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이 고장나면 전문업체를 부르세요
W. 누트
진짜 어이가 없다.
명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민규를 가만히 쳐다봤다. 저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동자가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말없이 민규를 꼬라보던 명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왜 이래. 게다가 차림은 또 어떻고. 아래쪽을 힐끗 본 명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두통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앞치마 외에 입은 게 실오라기 티끌 하나 없었다.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나?
눈빛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차림에 뒤로 몇 발 물러서기도 이제 한계였다. 곧 등 뒤로 유리창의 찬 기운이 느껴졌다. 나름의 이벤트였나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취향도 비슷하고 같은 정서를 공유하다시피 하는 둘이었기에 더 어색했다. 니가 언제부터 그런 거 좋아했다고.
명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앞에 있는 인물은 여전히 반짝거리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응? 명호야. 저녁 먹을래? 목욕할래? 아니면… 나부터?"
이 어처구니없는 대사가 왜 나왔는가 하면, 일단 몇 분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
사실은 몇 분 전으로 돌아가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맥락도 없이 갑자기 저러는데 왜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다만 사건의 시작이라고 할 만한 건 있었다. 아마 집 문에 붙어 있던 전단이었겠지.
좀 전만 해도 저녁거리를 준비하러 슈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건물에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탄 지 얼마 안 되어 집 앞에 도착했는데, 문짝에 무언가가 붙어 있는 거다. 대충 광고겠거니 싶어 종이를 떼려고 하던 그때였다. 종이에 붙어 있던 테이프가 딱 떨어지는 찰나 주변 풍경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당황감이 갑자기 훅 엄습해왔다. 심장부터 손톱 끝까지 빳빳하게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애써 진정하려고 심호흡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바로 눈앞에 있는 집 문과 손에 들려 있는 종이 빼고. 얼떨떨하게 서 있다 보니 문득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전단에 쓰여 있는 까만 글자들이었다. 명호가 굳어 버린 팔을 간신히 움직여 종이를 눈앞으로 가져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 * *
♡두근두근♡ 시나리오 만들기
오늘 하루 동안 본인이 주인공이 되어 문 안쪽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개를 이끌어가면 됩니다.
만들어질 이야기는 방통위 등급표 기준 15세 연령가 제한을 따라야 합니다. 장르는 상관없으나, 내용이 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시 내부에서 외부로 나갈 수 없게 된다는 점 유의해 주세요. 또한, 내부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는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됩니다.
* * *
지금 이거 나한테 시킨 거 맞지?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데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주인공이 되어 사건의 전개를 이끌라니, 무슨 드라마라도 찍으라는 이야기인가. 심지어 잘못하면 다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단다. 정확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무책임한 거 아닌가. 나 내일 알바도 가야 한다고. 와중에 문 안쪽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개라면 집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말일까. 순간 공포 영화스러운 전개를 상상한 명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솔직히 영화야 대부분은 다 허구니까 별로 무섭지 않다지만, 실제로 겪는다고 가정할 시 조금 오싹해지는 거다. 심지어 연령가 기준도 있었다. 15세 연령가도 요즘은 다 막 어디 찔리고 베이고 피가 낭자하더라.
게다가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다니. 들어가 봤자 우리 집일 텐데. 정말 어디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니면 집에 카메라 달아서 연예인들 일상을 지켜보는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라거나. 그런데 난 그냥 일반인 1이잖아.
한 번 시작된 망상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만약 우리 집 문을 열었는데 그 안이 우리 집이 아니라면? 그럴 일은 물론 없겠지만 전단지 뜯었다고 사방이 이렇게 변한 것도 솔직히 말도 안 된다. 한참 머리를 싸매고 있자니 갑갑함만 더해졌다. 나보고 뭘 어쩌라고. 아무래도 들어가서 뭔가 하기 전까지는 상황 해결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여기서 고민해 봐야 뭐 하나. 문득 애인의 입버릇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면 해. 그래, 하면 하는 거다. 뭐 어쩌겠어, 일단 부딪혀 봐야지. 명호가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뒤 보인 건, 다행히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바로 보이는 현관, 그리고 그 앞에 거실, 그 왼쪽에 조그만 부엌. 명호가 몸에 힘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만 걱정을 하며 열었건만 이게 웬걸, 문 안쪽은 그냥 집이었으며 심지어 평화롭기까지 한 분위기였다. 달칵하고 문이 닫힌 뒤 손잡이를 아무리 돌려 봐도 다시 열리지 않는 문만이 현실감을 일깨워주었다. 조금 허탈해지기까지 하는 심정이었다.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대충 넣어놓고 현관에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칼칼하고 매콤한 향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갈치조림인가? 더불어 낮은 톤으로 흥얼거리는 콧노래도 조금씩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아는 이런 목소리라면 한 명뿐이지. 내심 불안했던 마음이 싹 씻겨 내려갔다. 소울메이트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급격하게 안정감을 되찾았다. 급격하게 좋아진 기분으로 룰루랄라 부엌에 들어선 명호가 별안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앞에는 민규가 명호를 등지고, 그러니까 싱크대 쪽을 보고 서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탄탄한 등짝과 엉덩이를 자랑하면서.
이게… 뭐지. 입이 저절로 떡 벌어졌다. 이거 혹시 무슨 이벤트인가? 아니면 실험 카메라? 이렇게 갑자기? 그간 연애하던 몇 개월간에도 한 번 본 적 없던 광경에 뇌가 그대로 정지했다. 손에 힘이 풀려 천 장바구니가 툭 떨어졌다. 열린 틈새로 반찬거리 재료를 고르며 같이 산 사과가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감히 가방으로 눈을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만 벌리고 있는데, 마침 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본 민규가 활짝 웃었다. 서명호? 심지어 그 앞에는 앞치마를 둘렀다. 이거 그냥 알몸에 앞치마만 둘렀단 소리 아냐. 쟤 혹시 이런 거 좋아했나? 아니면 설마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인가? 그동안 몰랐나 싶었던 충격적인 변태 취향에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는데, 그 뒤에 내뱉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저녁 먹을래? 목욕할래? 아니면 나부터?"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까딱 잘못하면 서로 죽을 때까지 놀림당하는 사이에, 물론 다 장난이라지만, 어쨌거나 저런 말을 맨정신으로 할 리가. 저거 백 퍼센트 술에 꼴았거나 무슨 일이 있었거나이다. 상황 타개 방법 첫 번째. 다가가서 냄새를 맡는다. 알코올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두 번째, 결과. 그럼 얘는 맨정신으로 돌았다. 돌았는데 맨정신이라는 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황이 그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너 왜 그래?'의 순화 버전이었다. 대답 대신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말을 들은 민규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입을 비쭉 내밀었다. 입꼬리가 잔뜩 처진 걸 보니 누가 봐도 나 서운해요 하고 팍팍 티 내고 있었다. 진짜 왜 저래. 이래저래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벌려진 입에서 내뱉어진 건 나 속상하다 따위의 말이 아니었다. 조금 더 큰 키와 덩치를 이용해 명호를 슬슬 뒤로 밀어붙이던 민규가 방금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저녁 먹을 거냐고, 목욕할 거냐고, 아니면 나랑 ♥♥할 거냐고. 누가 봐도 대놓고 꼴받은 사람이었다.
어이가 없는 건 난데 니가 왜 화를 내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게 무드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 게다가 영문도 모르게 화를 내니 이쯤 되면 내가 맞춰줘야 하는 건가 하는 심정이 되었다. 고민하다가 떨떠름하게 고른 선택지는, 결국, 목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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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거 불특정 다수, 하여간 누가 보게 된다고 그러지 않았나? 그런 예능도 화장실에는 카메라 안 달던데 양심이 있으면 여기서까지 보고 있진 않겠지. 아니 그럼 아까 민규 엉덩이는 다 봤다는 소리 아냐? 따끈따끈한 욕조 물에 몸을 담그니 생각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다.
아까는 거의 도망치듯이 욕실에 들어갔다가 또 한 차례 멍청하게 서 있었다. 이미 물이 가득 찬 욕조에서 후텁지근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던 탓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 놓은 거냐고. 왜 저렇게 진심이야.
여하간에 몸이 따뜻해지니 노곤노곤하게 긴장이 풀린 명호가 욕조에 완전히 누웠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니 문득 대답을 듣던 민규의 얼굴이 머릿속 한 편에 그려졌다. 우물쭈물하다가 목욕부터 하겠다고 하니 알겠다면서도 급격하게 시무룩해졌지. 장단이라도 좀 맞춰줄 걸 그랬나. 하지만, 할 때 하더라도 씻고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
나가서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조금 민망한 소리긴 하지만, 분명 당황했던 것도 맞지만, 이런 식으로 붙어오는 건 사실 나쁘지 않았다. 원래도 은근슬쩍 넘어주거나 아니면 아예 제가 꼬드기거나였기도 하고. 그새 젖은 손을 대충 수건에 문질러 닦은 후 핸드폰을 들어 잔잔한 재즈풍의 음악을 튼 명호가 멜로디를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까 너무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들어온 게 새삼 아쉬워졌다. 좀 주물럭대기나 할걸. 누가 들으면 질색하면서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잔소리를 잔뜩 해댔을 만한 상념이었다.
때마침 불현듯 생각난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15세 어쩌고 하지 않았나? 이거 그래도 괜찮나? 명호가 곱게 개어 놓았던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꺼냈다. 아까 뜯었던 전단이었다.
- 만들어질 이야기는 방통위 등급표 기준 15세 연령가 제한을 따라야 합니다.
잠금장치가 열림으로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밖에서 누가 막고 있다는 듯 굳게 닫혀 열리지 않던 문이 떠올랐다. 진짜 못 나가나?
솔직히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인 줄만 알았다. 원래는 절대로 안 믿을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데 문도 안 열리는데 쟤까지 저러고 있으니까 긴가민가해지는 거다. 집 비밀번호도 알려줬으니 안에 있는 건 놀랍지 않지만 안에서 그러고 있는 건 좀 놀랍잖아. 여기 쓰여 있는 게 진짜라면 쟤한테 장단 맞춰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냥 넘어가면 좀 겸연쩍지 않나. 명호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하긴 거기서 목욕부터 한다고 한 것도 이미 좀 무안하게 만든 거긴 한데.
또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을 보면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해야 하는 것 같았다. 다만 이 상황에 뭔가를 해보기가 좀 그랬다. 그러고 보니 굳이 새로운 걸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사람 살아가는 게 다 하나의 이야기지 뭐. 여기서 그냥 밥 먹고 기절해도 '저녁거리를 사러 슈퍼에 다녀온 서명호는 부엌에서 알몸 에이프런을 하고 있던 애인에 개의치 않고 목욕을 하고 밥을 먹은 뒤 침대에 누워 기절했다'가 되는 거잖아. 지금도 조건 대충 만족하는 것 같은데. 어느새 목욕을 마친 명호가 샤워 가운을 입고는 옆에 걸린 수건을 집어서 머리를 탈탈 털었다. 일단 민규를 잘 구슬려서 오늘을 잘 넘겨야겠구나 하며 문을 여는 순간,
'!'
놀라 나자빠질 뻔했다.
미끄럼 방지 스티커가 붙어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뇌진탕 직행 열차를 탔을지도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고 하던 비명을 애써 삼키며 몇 발짝 뒷걸음질 친 명호가 빠르게 중심을 되찾고는 황당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봤다. 화장실 문 바로 앞에는, 앞치마는 어디에다가 뒀는지 바지를 챙겨 입고 무릎을 꿇고서 저를 올려다보는 민규가 있었다. 상의는 여전히 탈의하고 있었는데, 더 어이없는 점은, 혼자서 어떻게 했는지 손목을 앞으로 묶고 있었다는 거다. 그것도 자기가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새빨간 리본으로. 목에는 손목의 리본가 같은 색의 개… 목줄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얘 뭐야?
덕분에 무얼 하려고 했는지 앞으로의 계획을 홀랑 까먹을 뻔했다. 문을 열었더니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것만도 충분히 놀랄 일인데, 그 사람이 존나 섹시한 차림으로 개 목줄을 차고 있다?
물론 마음은 너무 기특했다. 너무 기특하지만… 왠지 이렇게까지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사람이 때와 장소란 게 있잖아. 아니 사실은 집이란 게 더없이 적절한 곳이긴 한데 상황이 좀 그렇다는 거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조금이라도 여지를 준다면 누가 봐도 19금 프리패스로 침대 실려 갈 각이었다. 대체 왜 그랬어요. 명호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을 원망했다. 놀라서 잔뜩 흔들리던 명호의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 사라졌다가 다시 차분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와중에 한숨이 새어나가기라도 했는지, 민규의 표정이 점점 불퉁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명호 쪽이었다. 민규, 우리 일단 얘기부터 좀 할까? 별안간 상담 권유를 받은 민규의 표정이 빠그라졌다. 내가 이러는 게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물론 너무 좋아 좋긴 좋은데. 좋다는 사람이 지금 이래? 해명할 시간도 없이 민규한테 쏘아붙여졌다.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그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닌데.
여기까지 왔으면 거의 자존심 싸움이다. 민규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입을 삐죽이며 이쪽을 쳐다봤다. 근데 이제 와서 너랑 존나 하고 싶은데 상황이 좀 그렇다고 말을 하긴 왠지 머쓱하고. 봐, 말 못 하겠지? 이제는 성질을 살살 긁기 시작한다. 벌써 좀 식은 거냐고, 진짜 싫으면 싫다는 리액션이라도 하든가 왜 아무 말도 안 하냐고 뭐라뭐라 하는데, 일단 제정신을 차릴 여력이 있어야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었을까. 내가 괜히 그랬겠냐고. 계속 날아오는 말을 받아 쳐내고 변론을 시작하려고 해도 듣는 척도 안 했다.
아무래도 그간 서운했던 것까지 모조리 겹친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해명할 시간 좀 줄래. 나 해명 좀, 나… 말을 시작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상황에 결국 폭발한 건 일순간이었다. 아, 진짜. 우리 오늘 15세 이용가 해야 된다고!
결국 홧김에 뱉어버렸다. 이거 설득력 있게 어떻게 설명해주나, 하고 고민하는데 문득 민규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표정이 좀 이상했다. 못 알아들었다고 하기엔 당황한 쪽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반응이 왜 그래? 마주 당황하기도 잠시 민규가 분위기 전환의 장을 열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아무래도 정말로 대화가 필요한 타이밍인 것 같았다.
-
그러니까, 너는 19금 시나리오를 받았다는 거지.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나게 불어난 오해를 풀었다. 그러니까, 쟤는 딴 데 있다가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우리 집 소파에 폭 안겼고, 앞에 있던 종이에는 너는 이제 못 나가니 나가려면 19세 연령가의 무언가를 하라는 말과 함께 받은 도구들을 사용하라는 말이 남겨져 있었고, 그 말에 따라 옆에 있던 큰 가방을 열어보니 기상천외한 도구들이 있었다는 것까지. 아무래도 이참에 이벤트 형식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내가 이미 당황한 상태로 맞닥뜨려서 과하게 굳어버린 탓에 원하던 상황이 안 나왔다는 것 같았다. 아니 근데 난 어울려주면 안 된다고. 갈치조림 뼈를 바르며 이야기를 듣다가 작게 잘라 한 입을 먹은 명호가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건네받았다. 나보고는 15금 하라고 그러더니. 내용도 저가 받은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으나, 연령가 제한에 대한 설명이 달랐다.
- 만들어질 이야기는 방통위 등급표 기준 19세 연령가 제한을 따릅니다. 받으신 도구들을 사용해 마음껏 즐겨주세요. 장르는 상관없으나, 내용이 충분히 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시 내부에서 외부로 나갈 수 없게 된다는 점 유의해 주세요.
도구라고?
명호가 방금 본 빨간 목줄과 리본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 게 아니라 받은 거였구나. 어쩐지 이런 얘기 한 번을 안 하던 놈이 갑자기, 그것도 과하게 본격적이다 싶었다. 글자들을 읽는 사이에 민규가 커다란 쇼핑 가방을 가져와서는 명호의 옆에 턱 내려놨다. 이게 니가 받았다는 그거야? 열어봐. 민규가 가볍게 턱짓했다.
딱 봐도 무언가 가득 차서 묵직해 보이는 가방이었다. 민규의 턱짓을 본 명호가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조그만 쪽지였다.
'애인에게 당신의 모습을 선물하세요!
tip: 벗고 사용하면 효과가 UP♥'
아마 앞치마에 붙어있었던 건가 보다. 종이를 치우니, 그 밑에 깔린 건 온갖 별의별 물건들이었다.
하나를 살펴볼 때마다 낯짝이 점점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고 얇은 밧줄에 '묶거나 묶이거나' 같은 부연 설명이 있다거나, 끈적끈적해 보이는 액체가 든 통에 붙어 있는 분홍색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은 아예 설명 같은 것도 없고 '질척질척♥' 따위가 쓰여 있다거나. 대놓고 숭해 보이는 도구들도 좀 있었다. 이거 꼭 밥 먹고 있는데 봐야 하나. 명호가 조금은 질린 얼굴로 가방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너 그래도 그나마 건전한 걸 택했구나. 어쩌면 지금쯤 잔뜩 괴롭힘당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흘러 있었다. 일단 우리 주변 정리 좀 해 볼까. 주변에는 구경하며 이리저리 내던진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부엌에는 안 치운 설거짓거리들이 쌓여 있었다. 일단 난 부엌 치울 테니까, 넌 여기 정리해 봐. 기어코 자기가 다 하겠다는 걸 만류하고 먹은 반찬들을 치웠다.
설거지를 끝마치고 겸사겸사 이도 닦은 명호가 거실 소파에 널브러졌다. 잔잔하게 물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민규는 아무래도 샤워하러 들어간 것 같았다. 아까 술 먹었는지 체크했을 때도 샴푸 냄새밖에 안 나길래 씻었나보다 했는데, 뭘 또 씻는담.
갈 곳 없던 명호의 눈길이 아까 실컷 뒤졌던 가방에 가 닿았다. 아까 볼 때도 못 봤던 종이의 모서리가 삐죽 솟아 있었다. 어쩌면 이 상황의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즉각적으로 들어 곧장 손을 뻗어서 종이를 밖으로 빼냈다. 그렇게 빼낸 종이에는, 상황 힌트는 무슨 남사스러운 말 투성이였다.
' * * 효과 좋은 대사 가이드 * *
저녁 먹을래? 목욕할래? 아니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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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지 ♥♥♥♥♥♥♥
♥♥♥♥♥♥♥♥
♥♥♥♥♥♥♥♥♥♥'
아까 대사 이거 보고 했던 거구나. 이걸 보고 고민했을 민규를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그만 보는 게 정신에 이로울 것 같아 종이는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남은 문제가 있지. 누구의 기준에 따를 것인가. 나는 15세고, 쟤는 19세다. 이 기준 만든 사람 대체 누구야? 가방 속을 들여다보다가 마침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거실 쪽으로 나오는 민규가 보였다. 의논을 위해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 민규가 치고 들어왔다.
"우리 그래서 어떻게 해?"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자."
어차피 우리 집인데 둘 중 한 명이 못 나간다면 내가 남는 게 맞지 않을까? 혹시라도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어서 내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올지도 모르고. 그리고 너한테는 남의 집인데 조금 억울하잖아. 설명을 듣던 민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만약 진짜로 못 나가면 어쩌려고. 그냥 둘 다 나갈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아? 나 진짜 이런 거 못 찾긴 하는데 한 번 해볼게."
"그러다가 못 찾으면 너가 못 나간다니까?"
"그럼 못 나가는 거지."
돌았나? 오만상을 찌푸린 명호가 민규를 한 번 노려봐주고는 말을 이었다.
"장난하지 말고.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너는 어떡해."
사실 어떡하냐고 물어보면 명호도 딱히 대책은 없었다. 방법 찾아보는 거 좋지. 근데 지금 벌써 저녁 시간인데, 한없이 그러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찾을 시 쟤는 못 나가는 거다. 진짜 어떡하냐 이거. 착잡한 기분은 민규도 마찬가지인지, 머리카락을 헤집다가 벌떡 일어나서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집 안을 뒤집은 후, 조금 지친 명호와 민규가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집 안은 달라진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생긴 종이 두 장과 큼직한 가방이 생긴 것 빼고는. 아,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도 빼고. 결국은 처음의 주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조건대로 행동할 것인가.
"그냥 하자니까?"
하자고, 그거. 그냥 해. 명호가 밀어붙였다. 내가 아까도 말했잖아, 우리 집이니까 내가 못 나가야지. 명호가 소파에 놓인 개 목줄을 집어 들었다. 정말 목줄같이 두꺼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명호가 내심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너 아까도 하자고 하려고 이거 목에 끼고 있었잖아. 민규가 반박했다. 아니, 그건 니 상황을 몰랐으니까 그랬던 거고. 알았으면 내가 했겠냐?
이렇게 해서는 결말이 나지 않는다. 시간을 끌었다가는 쟤가 못 나간다. 고민하던 명호가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너가 도와주면 되잖아."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민규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고? 그러니까, 혹시나 못 나가게 되더라도 너가 날 도와주면 되잖아. 우리가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니고 거의 평생 볼 거 아냐? 차라리 그냥 여기서 살아. 그리고 나 알바도 좀 대신 가주라.
마지막 말은 물론 장난이었다. 농담 식으로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어차피 못 나가는 게 필연적으로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으니 부담을 가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민규의 얼굴을 쳐다보니 눈이 엄청나게 초롱초롱한 거다. 감동이라는 듯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뭐야, 왜 이렇게 프러포즈같이 말해?
이 상황에 말이 이렇게 된다고? 떡 벌어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다물고 생각해보니 뜻이 비슷했던 것 같기도 했다. 평생 볼 거잖아라니, 완전히 그런 뜻이잖아.
대꾸할 말을 못 찾아서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자 정적이 찾아왔다. 문득 뭘 하나 싶어서 보니까 그냥 우물쭈물하고 서 있다. 아니, 쟤는 결심하면 쫙 밀고 나가는 애가 왜 저러고 있어.
아무래도 동기부여가 부족했던 것 같다.
"야, 하자고."
누워 빨리. 명호가 달려들어서 민규를 넘어뜨렸다. 죽도 밥도 안 되기 전에 칼을 뽑아야 한다.
"엉망진창으로 ♥해져줄 테니까 그냥 하자고."
명호가 큼직한 가방에서 도구 하나를 아무거나 골라 집었다. 잡고 보니 남성의 ♥이랑 비슷하게 생긴 모양새였다. 민규의 몸 위에 올라탄 채로 칼을 뽑은 것마냥 목 쪽으로 내밀자 민규의 시선이 명호의 얼굴로 향했다. 정말 괜찮겠냐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명호가 상관없다는 듯이 손에 있던 기구를 내팽개치고 민규의 입술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입술을 전투적으로 내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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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번쩍 떠졌다.
시야에 천장이 가득 담겼다. 방 침대였다. 곁에서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니 민규가 코골이를 하며 자고 있었다. 소리에 예민한 자신이었건만 아무 소리도 못 듣고 거의 기절했던 것 같았다. 뭘 얼마나 해댄 거야?
그러고 보니 그건 어떻게 된 거지. 방금 눈을 떴을 때부터 엄습해오던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은 명호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조금 사라졌다. 민규와 어제 저녁에 종일 논의한 것. 누구 말대로 해야 하는가. 모든 일이 종결된 지금은 정말로 못 나가게 되었는가. 민규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맞닥뜨린 상황은 예상 밖이었다. 거실 너머로 보이는 현관문에 어제와 비슷한 쪽지 같은 게 붙어 있었다. 어떻게 붙인 걸까.
'15세 이용가에 맞게 연령대에 맞지 않는 내용은 모자이크 및 스킵 처리되었습니다. ^^'
뭐라고?
시험 삼아 잠금장치를 풀고 문고리를 돌려 밀었더니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문 밖의 풍경도 평소와 똑같았다. 옆 쪽에 보이는 엘리베이터와 그 앞에 보이는 옆집.
혼란스러웠다. 문득 어제의 단편적인 기억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어느새 침대로 자리를 옮긴 둘은 도구에 눈 뜬 뒤로 신나게 놀다가 마지막에는 영영 헤어지는 연인처럼 신파극을 존나게 찍었더란다.
이럴 거면 뭐를 위해서 그렇게 울어 재꼈는지. 황당함 뒤에는 안도감과 피로감이 찾아왔다. 몸이 제대로 조립되지 않은 로봇처럼 온통 삐걱대고 있었다. 결국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신 뒤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간 명호가 민규를 꽉 껴안았다. 코골이를 잠시 멈췄던 민규가 뒤척이다가 다시 얌전해졌다. 그런 민규를 안고 도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