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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W. 익명D

  01. 시작.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은 지루했다. 방학이 다가오고, 보충수업이니 뭐니 떠들어 대고, 이석민이 옆에서 보충 수업 신청을 할 거냐 말 거냐로 말을 걸어도 지루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마른하늘에 벼락이라도 내려 아무런 인명피해가 없는 상태에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 오고, 천둥 번개가 치면 그 다음엔 토르가 오려나. 보충 수업 재밌겠다는 이석민의 재잘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생각했다. 보충 수업이 재밌겠냐고 이 바보야. 하늘 참 맑다.

 

 

 

  보충 수업 시작 일 주일 전, 방학까지 일 주일을 남기고 누군가가 전학을 왔단다. 어제 한타한다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솔직히 이석민만 아니었어도 치킨 먹을 수 있었는데. 눈을 비비며 교탁을 바라보자 가물가물 흐릿하게 감기는 와중에도 목 끝 까지 꼭꼭 싸맨 사람은 잘만 보였다. 쏟아지던 잠을 잊을 만큼 아주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그 애는 이 무더운 와중에도 하복 단추를 목 끝 까지 채워 입고 있었다. 그래서 샤프 뒤꽁무니로 날개 뼈 부근을 쿡 찔러봤다.

 

  “ 야, 너 그렇게 옷 입으면 안 덥냐. ”

  “ 뭐? 응. 별로 안 더워. ”

  “ 아. 그래? ”

  “ 응. ”

 

  괜히 말 한 번 걸어보려다 본전도 못 찾고 내 옆자리 앉은 이석민만 신나서 그 애랑 떠들고 있었다. 아, 짜증나. 그래서 그냥 책상 위로 엎어졌다. 작게 열어 놓은 창문에서 후덥지근한 바람이 끼쳐왔다. 더워 죽겠구만 뭐가 안 덥다는거야. 야, 민규야. 자? 얘 이름 서명호래. 명호야, 얘는 민규고 ... ... , 이석민의 신난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누가 뒷목을 쿡쿡 누르는 통에 잔뜩 구겨진 얼굴로 앞을 바라보니 그 애, 그러니까, 서명호가 텅 빈 교실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뭔가 싶어 눈 비비며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자 몇 번 달싹거리던 입을 끝내 굳게 다물고 칠판을 가리키더라. 삼 교시 과학은 과학실에서. 그러니까 지금 수업 종이 울린 지 얼마 안 됐다는거지?

 

  “ 과학실 어딘지 몰라. 같이 가. ”

 

  부랴부랴 책상 서랍에서 책을 꺼내니 그제서야 말을 했다. 그리고 책도 없고. 멍청하게 둥그런 얼굴만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았다. 그 과학실 사건 이후로 이석민보다 서명호랑 더 어울려 다녔었던 것 같다. 말 몇 번 트고 나니 관심사도 비슷하고 그래서. 아, 다른 게 한 가지 있다면 서명호는 책을 좋아한다는 것이고 나는 관심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런데 서명호를 따라 도서부로 동아리를 들었다는 것. 이석민이 처음에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니가 책을 다 읽냐면서. 서명호가 그 말 들으며 혼자 웃는 걸 보고 이석민 팔뚝을 팔꿈치로 모른 척 찔렀다. 즈응흐흐르. 뭐? 뭐라고? 민규야 뭐라고 했어?

 

 

 

  “ 야, 서명호. 이리 와서 이 책 좀 옮겨. 혼자 폼 잡으면서 뭐 하는 거야. ”

  “ 이것만 보고. 시간 아직 많잖아. ”

 

  창가에 기대어 책 한 권 들고 있는 모습에 갑자기 심장이 버거워져 심장께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너 뭐 보는데. 하고 다가가면 고개를 들고, 웃음을 짓고,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나 얘가 거북한가.

 

  “ 시집. 한 번 볼래? 내가 좋아하는 시야. ”

  “ .. 어어, 한 번 보자. ”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시 몇 구절 눈으로 읽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냥 갑자기 내가 얘를 견딜 수가 없어져서 그랬던 것 같다. 목 끝 까지 채운 단추 뒤로 보이는 가는 목선이라거나, 하복 아래로 떨어지는 얇은 팔이라거나. 그게 뭐. 야, 빨리 일이나 해. 하며 퉁명스레 이야기 하고는 등을 돌려 책을 옮기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 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고등학교의 시간은 중학교의 시간보다 더 빨리 갔다. 나이를 먹는 만큼의 배로 시간이 빨리 간다더니 어른들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우리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서명호는 앳된 얼굴 그대로였고 이석민은 여전히 말이 많았다. 나는 여전히 서명호를 견디기 버거워 하는 중이기도 했고. 교복이 짧아 질 만큼 우리는 자랐고, 바지 엉덩이 부분이 매끈해질 만큼 의자에 오래 앉아 있기도 했다. 수능 날에는 각자가 싸 온 도시락을 한 입 씩 맛보며 국어가 어떻네 수학이 어떻네 떠들었고, 그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서명호랑 둘 만의 약속을 했다. 야, 명호야. 우리 술은 졸업식 전 날에 같이 마실래? 그래, 좋아. 서명호는 내 말에 한 번도 싫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나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서명호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서명호를 견디든 말든, 버거워하고 힘들어하든 말든 시간은 흘렀고, 졸업이 다가왔다. 학교 운동장 벤치에서,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 몇 캔을 오징어다리 따위의 것을 안주 삼아 한 캔, 두 캔 씩 비우고 나니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분위기 낸답시고 스파클라도 몇 개 손에 쥐고 있으니 이월의 추위도 잊고 마냥 실실 웃었다. 오징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서명호의 얼굴에 스파클라 불빛이 비추이면, 간헐적으로 느끼던 버거움의 감정에 알콜내 나는 숨을 푹 쉴 뿐이었다.

 

  “ 민규, 무슨 일 있어? ”

  “ 일은 무슨. ”

 

  그냥, 그냥. 똑같은 말을 하고 또 같은 말을 내뱉었다. 술주정이 같은 말 반복하기라면 주량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야겠다고 생각 할 때 쯤, 서명호의 작은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어졌고, 심장은 발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다시 올라와 북소리처럼 둥둥 울릴 때 쯤, 내 감정을 하나로 정의 할 수가 있었다. 내가 서명호의 하복 아래로 떨어지는 팔뚝이나, 하복 셔츠 뒤로 튀어나온 쇄골을, 아래로 내리깔면 길게 드리우는 속눈썹을 버거워했던 감정과, 이석민과 더 붙어 있을 때 왜 기분이 나빴고, 공통점을 찾으면 왜 행복했었는지를.

 

  “ 민규, ”

  “ 야. 명호야.”

 

  스파클라는 맹렬히 타들어가다 이내 흔적도 없이 꺼졌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서명호의 얼굴만 바라보다 겨우 말을 짜내어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같아.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지러움을 동반한 두통에 겨우 눈을 떴다. 아, 오늘 졸업식인데 망했네. 싶어 시계를 보면 아홉 시. 여기서 학교 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를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니 옆자리에 누운 서명호가 눈에 보였다. 나 얘랑 얼마나 마셨길래 둘 다 이러고 잤나 싶어 서명호의 몸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깨웠다. 야, 일어나. 우리 졸업하러 가야해. 퉁퉁 부은 서명호의 얼굴이 볼 만 해서 한참을 웃다가 겨우 씻으러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술 냄새 풀풀 풍기며 간신히 서 있는 우리를 이석민이 한참을 노려봤다. 야, 미안. 미안하다니까? 어떻게 둘이서만 술을 마실 수 있냐며 노발대발하는 이석민을 졸업식 내내 달래줘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페브리즈라도 뿌리고 오는 거였는데. 내가 이석민이랑 말씨름을 하든 말든 서명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평소라면 싸우는 걸 보며 웃음을 짓거나 그만하라며 말리는 시늉이라도 했었는데 오늘은 아무런 반응 없이 강당 앞만 쳐다보더라. 어제 술먹고 실수라도 했나 싶었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싶어 징징거리는 이석민을 팔꿈치로 툭 치고 어딘가 묘한 표정의 서명호를 보다 강당 단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길지 않은 졸업식은 교장 선생님의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교가를 부르고, 친했던 친구든, 안 친했던 친구든 삼삼 오오 모여 사진을 찍거나 담임 선생님과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고, 대학 가서도 만나자며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이석민이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는 동안, 그 새 사라진 서명호를 찾아 온 교실을 돌아다녔다. 결국 만난 곳은 도서실이지만.

 

  “ 야, 서명호 뭐야. 겨우 찾았네. 너 여기서 뭐 하냐. ”

  “ 아니, 그냥. ... 왜? ”

  “ 오늘이 졸업식인데 우리도 사진 한 장은 찍어야지. ”

 

  너스레를 떨며 창가에 걸터앉은 서명호에게 다가가니 예의 그 시선이 따라붙는다. 서명호랑 같이 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셀카를 두 장 찍어 한 장을 건넸다. 자 이건 니 거, 이건 내 거.

 

  “ 민규야. ”

  “ 어엉? 왜? 다시 찍자고? ”

  “ 아니. 너 어제 일 기억하나 싶어서. ”

 

  서명호가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아니, 나 어제 그만큼 먹어놓고 필름 끊겼나봐. 내가 뭐 실수 한 거 있어? 아니, 없어. 아무 일도 없었어. 민규야.

 

 

 

 

  02. 자각.

 

  그 날 이후 서명호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러니까, 졸업식이 끝나고 나서 우리 엄마랑 아빠랑 밥을 먹고, 서명호랑 이석민이랑 만나려고 서명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없는 번호라고 뜨더라. 번호를 바꾸었나 싶어서 이석민에게 연락을 해보니 자기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나랑 더 친한 거 아니었냐고. 나랑 더. 그냥 그 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평생 함께 일 줄 알았던 서명호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으니까. 방에 앉아 혼자 생각해보니 나는 서명호에 대해 그리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었더라. 아는 거라고는 이름, 나이, 생일, 취미 그리고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뻤다는 것 밖에는. 삼 년 내내 붙어 다녔는데 그 흔한 집 주소 하나 몰랐다. 매일 매일을 그 없는 번호를 향해 전화를 했고, 혹시나 연락이 올까 싶어 번호를 마음대로 바꾸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이 감정에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곧 그 그리움이 몸집을 불리더니, 그리움이라고 부르지도 못 할 만큼의 크기를 가지게 되었다.

 

 

  시간은 고등학교 삼 년의 속도만큼 삼 년의 배로 흘러갔다. 서명호를 잃어버린 동안 나는 매 해 여름마다 크고 작게 아팠다. 새내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플 때 마다 서명호의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도 모르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며 끌어안기 바빴지만 지금은 꿈인 걸 알아서 그냥 바라보다 깨기도 했다. 그럴 때면 눈가가 축축해 꽤나 오랜 시간을 화장실 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서명호가 없는 삶 속에서, 혹여나 나만 서명호를 아는 건가 싶어 매일 매일을 졸업앨범을 확인하고, 이석민에게 서명호를 기억하냐고 묻기도 했었다. 그럴 때 마다 이석민의 안쓰러운 눈빛이 따라붙었지만, 나만 그 애를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너무나도 두려웠다.

 

  신입사원의 봄은, 벚꽃을 즐길 새도 없이 지나가버린다. 떨어지는 벚꽃을 보면서도 수 년 전 함께 봄을 담았던 것들이 생각이 나 헛웃음만 나왔다. 길어지는 낮과, 점점 짧아지고 얇아지는 옷가지를 바라보며 괜히 서명호 생각에 울적해졌다. 그 울적함이 화근이었나. 울적하니 술이나 까자는 생각으로 편의점에서 산 술을 빈 속에 들이부었다.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두 병이 세 병이 되니 눈 초점이 잘 맞지 않아 그냥 바닥 위로 엎드렸다. 서명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내가 그 날 너와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 전에 서명호의 집에 단 한 번 이라도 가 보았다면? 아니면, 내가 서명호를 사랑한다고 한 번이라도 말을 했었다면. 좋아한다고 말을 했었다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서명호는.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서명호의 얼굴이 보였다. 배경이 바뀌었다. 익숙하던 도서실, 책을 보며 서 있는 서명호가 보인다. 시간이 돌아간 것인지도 몰라.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서명호의 앞에 서니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모습에 괜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명호야. 왜? 왜 그렇게 씩씩거리면서 날 불러? 명호야, 내가 너를. 순간, 소리를 잃은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명호야, 너를. 널, 너를.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뱉어지지 않는 말에 목만 부여잡고 켁켁거리니 배경이 까맣게 바뀌며 멀어지는 서명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지마, 가지마. 내가 널 좋아하고 있어.

 

 

  둥둥 울리는 머리에 모래라도 들어간 것처럼 빡빡한 눈을 겨우 뜨니, 웬 병실에 나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왼 손에 꽂혀있는 바늘을 유심히 바라보다 이게 내 몸이 맞나 싶어 여기 저기를 더듬거리고 있으니 병실 문이 열리며 이석민이 빵을 한 아름 사들고 들어오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 민규야..! 민규야아아...! ”

 

  눈이 마주치자마자 소중하게 안고 있던 빵을 냅다 던지고 뛰어와 몸을 부여잡고 엉엉 우는 이석민의 모습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어, 얼빠진 소리나 내면서 그 커다란 몸을 토닥이고 있자니 들려오는 말이 참 가관이었다. 주말 내내 연락도 안 되고 회사도 무단으로 안 나갔다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집에 찾아왔단다. 내가 썩은 냄새를 풍기고 열도 펄펄 끓는 채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고. 그래서 자기가 허겁지겁 앰뷸런스를 불렀다고 하더라. 이제는 괜찮다고 힘 빠진 팔을 들어 흔들어 보이니 이석민이 하는 말에 괜히 미안해졌다. 너 그거 다 명호 때문이지? 내가 명호 찾아 줄 테니까 죽지 마. 나 친구 너밖에 없단 말이야. 니가 무슨 수로 서명호를 찾아.

 

  그 날 이후, 하루, 하루를 참 바쁘게 살았다. 잘릴 뻔한 회사에 진단서를 들이밀며 간신히 시말서로 대체하고, 밀린 업무를 쳐내고, 그 외의 것들을 하며 서명호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멈출 수가 있었다. 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갔다. 병원에 입원을 하고 이석민이 펑펑 울면서 서명호를 찾아주겠다고 한 그 날 이후로, 나는 여름에도 아프지 않게 되었다. 지독한 첫 사랑이자 짝사랑이었다고, 이거면 됐다고 생각을 했다. 이제는 서명호를 생각해도 예전 만큼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나마저 서명호를 잊어버리면,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감정이 동시에 들어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 어, 어. 나 지금 가고 있다고. 내가 어제 야근을 얼마나 했는지 아냐? ’

  ‘ 그게 내 탓이냐? 니 탓이지? 암튼 빨리 와. 지하철 개찰구에 몇 명이 들락 날락 거리는지 세고 있을 테니까. ’

 

  에스컬레이터를 날다 시피 뛰어 내려왔건만 스크린도어가 닫힌다는 기계음과 동시에 내 앞에서 가버리는 지하철을 허망하게 바라보다 다급하게 이석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야근이 자기 탓이냐는 말에 할 말이 턱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지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이가 없어서 지하철 스크린 도어만 짜증스럽게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쓰여 있는 시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는 내리고, 흘러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 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숨이 턱 막히며 흐릿해지던 서명호가 떠올라서. 나를 보며 웃던 그 얼굴과,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이 겹쳐 보여서. 사람 많은 토요일 오후 두 시의 지하철 안에서 나는. 주저앉아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명호야. 나 지금 니가 너무 보고 싶어.

 

 

 

  03. 재회.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내가 먹은 나이만큼의 배로 흘렀다.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는 여름이지만, 여름만 되면 서명호에 대한 그리움이 몇 배는 심해졌다. 그리고 우리의 재회 역시 여름이었고. 그리워하던 사람과의 만남이 드라마나 영화와 같이 마냥 설레거나 웅장하지 않았다. 그냥 우연의 연속일 뿐이었다. 우연히 쓴 연차에, 약속 시간에 늦는다는 이석민의 말에,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우연히 부딪힌 사람이 그리워하던 사람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차라리 로또를 맞는 게 더 쉽겠다 싶다. 그냥 우연히 들어간 카페였다. 하필 거기가 약속 장소 근처라서. 카페에 들어가기 무섭게 내게 부딪혀 테이크아웃 잔의 차를 모조리 바닥에 쏟아버린 사람에게 다친 곳은 없냐며 대충 묻고는 바닥을 나뒹구는 종이컵을 주워 들고, 그 컵을 건네면 받아드는 손이 익숙했다. 그리고 들리는 음성은.

 

  “ 김민규? ”

 

 

 

 

  솔직히 내가 서명호를 다시 만난다면 품에 안고 엉엉 울기라도 할 줄 알았다. 현실은 바보같이 어버버 하는게 다였지만. 졸업식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냐고 멱살이라도 붙들고 물어 볼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기껏 생각해놓은 대사도 다 까먹어버려 정적만 이십 분 째 갖고 있었다. 이러다가 쟤 집에 가 버리겠다. 정신 차려 김민규.

 

  “ 명, 명호야. 너 여태 어디 있다가 여기서 ... ”

  “ 아, 나 본가에 좀 다녀왔어. ”

  “ 뭐? 너 본가가 어딘데. 대구? 부산? 제주도? ”

  “ 중국. ”

 

  남이 몇 년 째 속 뒤집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웃으며 중국, 하는데 진짜 카페 한가운데서 울 뻔 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한국 친척집으로 잠시 오게 됐고, 그 김에 고등학교도 한국에서 다녔다 이거라고? 그럼 핸드폰은, 하며 말 꺼내자 한국 번호는 진작 없앴지. 중국에서 한국 번호가 왜 필요해. 내뱉는 말 하나 하나가 다 평온했다. 여기서 평온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나 하나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며 마른세수를 하니 서명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마주쳐온다. 그 눈 마주침 하나에 서운함, 외로움, 그 모든 감정들이 눈이 되어 다 녹아버렸다면 중증 인 걸까 싶었다. 민규, 괜찮아?

 

 

 

  처음 다시 만난 날에는 별 다른 말도 못 하고 헤어졌다. 서로의 근황을 묻는다거나 무얼 하고 지냈냐는 말을 하기도 채 전에 웅웅 울리는 내 핸드폰에 서명호는 바쁜 거 아니었냐며, 어서 일어나자며 당장이라도 집에 갈 기세라 그 마른 팔을 붙들고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번호 좀 주라. 그리고 돌아오는 서명호의 번호와, 연락하라는 말에 심장이 고등학교 일 학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명호야, 나 민규. 응, 민규야. 근데 혹시 수전증? 그런 거 생긴 거야?

 

 

 

  “ 야, 내가 명호 찾아 준 거 맞네. ”

  “ 뭐?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하냐? ”

  “ 내가 안 늦었으면 명호 만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

 

  솔직히 이석민이 하는 말에 틀린 게 없긴 한데 내가 찾은 게 아니라 얘가 찾아 주었다는 것이 아주 거슬렸다. 야. 내가 찾은 거라고. 서명호. 아, 예. 예. 많이 찾으십쇼. 많이. 아니, 이미 찾았다고. 예, 예. 많이 찾으셨네요.

 

 

  [ 명호야, 오늘 바빠? 뭐 해? ]

  [ 오늘 별로 안 바빠.]

  [ 왜? ]

  [ 아니. 나 일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 먹을 까 싶어서. ]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서 첫 만남 이후로는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먼저 물어봤다. 내가 다니는 회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명호의 직장이라 특별한 회식이나 야근하는 날이 아니라면 매일을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명호는 그런 나의 부름에 단 한 번도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을은, 눈 깜짝 할 사이 지나간다. 어느덧 코끝이 시리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지나가는 여름과, 가을에는 명호와 새로운 추억을 쌓았고,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냈다. 빛바랜 것들은 잊은 지 오래였다.

 

 

 

 

  04. 재난.

 

  이별은. 재회의 날보다 더욱 빠르게 찾아온다. 어느덧 해를 넘기고, 이 지독한 추위도 끝을 보이려는 달인 이 월이 다가왔다. 그 동안에 덧칠한 감정들은 잘못 칠한 페인트마냥 손을 대면 벗겨질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 명호야, 오늘 전골 먹자 ]

  [ 나 어제부터 전골이 너무 먹고 싶었어.. ]

  [ 전골ㅠㅠ ]

  [ 전골? ]

  [ 알겠어. ]

 

  매일 같이 먹는 저녁에, 이럴 거면 그냥 장을 봐서 집에서 먹자고 하는 명호의 제안이 있었다. 싫을 것도, 아쉬울 것도 없던 나는 덥썩 알겠다고 했었고, 오늘은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전골 먹을 거면 사케나 소주가 필요하지 않을까. 메신저 창을 닫고 인터넷에 전골 요리법, 전골, 따위를 검색하니 옆 자리 박 주임이 여기 월급 좀도둑이 있네, 하며 한 번 놀리고 가더라.

 

 

  “ 명호야, 오래 기다렸어? 아니, 마트에 갔는데 재료가 너무 많아서.. ”

  “ 아니. 오래 안 기다렸어. ”

  “ 집에 들어가 있지. ”

 

  주인도 없는 집엘 들어가서 뭘 해. 코끝이 빨개진 명호가 이야기 했다. 유독 추위를 잘 타는 명호이기에 서둘러 운전해서 왔더니 나보다 더 일찍 온 명호가 있었다. 짐 달라며 스친 손이 유난히도 차가워서 다소 다급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금방 보일러 켤게. 아냐, 괜찮아. 천천히 해.

 

  명호가 예쁘다며 링크를 보내준 가스버너는 틱틱 소리를 내면서도 쓸모가 있었다. 하얀색의 가스버너위로 어울리지 않는 모양의 냄비를 올리니 이건 또 이거대로 웃겨서 둘이서 킥킥대며 한참을 웃었다. 따뜻한 국물에 알코올도 따뜻하게 들어오자 취기가 제법 빠르게 올라 몇 잔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차가운 물을 홀짝이는게 다였다. 붉어진 명호의 코 끝과 뺨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고 있으면 그 예쁜 얼굴을 기울이며 의문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는데 고등학교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장께가 뻐근하고, 내가 명호를 거북해하는 기분. 저, 명호야, 하며 손을 뻗었다. 거리 계산에 실패한 손은 술병을 건드려 바닥을 적시게 했다. 멍청하게 보고만 있다 정신을 차리고 휴지를 둘둘 말아 흐르는 술 위로 덮었다. 어쩌지도 못하고 바닥에 고개를 박은 채 술만 벅벅 닦고 있자니 내 손등 위로 차가웠었던 명호의 손이 겹쳐 올라왔다.

 

  “ 무슨 말 하려고 했어? ”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면 너무 가까운 거리에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어린 날의 열기를 잊지 않은 눈만 바라보다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거부하지 않는 명호에게서는 스파클라의 불꽃 냄새가 났고, 그 얼굴을 바라보면. 명호는 점점 어려져 내가 처음 보았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서명호로 돌아가 있었다. 아, 명호야. 하고 부르면 명호는 답이 없었다.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으니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기억 사이로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미쳤어, 김민규. 돌았구나. 깨끗하게 치워진 집을 바라보며 이마를 퍽퍽 때리다 다급하게 핸드폰을 켰다. 명호야. 어디야? 카톡을 하나 보내놓고 샤워를 하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명호에게서 답은 없었다. 대화창 옆의 숫자 표시조차 사라지지 않았다. 뭐지 싶은 마음에 몇 개의 연락을 더 보냈다. 명호야.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집은 그냥 두고 가지 귀찮게 뭐 하러 치우고 갔어. 지난번과 다를 바 없는 것들에 고개를 드는 불안함을 애써 무시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중천에 떠있던 해가 산 너머로 뉘엿 뉘엿 넘어가는 시간이 되었어도 명호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애써 보고 있지 않던 불안감은 연락이 없는 동안 차근차근 부피를 키웠고, 그 불안함은 곧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닥쳐왔다. 서명호가 사라졌다. 또. 불안함의 크기만큼, 다가 온 현실만큼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마치 서명호가 어디론가 떠날 거라는 걸, 사라질 거라는 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덤덤했다.

 

  차마 직장에, 집에 찾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감히 붙잡을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럭 저럭 견뎌내며 살아가는 척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회사에 출근하고,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 잠만 자는 삶. 어딘가에 갇힌 것 마냥. 오랜만에 본 이석민은 내 꼴을 보고 기함을 하더라. 김민규 왜 반쪽이 됐어. 하며 어깨를 붙들고 흔드는데 그 행동을 제지 할 힘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도 제일 친한 친구라고 이석민의 목 늘어난 맨투맨을 붙들고 엉엉 울었다. 명호가 또 없어졌어. 석민아, 나 어떡하면 좋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무슨 정신으로 내가 이석민을 배웅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울어 모래가 낀 것 마냥 뻑뻑한 눈을 비비며 냉장고 문을 여니 구석에 보이는 찻잎 봉지에 다시금 울음이 차올랐다. 그렇게 울었는데도 더 나올 물이 있나 신기하다고 자조하며 자취방 냉장고를 붙들고 또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보고 싶어.

 

 

 

  내가 힘들건, 슬프건 상관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겨울에서 생명이 움트는 봄을 지나,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고, 너를 처음 만났고, 너와 재회했던 여름이 다가왔다. 더 이상 여름에 아프지 않았고, 기분이 울적하거나, 행동반경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손톱처럼 자라나는 서명호에 대한 생각을 그치기란 쉽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고 있어도 길게 자라있는 손톱처럼, 내가 하려고 하지 않아도 서명호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방구석 폐인처럼 살고 있는 내가 못마땅한지, 안쓰러운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석민이 소개팅도 몇 번 시켜 줬었다. 잘 된 적도 물론 있었다. 서명호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가 너는 왜 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의 흔적을 찾고 있냐고 하기 전 까지는. 그래서 그 날 이후로 밤마다 울며 너에게 전화를 했다. 무미건조한 신호음 끝에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음만 맴돌 뿐이었지만.

 

  ‘ ... 여보세요? ’

  ‘ 여, 여보.. 여보세요? 명호야? ’

  ‘ 민규야. ’

 

  오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무미건조한 신호음 끝에 들린 목소리가 몇 년을 그리던 한 사람이라는 것 빼고는.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전화를 고쳐 잡고는 무릎을 꿇었다. 명호야. 명호야, 어디 갔어. 왜 그렇게 갔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겨우 나오는 말이라고는 윽윽 거리는 신음이 다였다. 혼자 윽윽 거리며 울고 있자니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숨 소리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오 분을 잡아먹고, 그 이름 석 자 부르는 것으로 또 오 분을 잡아먹으니 겨우 들려오는 응, 이라는 대답에 호흡이 가빠졌다.

 

  ‘ 내,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명호야.. ’

  ‘ 해. ’

 

  이번에는 따라 붙는 이름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아이처럼 엉엉 울고만 싶었다.

 

  ‘ .. 보고 싶어.. ’

  ‘ ... ... ’

  ‘ 나, 나 있잖아.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같아. 명호야. ’

 

  목소리를 겨우 쥐어 짜내어 한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그 침묵을 깨고 명호는 입을 열었다. 민규야. 날 정말 사랑했다면 그 때 이야기 했었어야지. 어젯밤 일을 기억하냐고 물었었던 그 때 이야기 했었어야지. 마치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 하는 명호의 말에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친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졌다. 명호는, 알고 있었다. 아직은 사랑이 두려워 애써 모른 척을 했던 어린 날의 나를 알고 있었다. 너와의 사이가 멀어질까봐 억지로 묻어두었던 그 때의 김민규를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을 깨닫기까지 몇 년이 흘렀을까, 내가 너를 그리워하며 앓았던 수많은 밤 동안 너는 나를 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었구나. 문득 어느 날 명호가 나에게 보여준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너는 나에게 이유였다면 나는 너에게 재난일 뿐이구나. 나는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았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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