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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만이 있을 뿐

​W. 묵

  창문 밖의 모르는 남자가 내게 아는 척을 했다. 반갑거나 그런 게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할까. 어렸을 적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은 것 같은 눈으로.

  그건 저번 주 일이다. 그날은 웬일인지 카페에 손님이 별로 없어 일찍 마감을 하고 있었다. 집에 일찍 들어가서 뭐할까 생각을 하는 동안, 누군가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가 날 보고 있었다. 조금은 슬프지만 기쁜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좀 감동한, 눈물이 맺힌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밤에 낯선 이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원래 무서워했겠지만 나는 어쩐지 무서운 것보다 걱정이 앞섰다. 카페 문을 열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코 앞에서 다시 본 남자는, 그때는, 울고 있었다.

 

  “죄송해요.”

  내 또래로 보이는 그 남자는 이국적인 억양으로 한국말을 했다. 중국인인가? 키가 훤칠하고 굉장히 마른 사람이었다. 커피 머신을 청소했기 때문에 간단히 유자차만 대접할 수 있었다. 머그잔을 쥔 그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고 예뻤다.

  “그렇게 심하게 울 생각은 없었는데. …감사합니다.”

  그도 그럴게 그는 카페에 들어오면서도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곡소리는 내지 않았다. 남자는 소리 없이 울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

  “아니, 캐물으려던 건 아닌데.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오지랖이 아무리 넓어도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었나. 내 모든 행동에 의문을 느끼면서도 나는 남자에게 질문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내 물음에 고개를 숙여서 눈물을 닦던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봤던 날카롭고 위태로워 보였던 그의 얼굴선은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직선보다는 곡선이 많았다. 얼굴을 가린 치렁치렁한 주황색 앞머리 사이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떤 오래된 기억이 떠올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부담스러우셨다면,”

  “혹시.”

  남자와 나의 말이 동시에 나와서 두 목소리가 겹쳤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는 웃었다.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입가는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움직였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제 이야기를 한 번 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 남자는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몇 백 년 전, 대륙의 어떤 나라의 수도에 한 서예가가 있었다. 서예가는 젊은 나이에 이미 수십 년을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필체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라의 황제의 귀에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서예가의 글씨를 직접 받아보고 싶었던 황제의 명에 의해 그는 잠시 궁에 들어가 머물게 되었다. 그렇게 서예가는 한동안 황실을 위해 글씨를 썼다. 반도에 있는 이웃 나라의 사신들이 교류를 위해 왔을 때도 그는 궁에 있었다. 그때 서예가는 옆나라의 한 사신을 만나게 되었다.

  “서예가는 그 사신을 처음부터 눈여겨봤대요. 외모도 그렇고, 기백도 좋았거든요. 언행을 보면 그가 총명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어요. ‘옆 나라에도 저런 사람이 있군.’ 싶었대요. 일개 서예가가 외교사절단하고 만날 일이 없으니까 그냥 그러고 말았대요. 가끔 멀리서 보기만 하고, 그렇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대요.”

  그러나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옆 나라의 사신은 영리했지만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는 경향이 있었다. 밤 산책을 하다가 잘못해서 서예가가 머무르는 곳의 뜰에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예가는 잠을 잘 자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전에 달빛을 받으며 산책을 하곤 했다. 그 버릇을 생각하면 두 사람이 그 날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만났을 것이다. 보름달이 서쪽으로 기울던, 유난히 고요하던 그날 밤이 아니었더라도.

  뜰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처음에는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마 사신은 당황해서, 서예가는 자신의 뜰에 들어온 불청객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곧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되자, 사신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좋은 밤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미안하다, 길을 잘못 들었다, 그 어떤 말도 아닌. 서예가는 사신의 말을 몇 마디 듣다가 방에서 종이와 붓을 가져와 필담을 시작했다. 길을 잃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이렇게나 달빛이 밝은데도 말입니다.’

  ‘달빛이 아름다워서일 수도 있겠지요.’

  문구를 읽은 사신은 빙그레 웃고 다시 붓을 들었다.

  ‘혹, 그대가 그 명필입니까? 글씨체를 보니 알 것 같습니다.’

  서예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대로 고고하군요. 대나무 같기도 하기도 하고요. 그대를 닮은 것 같습니다.’

  서예가는 부끄러워졌다.

  ‘돌아가는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또 잘못해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을 가면 안 되니까요.’

  먼저 발을 뗀 서예가의 뒤로 사신이 불러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사신이 뭔가를 써서 보여주었다. 급한지 그의 필체는 부산스러웠다.

  ‘조만간 편지해도 되겠습니까?’

  ‘아, 제 말은, 제가 그대에게 말입니다.’

  ‘그대를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서예가가 웃었다. 곧 서예가가 들고 있던 마지막 종이에 단 두 글자만 쓰였다.

  ‘明浩.’

 

  “두 사람은 남은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어요. 함께 시조도 짓고 산책을 하기도 하고, 차도 한잔하고. 그 사신은 그림에도 관심이 있어 함께 그리기도 했어요. 서예가는 그때부터 그림을 시작했었죠.”

  “국적을 초월한 우정이네요.”

  “…….”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잔을 내려다보았다.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나는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자차는 식어가고 있어 잔 위로 피어오르던 김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우정이라기보단…. 우리는, 벗 그 이상의 사이였어요.”

 

  ‘사모하고 있습니다.’

  사신은 그렇게 말했다. 마음에 그를 품고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던 건 서예가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임을 느끼고 있어서라고 그는 말했다. 어찌 보면 이상하고,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신은 둘의 생각이 하나가 된 듯, 통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전설 속의 절친한 위인들의 우정과는 다른 것 같았다. 우정도 물론 있을 수도 있지만, 둘 사이에는 애정 역시 존재한다고 그는 믿었다. 서예가는 사신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그만의 필체로 사신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사신은 당혹스러워했지만 금방 답을 내놓았다.

  ‘평생, 함께 살면 안 되겠습니까?’

  서예가의 시선은 ‘평생’이라는 단어에 고정되었다. 평생이라. 서예가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왜요?”

  “서예가에게는 사정이 있었어요.”

  “사정?”

  “얘기가 길어지네요…. 간단히 말해줄게요. 믿든지 말든지 해요. 그냥 일단은 들어주세요.”

  남자의 긴 눈매가 느린 깜빡임에 의해 물결치듯 움직였다. 잔을 감싸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마감 시간을 훨씬 넘겼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아직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남자는 이내 이야기를 계속했다.

 

  서예가는 그 시점에서부터 300년 전에도 살아있었다. 그때도 젊었다. 그는 그때는 찻잎을 따고 약초를 캐면서 근근이 살아가던 시골 청년이었다. 마을 아이들과 함께 크고 나이가 들었다. 정혼자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산사태에 휩쓸리지만 않았으면 그는 그 정혼자와 혼인하여 자손을 보고 늙어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운명이 아니었다.

  어느 날 산사태에 휩쓸린 그는 겨우 살아남았다. 정신을 차린 그는 목이 매우 말랐었다. 마침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샘물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그는 그것을 마실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물을 마시니 기운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 같았다. 샘물이 금방 마를 듯 말 듯 하게 나와서, 나중에 목이 마를 것을 대비해 서예가는 가지고 있던 작은 물병에 그 샘물을 조금 담기로 했다. 그가 샘물을 병에 가득 차게 담고 나자 물은 금방 말라버렸고,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도 그 아비규환에서 벗어날 만큼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그는 무사히 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곧 그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남자가 다들 늙기 시작했는데도 조금도 늙지 않아서예요.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어요. 마을 사람 몇몇은 그가 산신령에게 도술을 전수 받아서라고 생각했고, 몇몇은 그가 죽은 귀신인데 사람 형상으로 그들 사이에 끼어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찌 됐든 남자는 그 마을에 더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도망쳤던 거예요.”

  남자는 그 산을 열심히 뒤져 샘물이 나왔던 곳을 찾았지만 그 샘물은 이미 오래 전에 말라버린 뒤였다. 죽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두 시도해봤지만 분명 고통스러워하며 정신을 잃었던 그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멀쩡하게 깨어났다. 남자에게 끝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그가 가진 생(生)과 사(死)에서 사가 지워졌고, 그는 싫어도 모든 것이 계속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여전히 사람 곁에서 살고 싶어 마을 곳곳을 전전했다. 그러나 길게는 8년 정도까지밖에 살 수 없었던 그는 이 방랑 생활에 지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산속에 숨어 살다가 속세로 잠깐 나오고, 또 칩거하길 반복했다. 어떤 종교도 그에게 이 끝없는 생을 끊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남자는 죽고 싶어서, 그의 사를 되찾고 싶어서 더 많은 생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직업으로 살아가고 여러 방법들을 찾아봤다.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정했던 직업은 서예가였다. 그리고 그때 그 사신을 만났다.

  서예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사신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고백했다. 지금껏 오랜 시간 동안 사를 위해 살았지만 지금만큼은 생이 이토록 소중한 적이 없었다고. 그러나 그와 자신의 생의 길이는 찰나와 우주의 수명만큼이나 차이가 나니, 섣불리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사신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예가는 그럼에도 사신이 자신의 말을 믿고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그 정도로 통해있었으니까.

  ‘평생을 함께하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서예가는 오래된 병을 하나 꺼냈다. 분명 오래되어 보였지만 무슨 짓을 해도 전혀 깨질 것 같지 않은 병이었다.

  ‘그때 간직한 샘물이 딱 한 병 분량이 있습니다. 그 물을 마시면 그대도 저와 같이 생만이 남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함께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혹시나 해서 말해준 마지막 방법이기는 하지만, 서예가는 사신이 이를 수락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선물로 서방에서 들여온 규화라는 꽃을 주었다. 키가 크고 줄기가 단단하며, 환한 얼굴을 가진 게 그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서예가는 평생을 살고 싶다면 자신에게 오라고 하고 사신을 떠났다.

  다음 날 사절단이 떠났다.

  사신은 오지 않았다.

 

  “제 이름은 쉬밍하오예요. 한국식으로 읽으면 서명호.”

  “….”

  “이야기 속의 남자와 같은 이름이에요.”

  “그렇다는 건 지금 명호…씨는 불로불사라는 건가요?”

  명호 씨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잔잔한 미소만 지었다. 어딘가 후련한 듯한 미소였다.

  “믿어달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냥, 이런 얘기를 꼭 당신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굳이 저한테 한 이유가 뭔가요?”

  “…….”

  “그리고 왜 카페 앞에서 울고 계셨나요?”

  “당신 이름이 뭐죠?”

  “어, 그러니까, 김민규요.”

  “역시 틀림없구나. 바로 그거예요.”

  뜬금없는 명호 씨의 말에 당황하는 순간, 그는 다 식은 잔을 내 앞으로 밀어놓고 코트를 여미며 갈 준비를 했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다급하게 함께 일어나면서 내뱉자 명호 씨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 사신의 이름도 김민규였어요.”

  “네?”

  “같은 이름과 같은 얼굴. …다시 만나기까지 오래 걸렸네요. 고마웠어요.”

  유자차 값을 테이블에 놓은 뒤 가방을 매고 그가 곧 떠나려고 하자 나는 그를 붙잡았다. 마치 자기 일인 것 같은 기묘한 이야기를 하고 떠나는 이 남자가 분명 아주 이상하고 수상하긴 했지만 나는 그를 내 인생에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두고 싶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는, 아직 생각해보기는 해야 하지만. 나는 이미 그에게 묘하게 끌리고 있었다. 울 듯 일그러진 그의 눈빛을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나는 그의 번호를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대나무 같은 길고 곧은 글씨체로 이름과 전화번호를 냅킨에 적었다. 그리고 가기 전, 명호 씨는 신기하다는 듯 작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신기하네요. 몇 백 년 전이랑 똑같아.”

  그날 밤, 나는 꿈에서 폭포가 쏟아지는 절벽 앞에 있는 작은 정자에서 검은 머리칼을 가진 명호 씨와 입을 맞추는 꿈을 꿨다.

 

  카페에서 넋 나간 사람처럼 긴 이야기를 한 후에도 그는 내게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그때 그 이야기가 흥미로웠지만 그것보다는 나를 더 알고 싶었다고 했다. 당신이 몇 살인지도 상관없다고도 했다. 그는 나를 믿는다고 했다.

  카페를 나오면서 나는 그냥, 그 이야기를 민규의 환생 앞에서 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그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그 앞에서는 생각을 잘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긴장을 하니까. 그를 사랑했던 몇 백 년 전과 다름없이.

  민규, 그러니까 환생한 민규는 카페 사장이었다. 그는 종종 한가하면 놀러 오라고 내게 연락을 했다. 항상 시간은 있었지만 매번 그 제안에 응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적극적인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라서였다. 하지만 그가 보고 싶기는 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감 시간에 잠깐 찾아갔다. 그런데도 어린 사장님은 나를 항상 반갑게 맞아주었다. 유난히 수선을 더 떨면서. 그 때문인지 옛날 민규보다 이 민규는 좀 더 장난꾸러기 같았다. 개구진 웃음을 애교부리며 피울 수 있는 아이였다. 그 민규를 좀 더 어렸을 때 만났더라면 이런 모습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같은 모습이었지만 조금은 다른 성격이 신기했다.

  “차는 입에 맞아요?”

  “네. 맛있네요.”

  민규는 내가 찬 음료를 마시지 않고, 커피보다는 차 종류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잘 팔리지도 않는 차 메뉴를 만들어 잔뜩 보관해두었다. 기존의 홍차는 가짓수를 늘렸고, 꽃차도 사 왔다. 나라는 존재를 알게 된 지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다. 불안한 징조이다. 민규는 나에게 호감을 보였다. 주인을 보는 강아지마냥 활짝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이 근처에 갤러리가 있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새로 개봉하는 영화를 보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 아이가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닐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민규 씨는 날 좋아하는 건가요?”

  그러자 민규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부정도 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네.”

  곤란하다. 전생의 민규는 이렇게까지 직진만 하진 않았는데.

  “저는 왜 싫어하시는 거예요?”

  “너야말로 왜 나를 좋아하는 거니….”

  “갑자기 말 놓기예요?”

  머릿속에는 이 어린 것을 어떻게 타이를지, 어떻게 회유할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을 하기 전에   딱 하나만 묻기로 했다.

  “왜?”

  커피 머신을 닦던 민규는 행주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좋아하게 됐어.”

  “말을 놓은 것부터 그 이유까지 지적할 게 너무 많은데.”

  “음, 말 놓은 거는 네가 먼저 놨으니까,”

  “버릇없어.”

  “…그리고 이유는, 음. 원래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잖아.”

  “없어도 이건 너한테 좋을 거 없어.”

  “더 알고 싶어서 그래.”

  고개를 숙이고 찻잔 바닥을 쳐다보다가 나는 그 말에 비로소 시선을 들었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우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잖아. 그런 것 때문에 네가 더 좋고, 그래서 널 더 알고 싶어.”

그때랑 똑같은 말을 했다. 그 사람이 떠올랐다. 오래되어 온전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은 그와의 시간이 되살아나 내 심장 부근에서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심장이 떨리면서도 불현 듯 엄청난 불안이 내게 덮쳤다. 약간의 불쾌함도 함께 올라왔다. 그가 나를 우습게 보는 건가 싶어서.

  “만약 네가 처음 만난 날에 내가 했던 말이 그냥 신기해서 그러는 거면.”

  다시는 연락하지 마.

  말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지만 눈물도 생각만큼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코트를 챙겨 나오면서 나는 한 달 전에 이 카페에 들어왔을 때처럼 눈물을 떨구면서 나갔다. 길은 추웠다. 그때 민규가 준 유자차에서 나는 김만큼 하얀 입김이 가을 밤거리에 퍼졌다.

 

  갤러리에 걸린 수묵화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했다. 나이를 먹어도 처음 겪는 것에는 서투를 수밖에 없구나. 그 민규를 만난 뒤로 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그만큼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민규가 돌아오지 않자, 나는 곧 궁을 나와 숲으로 갔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그 곳에서 살았다. 민규가 죽은 지 오래됐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속세로 돌아가지 않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어디든 가서 살았다. 그러나 점점 사람이 많아진 탓에 나는 그냥 다시 수많은 생 속에 몸을 숨겼다. 내가 나뭇잎이 아니었기에 숲에서 살아봤자 숨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나뭇잎이 될 수 있는 곳은 대도시였다. 그 속에서 그를 잊으려고 노력해봤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앞에 있는 그림은 대나무 그림이었다. 예전에 내가 그린 그림이었다. 이 갤러리 주인에게 이 그림을 기증했더니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귀빈으로 대접했다. 그 결과 나는 이 갤러리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나를 그냥 돈 많은 중국인쯤으로 알려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꽤 많았기 때문에, 세상 곳곳을 누빌 때 나는 중국에서 온 상인의 신분으로 다녔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봤다. 이때쯤 나는 그가 환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그를 찾아다녔다. 세상의 한 구석은 항상 전쟁 중인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김민규의 환생을 찾았다. 물론 힘든 일이었지만, 나는 가진 게 시간밖에 없었기에 가능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틈틈이 글씨와 그림 연습을 했다. 몇 백 년 전 그 필체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랬다. 어쩌면 그의 환생이 알아볼까 싶어서였다. 아니면 적어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흥미를 끌어내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계속해서 썼다. 그의 환생이 나를 기억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을 거라는 것도 알면서. 그 환생을 내가 알아볼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결국에는,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나서 알아보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작품이야? 요?”

  반사적으로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민규였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입은 꾹 다문 채로 몇 걸음 떨어져서 서 있었다. 갤러리 안은 텅 비어 우리 둘뿐이었다. 이건 또 무슨 운명이려나.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다.

  “…반말이야 존댓말이야?”

  “반말로 할래 그럼. 좋아하는 그림이야? 나돈데.”

  “내가 그린 거야.”

  “…이거 몇 백 년에 그린 그림,”

  “그러니까.”

  “어어….”

  민규는 성큼성큼 다가와 어느 틈에 내 곁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한참 말 없이 그림을 쳐다보다가, 한숨처럼 말이 낮게 터져 나왔다.

  “민규가 좋아하던 그림이었어.”

 

  내가? 잠깐 멈칫했다가 그 민규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전생을 말하는 거겠지. 명호가 사랑했다던 그 민규.

  “나를 닮았대. 비쩍 말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심지가 굳고 단단한 게 닮았대. 필체도 닮았다 그랬고. 그냥 이 그림에서 나를 볼 수가 있대.”

  그래서 좋아했어.

  그의 말에 괜히 심통이 났다. 나도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다가도 자주 내 너머의 뭔가를 보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아마 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겠지. 어찌 보면 그 존재는 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좀 질투가 났다.

  “신기해서 그러는 거 아냐. 난, 왜인지 모르겠는데 네가 좋아.”

  한 뼘 떨어져서 나는 그를 만난 첫날에 내가 느꼈던 것을 최대한 많이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괜히 너에게 차를 주고 그 긴 이야기를 다 들어준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는 굉장히 장기적인 플랜 위에 놓인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이제 운명이 뭔지도 모르겠어.”

  명호가 중얼거렸다.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내게는 조금 잔인한 것 같아.”

목소리의 끝이 약간 갈라지며 입술 사이로 나왔다. 그게, 내게는 어쩐지 외롭게 들렸다. 작은 단칸방 안에서 소리를 치면 보잘것없는 메아리가 돌아오는 것처럼.

  “지금까지 혼자였던 거야?”

  “…….”

  “쭉?”

  “그렇지.”

  “외롭지 않아?”

  “…외롭지.”

  스카프를 두르고 있던 그는 얼굴을 그 뒤로 숨겼다. 대나무 숲 사이로 숨는 것 같이. 어쩌면 명호는 혼자 있었던 만큼 그의 마음을 더 꽁꽁 숨기는 버릇이 생긴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젠 익숙해.”

  “괜찮다고는 안 하는구나.”

  명호는 점점 더 대나무 사이로 숨었다. 사람 사이에 숨으면서 마음도 숨겨왔을 터였다. 진짜 그의 정체를 밝혀서는 그 사이에서 살 수가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내가 몇 백 년 만에 명호가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 정도는, 내가 되어줄 수 있는데.

  “그 물은 아직도 있어?”

  “너, 말도 하지 마. 생각도 하지 마.”

  “있어?”

  명호는 이쪽을 보지도 않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있는 것 같다.

  “평생 사는 건 힘들어. 내가 괜히 계속 죽고 싶었던 게 아니야.”

  “…….”

  “지금은 괜찮아. 너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 뒤로는 더 열심히 살았으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좀 부끄럽지만. 옛날에 민규와 함께 있던 그때와 비슷하지만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어.”

  말끝을 흐린 명호는 그러고 약간 망설이더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금 빠른 어조로 말을 쏟아냈다.

  “너도 영원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랑 같은 꼴이 되도록 억지로 끌어들일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 부탁할게.”

  “뭘?”

  “다음에도 한 번만 다시 태어나 줄 수 있어? 또 몇 백 년이 걸려도 좋아. 내게는 시간밖에 없으니까.”

  “…그래.”

  근데 말이야. 이어지는 나의 말에, 약간 안심하는 듯했던 명호가 슬쩍 내 쪽을 돌아봤다.

  “근데 다 좋은데, 왜 미래만 생각하는 거야?”

멈칫, 가느다란 눈매 속에 있는 동공이 옥구슬 굴러가듯이 도르르, 굴렀다. 나는 그의 긴 손가락을 잡고 우리의 약간 떨어진 거리를 좁혔다.

  “난 오래 살 건데. 게다가 난 아직 젊은데.”

  손에 힘을 전혀 주지 않았지만 명호는 자신의 손을 빼내지 않았다. 잠깐 겹쳐진 손을 쳐다보더니, 곧 시선을 우리 앞에 있는 그림으로 옮겼다.

  “나 늙으면 떠나게? 떠날지 안 떠날지는 지내봐야 알잖아. 난 옛날처럼 그냥 떠나지는 않을 거야. 그건, 그래 내가 아니긴 했지만.”

  게다가 나는 그를 떠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는 우리가 운명이 아니라고 백날을 우겨도, 나는 우리가 운명이라는 것을 갖가지 이유를 대며 증명해 그의 곁에 붙어있을 계획이었다. 운명이라는 게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 곳에 있는 게 좀 그런 거면 우리 그냥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함께 살면 안돼? 일단 지금만 생각하면 안될까?”

  명호는 여전히 그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깜빡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눈에서 눈물이 점점 고이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그의 손에 깍지를 끼자 이내 명호는 아주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앞으로 그럼 조금만 더 한국에서 살다가, 다음에는 미국에나 가볼까. LA, 뭐 이런 데로. 천천히 생각은 해도 되겠지. 아마 우린, 이제 시간이 아주 많아질 테니까.

  생은 있고 사는 없는 그에게, 내 사를 맡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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