. 라면에 밥까지 먹으려던 건 아닌데. 명호는 가뜩이나 늦은 시간에, 그것도 라면을 먹게 되어 민규가 도착할 동안 죄책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항상 예상하지 못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모든 예외를 따지고 든다면 식탁 위에 올려진 봉지라면부터 잔뜩 신난 얼굴을 한 제 앞의 민규까지 넘치게 예외인 상황이었다. 명호는 민규만이 불러오는 기분 좋은 소음이 좋았다.

 

  이전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유치원 현관에서의 시간도 남들보다 바쁘게 지내는 명호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둘 사이를 심상치 않게 여긴 사람은 서은이었다. 삼촌 내 남자친구 선생님이랑 친해? 응. 친한데…… 걔가 언제부터 남자친구가 된 건데??

 

  민규는 지금의 관계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흔한 제 또래들처럼 연애를 갈구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만난 지 이주밖에 안된 자신에게 점점 의지하는 동갑내기 친구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도 있었기 때문에. 민규는 이 관계를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했다. 괜히 머쓱해지는 일이 자주 있지만, 생각에 잠기는 시간도 늘어났지만.

 

 

  *

 

 

  민규야 나 오늘 저녁 안 먹어. 혼자 먹어. 05:56

  왜?? 05:59

  속이 좀 안 좋아서 06:03

 

 

  속이 안 좋다고? 명호의 말에 민규는 어제 먹은 주꾸미볶음이 생각났다. 만들고 나니 예상했던 것보다 매워 둘 다 먹고 난 후의 입술이 빨개져 있었다. 그 주꾸미볶음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으나, 자신이 조금의 원인이라도 제공한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명호 언제 퇴근하더라. 민규는 명호와의 대화창을 뒤졌다.

 

 

  야!

  뭐야?

 

 

  학원에서 나온 명호는 건물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민규를 보고 놀란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분명 아무 말 없었는데. 명호는 기다릴 사람도 없겠다 밀린 잡무를 해치우고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나온 터라 민규가 꽤 많은 시간을 기다렸을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이때까지 명호의 퇴근을 알리던 문자들은 전부 실제로 학원에서 나오는 시간보다 몇 분씩 일찍 보냈기 때문에 그 문자들로만 퇴근 시간을 유추한 민규는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에 새로운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처리될 동안 명호는 민규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민규의 손에 들린 봉투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안엔 누가 봐도 자신의 것인 약과 물병이 있었다. 민규는 어젯밤 함께 먹은 주꾸미를 탓하며 명호에게 물병을 건넸다. 약은 담겨있던 봉투를 보니 누가 봐도 방금 산 것이었는데 함께 봉투에 들어있던 물병은 민규가 제 집에서부터 싸온 것이 분명했다. 굳이 보온병이 아니더라도 따뜻한 물이 식을 만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민규는 왠지 꼭 물을 보온병에 담아가고 싶었다.

 

  명호는 민규가 제게 이럴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필요 이상으로 넘쳐흐르는 배려와 다정이 명호로 하여금 그런 민규에게 길들여지게 만들었다. 명호는 종종 민규가 머물다 떠난 제 집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이 집이 어땠더라.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명호는 이런 말을 안다. 조금 유치하다 생각할지라도 명호는 가끔 민규가 타인에게 베푸는 모든 애정들의 한계선이 궁금했다. 쉽게 말하자면 주변의 모두에게 이와 같이 행동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민규에게 있어 조금이라도 특별한 사람이 된 것인지. 그냥 그런 의문이 들곤 했다. 그리고 명호는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민규는 항상 명호의 모든 예상과 기대를 능가했고 희미해서 알아챌 수 없는 명호의 타인과의 경계선을 유일하게 허물고 들어왔다. 명호는 왜 늘 성가시기만 했던 변수들이 유독 반가웠는지, 썰렁하기만 했던 집이 꽉 차 보이는 건 왜 때문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침부터 말을 듣지 않는 몸에 하루 종일 잔뜩 예민해져 있었지만 민규의 등장으로 그 모든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명호 자신도 모르게 민규는 이제 명호에게 돌아갈 수 있는 집이 되었다.

 

 

 

  *

 

 

  명호야 일어나.

  …

  어휴 그래 자라 자. 내가 치울게.

 

 

  와인을 마시다가 취해버린 명호의 정신을 돌아오게 하려다 실패한 민규가 혼잣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쟤 와인 마시면서는 한번도 취한 적이 없는데. 민규는 와인을 마시던 상을 정리하면서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골목에 무계획으로 들어간 포장마차에서 아무 생각 없이 민규가 따라주는 대로 쭉쭉 잔을 비우던 명호가 민규를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취해버렸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 거의 민규에게 업히다시피 귀가한 명호에게 다음날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그 이유를 답해주지 않았다. 불규칙적으로 거하게 취해줘야 하는 날이라도 있는 건가. 민규는 생각했다. 아까부터 마시는 속도가 심상치 않더니 결국 혼자서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오늘이 그 날이겠거니 하며 민규는 그냥 그런 명호를 구경했다. 술에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이 마치 술을 취하기 위해 마시는 사람마냥 들이 마시는 걸 구경하는 것도 나름 구경거리였다.

 

  그땐 이렇게 될지는 몰랐다. 생각보다 처치 곤란인 상황에 민규는 말리지 못한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한 대 쥐어박았다. 본격적으로 뒷정리를 하기 위해 거실의 불을 키려다가 등 뒤의 소파에 기대어 기절한 듯 잠을 자고 있는 명호를 보고 말았다. 양초를 끄고, 흘러나오던 잔잔한 재즈 풍의 음악도 꺼버렸다. 희미한 조명만이 거실을 비추고 있었고 노래를 끄자 적막이 흘렀다. 되게 조용하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다. 재빠르게 핀 상을 물 티슈로 한 번 닦고 야무지게 접어 제자리에 두었다. 모든 뒷정리가 끝나고 민규는 소파에 기대어 불편한 자세로 잠에 든 명호를 어떻게 해결하기 위해 명호에게 다가갔다.

 

  너 때문에 내가 다 치웠잖아. 야 안 일어날 거야? 너 좀 집에 가.

          

  민규는 명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명호를 툭툭 건드렸다. 처음에는 미동도 않다가 점점 자신을 깨우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니 잠에서 깨어나는 듯 해 보였다. 민규의 노력 끝에 명호는 드디어 기척을 냈다. 으…..

 

 

  깼냐? 이제 너 집에 가.

  응….

  근데 갈수는 있겠어? 아님 그냥 자고 가던가.

  민규야..

  왜.

  여자친구 사귀지 말고 나랑 살아.

 

 

  뭐??

  그리고 이사 가면 안 돼…. 알겠지.. 내가 너 좋아하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명호는 멱살에 가깝게 쥐고 있던 민규의 옷자락을 놓고 다시 잠에 들었다. 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얼굴이 빨개진 사람은 명호 하나였는데 이제는 민규까지 둘이 되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귀여운 고백에 민규는 불편해 걷어 올린 소매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그 앞에서 앉아있었다. 당장 일어나서 정확히 무슨 말인지 다시 말해달라고 명호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으나 더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만약 민규가 그럴 힘이 남아있었다면 거실 바닥에서 한참을 멍청한 폼으로 주저 앉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호는 민규가 예측불가라고 말했지만, 민규에게는 명호가 그랬다. 민규는 남아있는 정신으로 자신의 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꺼내와 명호를 편히 뉘이고 자신은 소파에 누워 한참을 생각했다. 사실 현 상황으로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만 있다면 아침에 일어난 명호에게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만약 자신이 내일 명호에게 너 어제 술 취해서 나한테 고백했어 따위의 말을 한다면 명호는 실수였다고 말하거나 못 들은 척 해달라고 할 것 같았다. 없던 말로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민규는 적당한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 와중에도 말끔히 씻고 소파에 앉은 민규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잠이 든 명호를 바라보면서 해가 뜰 때까지 적당한 방법을 궁리했다. 해가 뜰 무렵 나온 결과는 바로 자신이 다시 고백하는 것이었다. 먼저 고백한 사람은 나 인걸로. 명호가 술에 취해 자신이 먼저 고백한 사실을 알게 되면 민망해 할 테니까. 둘이서 로맨스 영화를 하도 많이 봤더니 이젠 자신과 명호가 무수히 봤던 그 영화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근데 거기에 약간의 코미디를 곁들인.

 

 

 

 

*

 

 

  명호의 동네 친구였던 정한은 잠깐 볼 일이 있어 근처에 온 김에 명호와의 약속을 잡았다. 둘은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명호야 잘 지냈니. 얼굴을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 좋다. 정한은 명호와 꽤 자주 연락을 주고 받았음에도 한 몇 달은 못 본 것처럼 말을 걸었다. 사실 네 인스타 자주 봤어. 좋은 곳 많이 가더라. 응 알아. 형이 맨날 보니까. 아 그게 떠? 몰랐네. 각자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 명호의 근황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민규가 언급됐다. 맞다. 응? 명호야 너 요즘 누가 그렇게 밥을 차려주는 거야? 하마터면 차를 마시기 위해 잡으려던 컵을 놓칠 뻔 했다. 아…... 뭐가? 뭐야? 왜 모르는 척이야? 네 인스타 스토리에 올라오는 매번 똑같은 식탁 위에 숟가락 두 개. 그거 나머지 하나 누구 건데? 너무 부럽더라 형은 맨날 혼자 맛없는 거 먹는데…… 갑자기 나온 민규 얘기에 당황한 건 당황한 거지만 명호는 조금 어이가 없어질 뻔했다. 구 동네친구로서 정한을 관찰한 결과, 정한의 입에 들어가는 건 늘 맛있는 음식뿐이었다. 난 맛없는 건 안 먹어. 과거에 정한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근데 인스타에 올린 거 진짜 얼마 없는데…… 꽤나 상대적인 기준으로 생각해버린 명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형 근데 나 얼마 못 있어. 어디 가야 돼.

  어디 가는데?

  밥 먹으러.

  명호야. 너 어제 뭐 먹었어?

  갈비탕

  지금 뭐 먹으러 가는데?

  피자.

  내일은?

  내일? ….. 닭갈비 먹으러 가자는데.

  너 뭐 잘못한 거 없어? 걔 뭐 하는 애야? 너 살찌워서…..

  뭐래 나 간다.

  아니 명호야 앉아봐. 누구 만나러 가는데?

  형이 말하는 걔 만나러.

  …..

  응 안녕.

 

 

  어? 명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차에 정한과 명호가 앉아있던 카페의 문을 열고 민규가 들어왔다. 어떻게 알고 왔어? 너가 여기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 근데 약속 시간까지 좀 남았는데? 그냥 왔어. 명호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민규와 대화를 나눌 동안 자리에 앉아 음료를 마시던 정한은 민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쟤 맞네. 울 명호 밥 주는 애.

 

  명호야 혹시?

  어 맞아.

   

  뭐가 맞다는 거야. 민규는 자신을 가리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정한을 쳐다봤다. 자신을 쳐다보는 정한은 민규가 보기에 무표정이었고 왠지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정한은 그런 민규를 한번 쳐다보고, 다시 명호를 봤다. 응 그럼 나도 가야겠다. 둘이 좋은 시간 보내. 정한은 테이블 위 휴대폰을 챙겨 자리를 떴다. 정한이 나가고, 명호도 자리에 있던 짐을 챙겨 민규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좀 남네. 일단 그 근처로 가 있을까?

 

  명호는 멀뚱히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민규에게 물었다.

 

  아까 그 사람 누구야?

  아는 형.

  어떻게 알아?

  뭔 소리야. 어떻게 만났냐고?

  응.

  학원에서 만났어. 지금은 관뒀는데 나 도와주다가 친해졌어. 그래서 어떻게 할래?

  ……

  지금 가?

  몰라. 알아서 해.

  왜 이래?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

  아니거든?

 

  딱 명호가 놀리기 좋게 삐진 티를 내는 민규에 명호는 이만 웃음을 터뜨렸다. 야. 웃지마. 알겠어. 명호는 평소보다 눈썹이 축 쳐져 내려간 민규의 얼굴을 한번 살핀 후에 자신의 팔 한 쪽으로 감싸 안았다. 자신도 이 상황이 웃긴지 민규의 입가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배고프니까 빨리 가 ㅡㅡ.

  • Twitter

©2021 by 규잇합작: SOULMATE.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