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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하고 있는 시간

​W. Salon

  “김민규, 너는 그러니까 포장이사를 깔끔하게 불렀어야지. 친구들 등골 빼먹는다고 이걸 다 짐차로 옮기냐?”
  “내가 여태까지 너희 입사 준비하면서 이사할 때 안 도와줬어? 왜 인제 와서 발뺌인데.”
  “그래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엘리베이터 있으면 뭐 하냐. 짐차가 여기까지 올라오질 못하는데.”
  “이 집으로 전세 계약하라고 부추길 땐 언제고!”
  “그건 친구야, 네가 포장이사를 쓴다는 가정에서 말을 한 거지. 하여간 너 일당 두둑하게 받을 테니까 각  오 단단히 해.”
  “맞아요, 형. 이건 거의 노동력 착취 수준이라고요. 첫 월급 타면 거하게 얻어먹을 거니까 각오하세요.”

  아침부터 시작된 이사는 짐차가 기어코 민규가 살 집에 당도하지 못한 채 어설프게 세워지고 난 후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안 그래도 한겨울이라 코며 발끝이 얼어서 제대로 움직이기도 어려운 수준인데 하필 오늘이 가장 추운 한파가 몰아친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한다. 짐은 적은 편이지만 무게 있는 것들을 옮기다 보니 살살 땀이 나는데 그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강한 바람에 그대로 얼어 버리다 녹기를 반복하기 일쑤라 등 뒤는 따갑기 그지없다. 엘리베이터가 구색이지만 갖춰 있으면 뭐 하나. 성인 한 명과 가구 하나를 옮기면 공간과 무게가 모두 차지해 가구를 다시 옮기기 위해 한 사람은 다시 민규가 계약한 꼭대기 층인 5층까지 움직여야 하니 결국 고생하는 건 매한가지인 셈이 된다. 안 그래도 이삿짐 옮기기가 극악 난이도 일 줄 몰랐던 민규는 도와준다고 자처한 석민과 승관에게 슬슬 눈치가 보이던 참이다. 아직 입사도 하지 않은 회사 첫 월급을 부모님께 반쯤 드리고 나면 남는 게 솔직히 얼마 없을 텐데 그것마저 그들의 입으로 넣어주지 않으면 이사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나가버릴 것을 생각하니 아찔해 민규는 울며 겨자 먹기 심정으로 근처 맛집을 수소문해 일단 1차로 입막음을 하기에 이른다.

  “일단 얼추 옮겼으니까 점심 먹고 나서 나머지 짐 옮기자. 그래도 이삿날에는 중국 음식이지. 뭐 먹을래?”
  “난 깐풍기.”
  “저는 유산슬이요.”
  “야, 야. 나 아직 백수야! 요리 말고 밥을 먹자, 응? 대신 곱빼기로 시켜줄게.”

  큰 눈을 최대한 선하게 뜨고 석민과 승관을 바라봤으나 어림도 없다는 식으로 아직 청소도 덜 한 바닥에 철퍼덕 앉는 두 사람이다. 그리고는 신세 한탄 하듯 민규에게는 시선조차 건네지 않고 그들끼리 말을 시작한다.

  “아무래도 우리 민규 형한테 사기당한 것 같아요. 석민이 형. 이 정도라고는 말 안 하지 않았어요?”
  “당연하지. 짐 몇 개만 옮겨주면 된다고 해서 술 몇 잔에 한다고 한 게 잘못이지. 누군 입사 안 하냐! 나도 며칠 후면 입사라서 마인드 컨트롤해야 하는데 이거 당최 몸이 아파서 될까 몰라. 이러다 입사 초반에 찍히고 괴로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우울해지고….”
  “아, 알았어, 알았어. 깐풍기나 유산슬 둘 중 하나만 골라. 탕수육은 시킬 거야.”
  “깐풍기!”

   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요리 중 가장 비싼 깐풍기를 외친다. 그제야 민규는 자신이 그 둘의 깜찍한 계략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들이 고생한 것은 맞기에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전셋집 계약을 위해 쓴 돈을 제외한 가장 큰돈을 결제한다. 둘은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요리와 음식을 먹어 치우더니 일을 시작하더니만 금세 능률이 올라 이삿짐을 다 옮긴다. 다소 까다로운 민규의 주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짐 정리를 마친 그들은 민규가 저녁을 사준다고 말하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짜 밥을 사절한 채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는 첫 월급날 무조건 연락하라는 어마어마한 메시지를 보내놓은 후 수고했다는 민규의 진심 어린 말에도 답장 하나 없다. 아니 읽지도 않은 모양인지 1 이라는 표시가 사라지지 않는다. 민규는 제법 그럴싸하게 채워진 집을 확인한다. 원룸에서는 자신이 집에서 사는지 짐에서 사는지 알 수 없던 공간은 투룸으로 옮기자 이제야 제대로 된 집을 찾은 모양새를 띄우며 알맞은 자리에 각각 가구며 짐들이 놓여 있다. 집은 확실히 전보다 깔끔하고 커졌으나 외로움도 그만큼 커져 민규는 괜히 다 청소한 방들을 한 번씩 더 들어가 보며 감회를 새로 다진다.

   감회까지 다지고 나니 다시금 밀려오는 허기가 느껴진다. 외로움만큼 진하게 묻어 있는 허기짐에 민규는 음식 배달 앱을 켰다가 이내 끈다. 점심도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채웠는데 저녁까지 그러고 싶지 않다.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민규는 새로 얻은 자췻집 근처 산책 겸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씻는다. 얼음장 같은 날씨이니 머리도 꼼꼼히 말리고 나왔건만 민규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지금은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를 갓 넘긴 시기이고 이 오피스텔은 민규가 입사한 회사의 기숙사라고 불릴 만큼 많은 직원이 상주해 있는 만큼 근처 식당은 24시간이 아니라 거의 점심 장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즉 저녁 시간이 성큼 지나간 지금 연 식당은 드물며 베드타운답게 길거리에는 사람 한 명 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적막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방은 가로등이 있어도 겨울 저녁과 밤을 부유하는 특유의 어둠까지 있어 산책은커녕 걷기도 어렵다. 하물며 꼼꼼히 챙겨 입고 온다고 온 경량 패딩과 롱패딩이 무색할 정도로 한파는 저녁까지 이어져 5분도 채 되지 않아 민규는 나온 것을 후회한다. 겨우 찾은 식당은 화려한 외관과는 별개로 점심 특선 메뉴를 자랑하는 배너가 바람에 흔들흔들하다 이내 푹 볼품없이 쓰러진다. 민규는 괜히 그 배너 끝을 발로 좀 건드리다가 다시 세워두고는 집으로 다시 가볼까? 마음을 먹는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은 그래도 걸을 때마다 보이기는 했으니 간단하게 요기할 레토르트 음식이나 사 오자는 마음에서다. 그러다 문득 민규는 자신이 나온 거리를 되돌아가며 집 앞이 아니라 뒤로 가본다. 아무리 베드타운이기는 하나 분명 24시간 식당 하나 정도는 존재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아니나 다를까. 10분 넘게 삽질한 민규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번듯하게 세워진 24시간 뼈다귀 해장국집이 보인다. 감자탕은 특별히 뼈 추가도 돈을 덜 받는다는 사장님의 푸근한 글씨체로 휘갈긴 안내문이 바람에 휘날리며 위태롭게 문에 붙어 있다. 민규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고마운 안내문을 다시 손으로 꾹꾹 누르며 조금 더 접착력 있게 만든 후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저처럼 늦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온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사장님도 한창 요새 인기가 많다는 드라마를 시청 중이신 걸 보면 말이다. 민규는 흠흠 하며 괜히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럼 사장님은 얼른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고 포근한 모습으로 민규를 맞이한다. 혼자야? 예. 아, 이번에 여기 회사 새로운 직원이 신가 보네. 민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빈자리 아무 데나 앉으려고 하던 찰나 제 뒤로 저와 비슷한 모습을 한 또래 남자가 저보다는 훨씬 익숙한 모습으로 식당에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어, 명호 왔구나.”
  “네, 안녕하세요, 사장님.”
  “응. 가서 앉아. 오늘은 좀 늦었네.”
  “아르바이트하고 오느라고요.”
  “곧 회사 들어가는데 아르바이트를 그렇게 끝까지 해?”
  “아르바이트하겠다는 사람이 내일부터 출근한대서 오늘까지만 했어요.”
  “하여간 명호 너는 참 예의 발라. 혼자 밥 먹기 그러면 저기에 앉은 잘생긴 청년이랑 같이 먹을 테야? 저 청년도 명호 너처럼 곧 저 회사 들어간대.”

  사장님의 따뜻한 친절 (이라고 읽고 약간은 넓은 오지랖이라고 쓴다) 덕에 민규는 저보다 훨씬 말랐으나 눈높이는 엇비슷한 명호라고 불리는 남자와 어설프게 대치 비슷한 상태가 된다. 맞은 편 남자는 민규만큼 큰 눈을 도르륵 굴러가는 소리를 낼 정도로 눈을 굴리더니 잠시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끄떡이며 민규가 앉으려고 한 자리 맞은편으로 앉는다.

  “이 식당 뼈해장국도 맛있는데 감자탕도 맛있어요. 근데 제가 늘 혼자 와서 뼈해장국만 먹었거든요. 혹시 같이 감자탕 드실래요?”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해맑게 웃으며 감자탕 먹자고 하는 이의 말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민규 또한 마찬가지로 주린 배도 있고 뜨끈한 국물을 최대한 많이 먹고 싶은 마음이 들어 바로 주저앉고 고개를 끄떡이자 남자는 한결 편한 모습으로 바로 물을 가져다주는 사장님께 감자탕
 자를 주문한다. 그렇게 벼르고 먹는 것 치고는 양이 적은 게 아닌가 싶었으나 맛을 보장할 수는 없기에 민규는 남자의 주문을 이해하기로 한다.

  “여기 회사 입사하신다고요?”
  “네. 3월 2일에요.”
  “와. 저도요. 부서는 어디인지 실례지만 여쭤봐도 돼요?”
  “개발이요.”
  “헉, 저도요!”
  “그래요?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도 못 했네요. 저는 김민규입니다. 나이는 28살이고요.”
  “저는 쉬망하오, 아니 그러니까 한국 이름으로는 서명호요. 나이는 한국 나이로 그쪽이랑 같고요.”
  “아, 중국인이시네. 저는 한국어가 유창해서 당연히 외국 사람이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눌러앉은 거라 다들 그렇게 착각해요.”
  “눌러앉는다는 말도 알고, 관용적인 표현을 다 아시네요.”
  “술 마시면서 배우면 못 배울 말도 없죠. 와 나왔다!”

  팔팔 끓은 감자탕이 그대로 나오자 안경을 쓴 명호의 시야가 뿌옇게 변한다. 명호는 그런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같이 나온 국자로 제 몫을 조금 덜고는 그대로 국물을 조금씩 마신다. 와, 진짜 맛있어! 오래 본 사람은 단연코 아니지만, 이 사람에게서 이러한 텐션을 일으킬 만큼 대단한 국물이라면 민규도 얼른 맛보고 싶다는 생각에 국자를 가져가 제법 많이 제 그릇에 담는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답답한 명호가 안경을 벗고 길게 늘어뜨린 앞머리를 손으로 삭 넘기자마자 보이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민규의 감자탕 그릇이라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와, 되게 잘 먹는다.”
  “맛있네요. 여기, 진짜. 자주 와야겠다.”
  “모, 모자란 거 아니에요? 우리 뼈 추가할까요.”
  “아니 그것보다 우리 동갑인데 말 놓으면 안 돼요? 회사에서 자주 만날 수도 있는데 어색하게 지내기 싫어서요.”
  “아, 네. 그러죠. 뭐.”
  “그래 명호야. 나 원래 좀 잘 먹어. 일단 먹어보고 모자라면 더 시키든지 하자.”
  “어? 그래 알았어, 그럼. 모자라면 꼭 말해.”

  명호는 다짐받듯 민규에게 말했고 곧 말 한마디 없이 둘 다 밥에 집중한다. 같이 나온 깍두기며 밑반찬도 집에서 하는 모양새 그대로에 맛도 좋아 민규는 점심으로 먹은 중국 음식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앞으로 단골이 될 것 같다는 예감에 기분 좋게 반쯤 먹었을까 맞은편에 있던 명호는 한껏 배가 부른지 배를 두드리며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가지고 와 이모가 내준 찬물과 섞어 마신다. 그래, 중국 사람들은 차 문화라 찬물을 잘 마시지 않는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더 안 먹고?”
  “나 원래 딱 0.5인분만 먹어서. 그래서 감자탕도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으니까 못 시켰었어.”
  “안 먹어봤는데 감자탕 맛있는 건 어떻게 알고?”
  “이사 왔을 때 친구들 데리고 여기 왔었어. 그때 이모가 감자탕 추천해줘서 먹어봤고.”
  “어허, 그렇구나. 나도 오늘 이사 왔는데 친구들 데리고 여기 올 걸 그랬다.”
  “다음에 또 나랑 같이 밥 먹자 민규!”
  “그럼, 당연하지. 이런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에는 반주가 딱 맞는데.”
  “술? 그렇지만 오늘 민규 너 무리해서 술까지 마시면 몸살 나.”
  “그건 그렇겠다, 다음을 기약해야지. 너는 언제 이사 왔어! 어디 살아?”

뭔가 뒤바뀐 통성명에 엉망진창인 자기소개가 이어진다. 그런데도 둘은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공통점 하나로 순식간에 친해진다.

  “여기 바로 뒤에 있는 오피스텔. 나는 두 달 전에 이사 왔어. 졸업하기 전에 기숙사 나와야 해서 일찍 왔지.”
  “어! 나도 거기로 이사 왔는데. 가장 위층이야 505호.”
  “정말? 나는 그 아래층 405호인데.”
  “그럼 우리 앞으로 정말 자주 보겠다.”
  “그러게 자주 보겠네.”
  “두 달 전에 내려와서 아르바이트도 한 거야?”
  “응. 두 달 동안 뭐 할 게 없어서….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내가 먹자고 한 것 먹은 거니까!”
  “같이 내. 내가 훨씬 많이 먹고 있는데.”
  “잘 먹는 모습 보기 좋아 민규.”

  그리고는 신기한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미지근한 물을 홀짝이며 자신이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명호 모습에 민규는 슬슬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낀다. 민망한 나머지 고개를 들지 못하자 명호는 민규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내 사장님께서 보고 있는 텔레비전 속 드라마에 시선을 준다. 덕분에 민규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시래기를 한껏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풉.”
  “웃지 마. 잘 먹는 거 보기 좋다며.”
  “나 방금 텔레비전에서 웃긴 장면 나와 웃은 건데?”
  “방금 다들 울음바다인 장면이었잖아.”
  “미안해, 민규야. 내가 원래 잘 먹는 사람 보면 기분 좋아져서. 내가 잘 못 먹으니까.”
  “나쁜 의미는 아니니까 괜찮아.”

  그렇게 몇 분 더 국자가 오가자 금세 한가득 담았던 감자탕은 바닥을 드러낸다. 사장님께서는 때마침 두 사람 앞으로 따뜻한 매실차를 가져다준다. 보통 여름에는 차갑게 준다는데 겨울이라 일부러 데운 매실차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아휴, 이 청년 진짜 잘 먹네. 이름 외워둬야겠어. 이름이 뭐야?”
  “김민규입니다.”
  “내가 명호 봐서
자 시켜도 좀 많이 줬는데 그걸 다 먹었네. 기특해라.”
  “워낙 사장님 솜씨가 좋으셔서 그래요.”
  “말도 예쁘게 하고. 앞으로 자주 와요, 명호랑.”
  “감사합니다, 그럴게요.”

  명호는 민규가 말리는데도 끝까지 자신이 음식값을 내겠다며 성화라 결국 첫 만남에 얻어먹고 만 민규다. 꼭 다음에는 자신이 한 끼 사겠다는 말을 남긴 민규에게 명호는 감자탕집 문 앞에 놓여 있는 사탕 하나를 까서 민규 입에 넣어준다. 그만 말하라는 뜻 같아 민규는 애써 민망하고 어쩐지 쑥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커피믹스 두 잔을 서둘러 뽑아 명호에게 내민다.

 

  “나 커피 잘 안 마시는데, 민규가 주니까 마실게!”
  “차만 마셔?”
  “그런 건 아닌데 밤에 커피 마시면 잠이 잘 안 와.”
  “잘됐다. 나도 오늘 이사 첫날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우리 집에 와서 게임 할래?”

  마침 아래위층이라 오가기 편하다는 생각에 민규가 말하자 명호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겠다는 명호 말에 민규도 알았다며 얼른 집으로 들어가 아까 닦고 또 닦은 곳인지만 바닥을 물티슈로 다시 한번 닦고는 홈웨어로 갈아입는다.

  “자고 가게?”
  “응?”
  “아니 아예 잠옷 입고 와서.”
  “어차피 바로 아래층이라 이 가운 입으면 티 안 나니까.”
  “어, 그렇지. 들어와.”

아래위 세트인 실크 잠옷에 두툼한 가운을 입고 온 명호에 민규가 단박에 얼굴이 붉어진다. 저도 모르게 자고 갈 것이냐는 말을 건넨 후에는 아차 싶어 명호를 보자 명호는 태연하게 가운을 잘 걸어두며 어깨를 으쓱한다. 무슨 게임 있느냐는 말에 얼른 플레이스테이션을 켜서 게임을 실행시키자 잠시 졸려 보였던 눈빛이 단박에 바뀐다.

  “너 게임을 하는 게 취미야?”
  “아니, 독서. 수필이나 시집.”

  독서가 취미라는 명호의 말과는 달리 눈은 화면에 고정돼 있으면서도 대답도 다 하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무참하게 다운 시키는 명호를 보고 민규는 혀를 내두른다. 슬슬 배도 부르고 따뜻하게 난방까지 한 탓에 졸음이 밀려오는 민규와 달리 명호는 꽤 게임의 열성이다. 더 할래? 어, 그래도 돼? 민규야 잘 거면 자. 내가 정리하고 갈게, 그래도 되지? 마음대로 해. 어차피 훔쳐 갈 거라고는 저 플레이스테이션과 제 몸뿐인 집이라 민규는 침대에 철퍼덕 누워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뜨려다 문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텅텅 비어 있다고 생각한 집에 사람 온기가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놀라울 정도로 몇 시간 전에 만난 명호가 편하게 느껴진 탓이다.

  “너 웃어서 나 이번에 졌어.”
  “핑계는.”
  “아니야, 핑계!”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얼른 한 판 더 해. 스코어 갱신하면 내가 너 밥 진짜 근사한 것 사줄게.”

  그 말에 명호는 이상하게 동기부여가 됐는지 자신이 플레이스테이션 처음 사고 나서 열정적으로 밤을 새워가며 스코어 갱신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래도 근 3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스코어인데 단박에 깨긴 힘들겠지, 싶어 농담으로 던진 말에 명호는 정말? 이라고 되묻고는 민규의 대꾸와는 상관없이 게임에 몰입한다.

  얼마나 잤을까. 커튼을 아직 달지 못해 떠오른 해에 눈이 부셔 저절로 눈이 떠진 민규가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침대에서 일어나자 보이는 것은 어제 봤던 그 동그랗고 작은 뒤통수다.

  “밤새웠어?”
  “응. 아, 100점 모자라서 스코어 업데이트 못 했어.”
  “너도 나만큼 미친놈이구나? 어디 가서 또라이 소리 안 들어봤니.”
  “너만 할까. 스코어 리스트 보니까 정말 꾸준히 업데이트했더라. 대체 게임을 이렇게 하고 어떻게 이 회사에 입사한 거야?”
  “공부 스트레스를 다 게임으로 풀어서 그래. 방학 때 아르바이트 하고 나면 주야장천 게임만 했거든.”
  “나는 그럴 때 책 읽었는데.”
  “그런 애가 반나절도 안 돼서 내 스코어를 코끝까지 따라오다니.”
  “내가 좀 집요한 데가 있어.”

  밤을 새워서 눈이 빨갛게 충혈된 명호는 집으로 가야겠다며 일어나려다가 장시간 앉아 있는 바람에 어지러워 비틀댄다. 민규는 그런 명호를 가볍게 받아들고 그대로 제가 누웠던 자리에 눕힌다. 좀 자고 나가. 밤새고 움직이면 어지러워. 그럼 잠깐만 신세 좀 질게. 민규의 말에 명호는 정말 졸렸는지 그대로 안경을 낀 채 금세 잠에 빠진다. 밤을 새워 약간 부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민규는 명호 얼굴에 씌워진 안경을 조심히 빼주고는 문을 닫고 나와 부엌에서 콩나물국을 끓이기로 한다. 술을 마신 건 아니지만 어제 먹은 얼큰한 감자탕에 속이 얼얼한 느낌이라 콩나물국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참 밥을 하고 차리는 중에 눈이 퉁퉁 부은 채 깬 명호가 문을 열고 나온다. 고작 누운 지 3시간 남짓 지난 시간이다.

  “더 자도 되는데.”
  “괜찮아, 내가 원래 낮에 잘 못 자.”
  “바른생활 사나이가 어쩌다 게임에 빠져서는.”
  “민규가 게임을 하자고 했잖아!”
  “얼씨구?”
  “근데 뭐야. 이거 콩나물국이네.”
  “서명호 혹시 중국 사람 아닌 것 아니야? 자연스러운 화제전환이 영화 뺨치는데.”
  “좋은 국 냄새다. 나도 주려고 이렇게 많이 만들었어?”

   앉으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두벌의 수저와 물을 안고 오는 모습이 퍽 익숙해 보이는 명호다. 누가 보면 우리 집에서 한 달은 산 줄 알겠네. 어차피 비슷한 구조와 가구 배치일 테니 익숙한 것이야 당연한 건데도 괜히 기분이 좋은 민규다.

 

  “틀린 말은 아니라서 할 말은 없네. 앉아. 같이 밥 먹자.”
  “하지만 이건 근사한 한 끼 아닌데.”
  “너 아직 스코어 갱신 못 했잖아.”
  “에이 100점 모자라는데.”
  “나중에 채우면.”

  그리고는 둘 다 또다시 말이 없어진다. 민규의 음식솜씨는 엄마를 닮아 꽤 좋기에 자취할 때도 꽤 요긴하게 쓰였다. 재료만 친구들이 사 오면 앉은 자리에서 뚝딱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반찬과 국이나 찌개가 나오기 일쑤였으니 민규의 집이 아지트처럼 친구들에게 이용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민규는 직장을 위해 터를 옮기게 됐을 때 무척 아쉬움이 컸다. 지금은 그 아쉬움이 단박에 상쇄될 정도로 제대로 된 친구를 만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지만. 적게 먹는다는 명호의 말에 민규 기준으로 0.5인분을 준비해줬는데도 자고 일어나 입이 칼칼한 모양인지 슬슬 숟가락이 느리게 움직이더니만 이내 국에 밥을 말아 먹는다.


  “억지로 다 안 먹어도 돼.”
  “음식 남기는 것 낭비야. 음식물 쓰레기도 골치 아프고.”
  “그건 그렇지.”
  “잘 먹었습니다.”
  “집으로 가서 쉬어. 이제 우리 입사하려면 이틀뿐인데 컨디션 조절해야지.”
  “그래야지. 책 읽어야겠어. 저녁 먹으러 어제 그 감자탕집 다시 갈래?”
  “그럼 이따 저녁에는 뼈해장국 먹어야겠다. 안 먹어봐서.” 
  “좋지.”

  명호가 간 자리는 꼭 든 사람이 없는 자리처럼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깨자마자 나온 게 아닌 모양인지 잠자리도 잘 정돈돼 있고 했던 게임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다. 민규는 그런 점마저 마음에 들어 웃음이 피식피식 난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자 어제보다는 따뜻한 햇볕과 바람이 들어온다. 마치, 봄바람 같다.

  민규가 명호와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은 것을 깨달은 것은 저녁때쯤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낼까 싶을 때였다. 아주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405호 앞에 가서 벨을 누르자 마침 씻고 나왔는지 뽀송해진 얼굴을 한 명호가 보인다.

 

  “너도 이 샴푸 쓰네, 이거 향 좋아.”
  “다음에 1+1행사 할 때 같이 사자. 난 이 샴푸밖에 안 써서.”
“응. 근데 우리 서로 전화번호도 몰라.”
“그러니까. 나도 메시지 보내려다 알았어. 나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저장해줘. 패턴은 0.”
“어, 어.”

  아무리 나를 믿는다고 해도 생면부지 남인 사람에게 이렇게 열려 있어도 되나 싶은 명호였으나 민규도 명호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일찍 열렸기에 개의치 않기로 한다. 자신이 찍은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다운을 받았는지 모를 휴대전화 배경화면은 근사한 풍경 사진이라 민규가 잠시 넋을 빼고 바라보다 이내 제 휴대전화 열 한자리를 입력하자 금세 윙 울리는 제 휴대전화다. 같은 기종의 휴대전화기를 쓰고 있어 어렵지 않게 번호를 저장하고는 그제야 명호의 집을 둘러보면 짐이 제법 많은 저의 집과 달리 꽤 허전한 구석이 없지 않은 집이 보인다.

  “나갈까?”
  “밖에 추울 텐데. 머리 말리고 나가지.”
  “모자 쓰면 돼.”
  “머리 안 말리고 모자 쓰면 찝찝하잖아.”
  “너 기다리니까.”
  “난 괜찮아.”

  그럼 조금 더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명호가 머리 말리는 소리를 들은 채 어쩐지 나른한 느낌이 들어 문에 달려 있던 풍경을 한번 손으로 쓱 훑자 맑은소리가 귀에 닿는다. 나도 사다 둘까.

  “그거 한 개 더 있어. 이따 가져가.”
  “중국에서 산 거야?”
  “응. 아는 분이 풍경 만드는 일 하는데 선물로 몇 개 줬어. 이사 오기 전에 친구들 좀 나눠 주고 이제 한 개 남았어.”
  “고마워. 받으면 바로 쓸게. 오늘 저녁은 내가 산다?”
  “누가 사든 상관없는데.”
  “아니, 꼭 내가 살 거야. 어제 잘 얻어먹었으니까.”
  “오늘 아침은 내가 얻어먹었잖아.”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데 뭐.”
  “나는 요리 잘하지 못해서 그런 밥 되게 오랜만에 먹어.”
  “그래? 자주 해줄게.”
  “착하네, 민규.”

  어제 간 감자탕집은 뼈해장국도 그야말로 대박이라 민규는 석민과 승관에게 집 근처에 아주 괜찮은 뼈 해장국집이 있으니 다음에 놀러 오면 꼭 같이 가자는 말을 보냈으나 돌아온 것은 뷔페 아니면 스테이크만 받는다며 첫 월급을 기다린다는 대답이었다. 어이가 없어 턱을 빼놓고 있자 명호가 왜 그러냐며 물어 대화창을 보여주니 웃는다.

  “나는 이사 도와준 사람들한테 중국 음식 코스로 사줬어.”
“흐익. 그게 다 얼마야.”
  “아르바이트비 반이 사라졌어.”
  “진짜 제대로 얻어먹었네. 나는 그 정도 사줘야 하나? 거기 괜찮으면 나도 소개해줘.”
  “응, 이따 주소 보내줄게. 값이 비싼 만큼 맛이 아주 훌륭하거든. 그래도 민규 콩나물국이 더 맛있지만.”

  그렇게 이틀 내내 이상하게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함에도 둘은 자주 만났다. 일어나자마자 안부 인사를 건네고 끼니때가 되면 자연스레 명호가 먹고 싶은 음식의 재료를 사 와서는 민규에게 부탁하면 민규가 자연스럽게 음식을 해주기도 했다. 결국 입사 전까지 명호는 민규의 스코어를 갱신하지 못해 억울해하며 꼭 다음에는 갱신하겠다 다짐한다.

  그렇게 둘은 이틀 후 개발부라는 공통점을 안은 채 서로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첫 출근을 한다. 출근 첫 4주간은 OT 기간으로 개발 3팀을 차례대로 돌게 돼 있는데 첫 주는 회사에서 사용하고는 프로그램을 배우고 실습하는 기간 및 계약서 작성하는 시간을 갖는다. 나이순대로 배치된 것이 분명한 리스트에서 민규와 명호는 같은 조로 묶여 팀을 순회하기로 한다. 2주째 제대로 된 첫 출근을 하는 전날 밤 둘은 긴장을 하는 바람에 밤새 통화를 하다 다소 헐레벌떡 출근한 탓에 정신이 반쯤 날아가 있었다.

  “김민규, 서명호 신입 직원은 개발 3팀으로 가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개발 3팀으로 향하는 도중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친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힘내고 긴장하지 말자는 눈빛이라 고개를 끄덕인다. 한편 인력난에 힘겨워하던 선배들이 모두 둘을 반겨준다. 그중에서도 신입 직원들을 굉장히 환대하는 것은 책임이다.

  “어엇 두 사람 모두 환영해요. 여기가 김민규씨! 네가 이번 신입 직원 중에 성적으로 탑이라며. 얼굴도 근사하네. 그리고 여기는 서명호씨? 이런. 내가 중국어 잘 못 하는데.”
  “괜찮습니다. 제가 한국어 잘해요.”
  “그러게, 이번에 외국인인데 개발팀 온 건 서명호씨 혼자라던데.”
  “다른 외국인들도 있는데 첫 차출은 접니다.”
  “그러게, 듣던 대로 정말 한국말 잘하는구먼. 코딩도 둘 생긴 것만큼 아주 깔끔하게 하겠지?”

  화통한 책임의 말에 선임이 약간 학을 떼는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안내한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책임님 말을 다 받아주다가는 야근하기 일쑤니 적당히 듣고 넘기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둘은 그렇게 얼은 채로 꼬박 2시간 가까이 출근했으나 안 한 취급을 받게 된다. 신입에 그것도 OT 중인 직원에게 이렇다고 하게 시킬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것처럼 컴퓨터 앞에서 코딩용 프로그램을 띄워놓은 채 하염없이 일거리를 기다린다. 그러다 아주 간단한 코딩이라도 시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닥 해치우자 책임과 수석의 얼굴이 점점 환하게 빛난다.

  “두 사람 모두 우리 쪽에 오면 참 좋을 것 같다, 나는.”
  “과찬이십니다.”
  “생긴 것도 근사한데 코딩은 더 나무랄 구석이 없네요. 간단한 코딩이어도 지저분하게 짜는 녀석들은 다 티가 나서.”
“그러게, 둘 다 비슷한 방식으로 코딩하네요.”
  “같은 학교야? 교수님 같으면 그렇기도 하던데.”
  “아뇨.”
  “그럼 천생연분이고!”

  혼자 텐션이 이만큼 오른 책임의 말에 등에 식은땀이 날 것 같은 민규와 명호를 보고 눈치껏 선임이 두 사람 모두 고생했으니 잠시 쉬고 오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둘은 꾸벅 인사를 정중히 건네고 얼른 공중정원으로 향한다. 듣는 말이 많아 아무리 둘만 있다 하더라도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어 둘 다 오는 길에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만 말없이 홀짝인다.

  “명호야 조금만 천천히 마시면 안 돼?”
  “너무 자리 비우면 눈치 보이니까.”
  “어차피 우리 둘이 가도 할 일없잖아.”
  “쉿.”

 

  쓸데없는 말은 말라 식으로 명호가 민규에게 눈치를 주자 민규는 시무룩해져서는 고개를 땅에 처박는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고 민규에게 말 대신 메신저를 보낸 명호다.

  [저녁에 닭볶음탕 시켜서 소주 마시자.                                   오후 3시 27분]

  메시지를 확인한 민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마치 큰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떡끄떡하자 명호가 그런 민규의 머리를 아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조심스러운 손을 내민 명호도 민규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은지 크게 소리 내지 않고 웃기만 한다.

  시간은 제법 빠르게 흘러 4주간의 OT가 드디어 끝이 났다. 마지막 금요일에는 여태까지 순회한 부서 중 그들을 차출해 뽑아갈 명단이 공개되는 날이라 동기들은 모두 출근 날부터 긴장감이 서려 있다. 꽤 많이 뽑힌 인원 중 OT에서 점수가 좋지 않은 동기들도 몇 있다고 들어 민규와 명호는 둘 다 더욱 긴장한다. 첫날 자신들을 안내해 준 인사과 직원이 다시 그들을 향해 지문인식이며 출근 카드를 임시가 아닌 정식으로 배부한다. 그리고 OT 점수가 낮은 몇 명을 호출해 따로 상담하고 나면 드디어 부서 부서가 정해진다. 개발 1, 2팀도 좋은 부서였으나 너무 적막한 부서도 있었고 반대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부서도 있었기에 둘은 내심 처음 갔던 개발 3팀에 배정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민규, 서명호 직원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정식으로 개발 3팀에 출근합니다. 두 사람 모두 그쪽에서 가장 평가가 높았습니다.”

  말 많고 능구렁이 같던 책임은 사실 속 빈 강정이 아니라 속이 꽉 찬 드럼통이었구나! 싶은 민규가 기분 좋은 나머지 일어나 환호를 하려다 OT 내내 붙어 다녔어도 서로 다른 부서로 갈라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주먹을 꽉 쥐고 좋아하자 옆에 앉았던 명호가 그런 민규의 주먹 위로 자기 주먹을 올리고는 콩 맞부딪친다. 가장 분위기가 좋던 곳으로 가는 것도 좋은데 실로 가장 좋은 것은 가장 편한 동기와 같은 곳에서 근무한다는 것이다.

  “퇴근 전에 각자 배정된 부서로 가서 짧게 OT 들으시면 됩니다. 부서별 선임이 잘 안내해줄 거예요.”
  “네.”

  민규와 명호처럼 같은 부서가 되어 좋아하는 동기들은 한껏 웃은 채 컨퍼런스 룸을 나섰지만, 대부분은 풀이 팍 죽거나 울먹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나갔기에 민규와 명호는 적당히 눈치껏 가장 늦게 자리를 빠져나가며 잠시나마 소회를 나눈다. 개발 3팀에 가기 전 회사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들러 부서 팀원의 취향대로 커피를 사 들고 가자 다들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외근을 나간 수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리를 지켜 그들을 환영한다.

 

  “내가 그랬잖아. 무조건 이 둘은 우리 팀원이라니까!”
  “앞으로는 OT 기간처럼 수월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잘 부탁하고.”

  첫 주에 봤던 모습 그대로 그들을 환대해주는 책임의 음성에 귀가 약간 따가운 두 사람이지만 옆에서 이를 제지하는 차분한 선임의 말에 상쇄되는 기분이다. 신입직원이 두 사람이나 와서 확실히 인력난이 해결돼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책임은 법인 카드가 아닌 자신의 카드를 내밀며 한껏 외친다.

  “자리 비운 수석님 대신해서 내가 오늘 한턱낼까 하는데 어때요!”
  “안 됩니다, 수석님이 오늘 회식 자기 빼고 하지 말랬어요.”
  “그때도 하고 지금도 하면 안 돼?”
  “네, 안 돼요 책임님. 수석님이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쳇. 오늘 같은 날 회식 없는 게 말이 되나. 우리 민규씨랑 명호씨 아쉬워서 어떡해.”
  “책임님 말고 여기에서 아쉬워하는 분 아무도 없어요. 제발 집에 들어가세요. 또 어머니께서 저한테 전화하시게 하지 말고.”
  “너랑 내가 자그마치 5년인데 이렇게 정 없이 굴기야?”
  “책임님은 저랑 5년에서 끝나고 싶으신가 봐요.”
  “우리 모두 퇴근합시다. 정시에 퇴근해야지, 금요일인데.”

  선임의 말에 바로 꼬리를 내리며 책임이 다시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재킷을 들어갈 준비를 하자 선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 사람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민다. A4 용지로 세 장짜리인 인수인계서에는 첫 주에 선임에게 배운 것들이 문서로 잘 정리돼 있다. 집에 가서 읽어 보고 모르는 내용 있으면 언제라도 밑에 연락처로 연락해요. 두 사람 연락처는 이미 제가 인사과에서 받아 있으니까. 군더더기 없는 선임 말에 알았다 두 사람 모두 대화를 마치고 회사를 나섰을 땐 아직 겨울이 덜 가신 저녁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규와 명호는 이제야 제대로 된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다. 이대로 가기는 아쉬운 것은 분명하나 둘 다 몸이 따라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명호의 집에서 배달 음식이나 시키고 반주나 하자는 의견으로 모인다. 퇴근길에 민규가 배달음식 앱을 통해 시킨 후 각자의 집에서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만나기로 한 것은 약속처럼 정해진 일이다. 오늘도 민규는 명호의 집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온다. 누가 보면 자기 집인 줄 착각 할 정도로 저의 집 비밀번호보다 더 익숙한 비밀번호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 순간 명호가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누군가와 중국어로 길게 통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울었는지 약간은 잠긴 목소리까지 들리자 쿵 마음이 내려앉는 느낌도 든다. 통화를 방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민규가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때마침 도착한 배달음식 도로 가지고 제집으로 향한다. 누군가와 통화하기에 그런 얼굴이었을까. 무척 소중한 사람과 통화는 분명한 모양이다. 저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화사한 미소가 눈에 선하게 비친다. 먹을 준비를 다 해놨는데도 좀처럼 명호에게 연락이 없다. 혼자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명호에게 전화가 온다.

  “왔다 갔지?”
  “응. 너 통화 중이라서 다시 올라왔어.”
  “씻고 올라갈게. 미안.”
  “괜찮아, 천천히 와.”

  어쩐지 속이 싸하게 아려온다는 생각이 든 민규가 선택한 것은 차갑게 보관하고 있던 맥주와 소주다. 최근 들어 와인에 취미를 붙인 두 사람이지만 마라탕에 와인은 좀 안 맞지 않을까 싶어 선택한 것이다. 먹음직스럽게 차려놓은 음식보다 자꾸 쓴물이 내키는 까닭을 저도 알 수 없어 민규가 못 참고 소맥을 한 잔 말아 꿀떡꿀떡 삼킨다. 싸한 뱃속만큼이나 이상하게 시큰거리는 명치끝에 체한 것도 같아 다시 한번 소화제 겸 소맥을 연거푸 마시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못 먹는 술은 아니지만, 긴장을 한 탓에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거의 빈속에 들이킨 술이라 술이 쉽게 오르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먼저 먹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이제 막 마라탕 국물 한술 뜨려는데 명호도 민규처럼 저의 집 비밀번호를 아무렇지 않게 눌러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먼저 먹고 있지 왜. 아, 뭐야. 술을 먼저 마셨어? 속 다 버린다, 김민규.”
  “아니 그냥 갑자기 술이 확 당겨서. 잘 통화했어?”
  “응, 응. 어머니께서 오늘 부서 배정되는 것 알고 궁금해서 전화하셨더라고.”
  “아…. 어머니셨어?”
  “응, 어머니. 그럼 누군 줄 알고? 내가 중국에서 이렇게 길게 통화할 사람 누가 있다고.”
  “아니 뭐 친구라든지….”
  “내가 그렇게 중국에 친구가 많았으면 퍽 너랑 계속 다녔겠다.”
  “뭐!”
  “밥 먹자고, 밥. 여기 마라탕이 제대로야. 언제 너 휴가 때 중국 우리 집 가서 우리 엄마가 해주는 마라탕 먹어봐야 하는데. 정말 기막히거든.”
  “이번 해는 눈치 보여 안 되고 내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밑에 신입 들어와야 가능한 것 아니야?”
  “3년이나 기다리라고?”
“못 기다릴 것 뭐 있어. 계속 다닐 회사인데.”

  민규는 가끔 이렇게 아주 끝 모르게 벅차오를 때가 있다, 명호의 말을 들으며. 한국어가 아주 다소 부족한 명호는 배운 표현을 돌려 하지 않고 그대로 할 때가 대부분인데 그 표현이 가끔은 민규의 마음을 제대로 적중할 때가 많기에 때로는 대신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언젠가`라는 막연한 표현보다 3년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해 알게 모르게 둘의 사이를 명명해주는 명호의 말에 뿌듯함마저 느껴진다.

  “소맥 혼자 마신 벌로 오늘 너희 집에서 게임 하다 갈 거야.”
  “언제는 안 그랬냐.”
  “어제는 안 그랬는데.”
  “대신 통화를 엄청나게 길게 했잖아.”
  “그랬지 참. 생각해보니까 너 아니면 난 붙어 다니는 사람이 정말 없어.”
  “난 안 그런가 뭐. 동기들이랑 식당에 가서도 나 챙겨주는 건 서명호 뿐인데.”
  “그건 네가 하도 덜렁거려서 그렇잖아. 수저 갖다준다고 하다가 물 엎지른 게 한두 번이어야지. 전에는 고깃집에서 양념장 가지러 간다고 했다가 까먹고 상추만 잔뜩 가져오고.”
  “물 엎지른 건 몰라도 상추 그건 자꾸 사람들이 말 시켜서 그래.”
  “그래, 나도 너 잘생긴 거 알아, 김민규.”

  어쩐지 마라탕에 있는 건더기를 건져 먹는 손이 신경질적으로 변한 명호가 아직 0.5인분의 반도 먹지 않았는데 술을 찾는다. 술을 안 마시는 건 아니지만 밥 먹다 반주로 술 마시는 걸 그렇게 즐겨하지 않는 명호라 술은 술대로 나중에 따로 마시기에 다시 맥주와 소주를 냉장고에 넣어두려던 민규가 서둘러 소맥을 제조해 명호에게 내민다. 그 얇은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소맥을 한방에 털어먹은 명호가 인상을 찌푸리자 민규는 명호의 미간을 손으로 펴준다. 그런 민규를 본 명호가 잠시 민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쳐다보다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왜 웃는지는 몰라도 인상 찌푸리는 것보다 웃는 것이 예쁜 명호이기에 민규도 덩달아 같이 웃자 명호가 그런 민규에게 장난삼아 혀를 내밀며 메롱 하고는 놀린다.

  술까지 얼큰하게 먹고 나니 속이 얼얼함과 동시에 쓰리기까지 해 둘은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한다. 명호는 찬 음식을 잘 먹지 않아 웬만해선 아이스크림은 잘 먹지 않지만, 천천히 먹으면 괜찮을 것 같다며 같이 편의점으로 나선다. 아직 추위가 덜 가셨기에 둘은 편의점 한구석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돌아오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민규는 퇴근 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휴대전화가 이제야 생각났으나 별일 있겠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민규야아아아~!”
  “형, 어디 다녀와요. 우리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던데?”
  “요 앞 편의점. 산책 겸.”
  “형 술 마셨구나. 잘 됐다, 석민이형도 술 잔뜩 마셔서 지금 난리 이런 난리가 없어요.”
  “왜? 아, 일단 들어가자. 명호야 너도 들어와.”
“아니, 나는 괜찮은데….”
“스코어 갱신한다며. 오늘이 기회다, 나 한판도 못 할 것 같거든. 문 좀 열어주라.”

  한쪽 어깨에는 울며 매달리고 있는 석민이 있는데도 거뜬하게 명호를 제집으로 밀어 넣는 괴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민규 성화에 따라 승관도 같이 집에 들어선다. 다행히 다 치우고 나갔기에 엉망인 집은 아니지만, 곧 엉망이 될 집을 생각하니 민규는 한숨이 나온다. 석민은 민규와 달리 더 밝은 대신 심약한 부분이 존재했으나 자신이 의지하는 사람 이외에는 크게 드러내지 않는 점이 있었다. 후배 중에서도 가장 친한 승관에게 털어놨어도 털어지지 않는 걸 민규에게 기댈 정도라면 회사일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냉장고에 있는 소주와 맥주를 있는 데로 꺼내자 명호의 눈이 처음 봤을 때처럼 커진다.

  “얘네 둘 다 술 잘 마셔서. 아마 이거 가지고도 모자라서 더 사와야 할 거야.”
  “내, 내가 가서 사와?”
  “네가 왜. 마시지도 않을 거잖아. 우리 신경 쓰지 말고 게임 해. 근데 아마 신경 쓰일 거야….”

 

  명호는 그때까지만 해도 민규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몇 시간 안에 깨닫게 되고 만다.

  석민은 술이 좀 취한 상태였는데도 말을 하면서 깨는 타입인지 자신이 한 달 내내 회사에서 당했던 갑질과 부조리에 대해 조리 있게 말을 했다. 처음에는 스코어 갱신에 정신이 빠졌던 명호도 점점 석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어느 순간 조이스틱은 저기로 두고는 승관과 민규와 석민이 있는 자리로 슬금슬금 궁둥이를 옮겨 앉게 됐다. 게임 재미없냐는 민규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승관이 오며 사 온 과자를 안주 삼아 먹는 것을 보고 과자를 처음 몇 개 뺏어 먹다가 석민이 명호를 발견해 통성명한 후 가장 자기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는 명호를 알아채 이제는 거의 명호와 일대일 대화에 이른다.

  “명호야, 네가 생각해도 그 꼰대가 잘못한 거 맞지, 그렇지?”
  “맞네. ‘네’라고 대답했으면 됐지 왜 그거 가지고 그러는 거야?”
  “네라고 온점을 안 찍고 메시지를 보내서 그렇대. 왜 메신저 예의가 그 모양이냐고 호되게 혼났다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안 했으면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가 봐. 후배한테 화풀이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걸 보니.”
  “맞아. 나한테 화내기 전에 차장님한테 엄청나게 깨지고 왔거든. 그래서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나 봐.”
  “응. 그건 진짜 나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다 나쁘게 생각할 거야.”
  “휴, 명호 네가 얘기 들어 줄 줄 아는구나. 우리 그럼 이참에 전화번호 교환하지 않을래?”
  “형, 저도요 저도.”
  “대체 너랑 승관이는 누구 후배인 거야….”
  “이렇게 인맥 늘려 가면 좋죠. 뭐. 저도 이번 연도가 마지막 학기인데.”
  “승관이 너 우리 회사 지원 준비하지 않았어? 나한테 족보도 다 가져갔잖아.”
  “그게 뜻대로 되나요. 뭐.”

  말은 그렇게 해도 입학할 때부터 우리 회사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인턴까지 마친 승관이기에 별 무리 없을 거라는 걸 이제 명호마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당사자는 불안하긴 할 것 같아 민규는 말없이 술을 건네 짠하고 잔을 부딪친다.

 

  “둘은 뭐 같이 사는 거예요? 아까 보니까 민규형네 집 비밀번호 명호 형이 누르던데.”
  “자주 왔다 갔다 해. 내가 아래층 바로 살아서.”
  “신기하다. 민규 형이 아무리 우리 자주 집에 들여보냈어도 비밀번호까지는 안 알려줬는데.”
  “알려주면 너희가 집을 다 어지럽혀서 그렇잖아.”
  “깨끗하게 치우고 가도 그러잖아요. 민규형이 되게 외향적인 사람이긴 해도 낯은 가리는 편이라.”
  “역시 술이 모자라네. 승관아, 가서 술 더 사 와라.”
  “저 여기 지리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와요!”
  “내가 가서 사 올게. 술도 좀 깰 겸.”
  “나도 명호 따라갈래!”

  한바탕 쏟아냈더니 마음이 어느 정도 달래진 석민이 말없이 술 대신 과자를 먹다 명호가 나가려고 채비하자마자 자신도 나가겠다며 긴 팔다리를 휘적거린다. 그런 석민에게 옷을 입혀주며 명호가 데리고 나가자 순식간에 적막해진 집이다.

  “엄청 친한가보다, 명호형이랑.”

  한참 과자를 먹던 승관이 같이 과자를 먹던 민규를 향해 말한다. 뭔 뜬금없는 말인가 싶어 별다른 생각 없이 민규가 승관에게 답한다.

  “그렇지 뭐. 같은 부서도 됐고 한 달 내내 고생 같이해서.”
  “아니 그러니까 우리처럼 마냥 친하다기보다는 뭔가 거리감이 없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다른가.”
  “다르지 않아요? 아까 말한 비밀번호도 그렇고.”
  “어차피 자주 드나들 것이라 알려준 건데.”
  “그건 애초에 형이 집에 없을 때 누군가를 자주 드나들게 할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야 하는 거고요.”
  “너희한테도 알려줄 수 있다니까?”
  “에이, 나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아요. 부담스럽잖아요.”
  “아….”

  장난삼아 승관이 말한 대답에 민규는 기분이 이상하다는 걸 느낀다. 그러게, 왜 우리는 여태 비밀번호를 공유하면서 서로 당연히 그걸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민규는 명호가 먼저 저의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자신이 없을 때 혹시 자기 집에 들어올 일 있으면 개의치 말고 들어오라는 것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곧 자신도 명호에게 저의 집 비밀번호를 알려준 사실도. 그 누구도 그 과정에 대해 의문 하나 품지 않았다. 대체 왜 그랬을까. 정말 제 말대로 앞으로 자주 드나들 것이 뻔해서 그랬다고 해도 둘은 엄연히 타인이며 한 달 전에는 서로의 존재도 모르던 남이었는데.

  “석민이 잘 것 같은데, 좀 도와줄래?”
  “나 명호랑 얘기하면서 잘래~”
  “응, 그래. 그러자, 그러니까 침대에 가서 눕자?”
  “안 돼! 내 침대 말고 내가 바닥에 요 깔아줄게. 거기에 눕혀.”
  “맞아요, 민규형 절대 남한테 침대 안 내주잖아.”
  “어? 그래?”
  “명호 형은 자본 적 있어요?”
  “어? 어, 그게….”
  “명호야 석민이 나 줘!”

  후다닥 장에서 이불과 요를 한데 꺼낸 민규가 석민을 부축해 덜덜 떨리는 팔에서 석민을 떼어낸다. 그리고는 조심히 베개까지 괴어주며 눕힌다. 민규는 기본적으로 성정이 다정다감하기에 이런 행동이 특별한 것이 아님에도 확실히 한 달 정도 안 자신보다 석민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민규가 하는 행동이 자연스러워 눈을 떼지 못하는 명호다.

  “알아차리셨겠지만 석민이 형이 너무 착해서 가끔 이렇게 안 터트리면 안 되거든요. 그때마다 민규형이 저렇게 많이 도와줬어요. 익숙해 보이죠?”
  “응, 그래 보여.”

  승관이 두 사람에게서 눈을 못 떼는 명호의 시선을 돌리려 사 온 것들을 한데 풀곤 명호에게 과자를 입에 넣어주자 그제야 민규가 석민을 수발하는 것에서 눈을 어렵사리 뗀다.

  “명호야, 미안한데 나 물티슈 좀 가져다주라. 이석민 이놈 자식 뭐 먹으면서 왔어? 얼굴에 뭐 이렇게 다 묻었냐.”
  “오면서 속 울렁거린다고 아이스크림 먹었어. 잠깐만.”
  “방에 있는 것 다 써서 새로 꺼내 와야 해.”
  “아니 그걸 명호 형이 어떻게 알….”
“응, 내가 가서 가져올게.”

  명호가 익숙하다는 듯 찬장 어딘가에 있는 물티슈를 꺼내와 몇 개 뽑아 민규에게 내밀자 민규가 그런 석민의 얼굴을 세수시키듯 닦아준다. 그제야 명호는 자기 손에도 석민이 먹던 아이스크림이 묻은 걸 확인하고 쓱쓱 닦는다. 한참 그런 명호를 바라보던 승관이 약간은 술기운이 오른 채 명호를 향해 정말 궁금하고 신기한 듯 말한다.

  “진짜 신기한 거 알아요? 민규형은 집에 놀러 오게는 해도 절대 자기 물건에 손 못 대게 해서 어디에 뭐 있는지 잘 몰라요. 근데 형은 그걸 다 아네요.”
  “자주 드나들어서….”
  “둘 다 뭘 물어도 대답이 같다는 것도 신기해요…. 아, 이제 나도 졸리다, 좀 자야겠어요. 페이퍼 쓰고 바로 석민이 형 호출로 술 마시다 온 거라 정말 피곤해요. 형도 졸리면 자요.”

  승관은 그대로 엉금엉금 기어 석민 옆으로 가더니 잠에 빠진다. 이제 남은 것은 명호와 민규 뿐이다. 민규는 잔뜩 어지럽혀진 방을 치울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숨을 푹 내쉰다. 너 좀 쉬어, 나는 얼마 안 마셔서 이제 거의 다 술 깼어. 명호 말대로 민규는 석민의 얘기를 들어 주느라 꽤 마셨기에 사실 지금 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술이 오른 상태였으나 명호는 찬 바람을 쐬고 온 탓인지 술기운이 많이 가신 상태다. 익숙하게 오피스텔에서 정한 원칙대로 분리수거를 하며 치우는 모습이 너무 익숙해 술기운에도 민규는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온다. 아, 정말 순식간이구나 이 모든 게. 무언가에 익숙해지고 빠지고 하는 것. 주어가 굳이 없더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 미묘한 기분.

  “민규야 나까지 자면 방 넘칠 것 같아서 나는 우리 집 가서 잘게, 너도 얼른 누워서 자. 술 더 오르기 전에.”
  “어, 그래, 하하, 흐흐, 그래야지.”
  “왜 실없이 웃어?”
  “실없다는 말도 알아? 모르는 표현이 없네, 서명호.”
  “웬만한 건 다 알지.”
  “그래, 넌 웬만한 건 늘 잘 알더라, 나보다도. 그지 명호야?”
  “술 취했어? 진짜 자야겠다, 너.”
  “응, 자야지, 잘 거야 진짜.”

  그리고는 침대에 눕더니 그대로 코를 골며 자는 민규를 보고 명호는 민규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그리고도 꽤 한참, 명호는 민규를 바라만 보고는 집을 나선다.

  그 후 종종 넷의 모임이 지속됐다. 한 달에 한 번씩 발작처럼 터지는 석민의 푸념을 익숙한 듯 세 사람이 들어 주다가 여름이 지나자 졸업에 집중해야 한다며 승관이 빠지고는 곧잘 세 명이 뭉치기도 했다. 그러다 석민이 어느덧 회사에 익숙해지고 나니 달마다 있던 모임은 슬슬 몇 달만의 한 번으로 줄었다. 그만큼 명호와 민규도 개발팀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무슨 결혼을 봄이 아니라 한겨울에 낭만적으로 하는지.”
  “그것도 제주도라면서요.”
  “항공권 줄 테니까 올 사람은 오라고 했는데 난 못 가요, 주말까지 제주도 다녀오면 너무 내 시간 없어요.”
  “우리 팀에서 나랑 한 명만 더 가면 될 텐데 혹시 가고 싶은 사람?”

  개발 1팀 수석님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도 낭만 있게 제주도에서 야외 결혼식. 가뜩이나 제주도라 찬바람이 꽤 심한 겨울인데 야외 결혼식을 굳이 하는 까닭은 실은 아내 될 사람이 제주도에 살아 식을 제주도에서 올려야 하는데 수용인원을 다 채울 식장을 마땅히 못 구했단다. 야외라고 해도 춥지 않을 거라는 수석님의 말이 있었으나 선뜻 제주도에 주말을 투자하면서까지 가기는 다들 애매한 모양인지 다들 나서지 않는데 무슨 생각인지 민규가 번쩍 손을 든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어? 뭐 갔다가 식 보고 뷔페 먹고 바로 오는 거라 오래는 안 걸리기는 하는데. 나도 골프 라운딩 약속 오후에 있어.”
  “네. 갔다가 본가에 좀 들리고 해야겠어요, 본가 안 간 지 오래라.”
  “그래, 그럼 개발 1팀 수석님 아들 결혼식은 나와 민규씨가 가는 걸로 명단 올릴게. 차 대절 해서 가야 하니까 시간 잘 맞추고.”

  뜻밖의 민규 행동에 옆에 있던 명호가 눈이 커졌으나 민규는 그런 명호에게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말이 없다. 하긴, 결혼식 가는 거야 자신의 선택 문제이지 꼭 둘이 같이 의논하고 결정할 문제는 아니긴 하다만 이 헛헛한 마음은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주말에는 늘 같이 넷플릭스 켜두고 하릴없이 영화를 보거나 머리 썩는 것 같다고 부러 자막도 없이 원화로 영화를 보기도 하며 시간을 때운 두 사람이다. 가끔은 너무 집에만 있는 것 같다며 회사 뒤에 있는 야트막한 산에 오르기도 하고 새로운 게임을 받아다 게임을 밤새 한 적도 있다. 갑자기 텅 비어버린 상대 없는 주말을 뭐 하고 보내야 하나 명호가 생각이 많아지는 동안, 민규도 생각이 많아지기는 마찬가지다. 주말마다 약속하지 않고도 온종일 붙어 있는 저와 명호는 365일 중 거의 360일 이상을 붙어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득 그런 일상에 변화를 주면 우리 둘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그것 또한 문득 궁금해져 버린 것이다. 기실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다.

  “본가 간다는 말 없었잖아?”
  “엄마가 어제 전화하셨어. 집에 한번 들리라고. 겨울옷도 가져와야 하고.”
  “아…. 그랬어?”
  “너도 오랜만에 나 없이 주말 잘 보내, 온전히 네 시간으로.”
  “그래야지. 근데 이상하다, 기분이 좀.”
  “왜?”
  “항상 붙어 있던 사람이 없어서.”
  “오랜만이라 두근거리지 않을까?”
  “너는 그래? 두근거려?”
  “모르겠어.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두근거리는 게 맞는 거야. 안 두근거리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약간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 가는 내내 말이 적던 명호는 모레 잘 다녀오라며 전에 보니 롱패딩 솜이 죽은 것 같으니 꼭 재충전해서 가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어차피 거의 실내에서 있을 거라 패딩 입고 갈 생각 없다고 하니 화들짝 놀라며 감기에 걸린다고 야단이다. 사실 철마다 기온이 바뀌면 앓는 것은 제가 아니라 자신이면서. 알겠다고 솜도 꼭 재충전해서 가겠다고 하자 안심이 된다는 듯 말을 더하지 않고 조용히 길을 걷는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랜만에 편안한 정적이 감돈다. 평소 조용한 걸 좋아하는 명호이나 민규는 반대여서 민규가 먼저 말을 걸고 할 때가 많았는데 제주도 갈 생각에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가 많은지 좀처럼 말이 적은 민규를 보고 명호는 더 입을 꾹 다문다.

  주말이 되어 오랜만에 묵혀둔 정장을 꺼내고 볼품은 없으나 확실히 따뜻한 롱패딩을 꺼내 입었으나 어쩐지 허전하다. 어디 외출할 때도 세트처럼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인지라 혼자 외출이 어색하게마저 느껴진다. 어제 솜을 재충전하러 갈 때도 백화점에 같이 가서 푸드코트에서 저녁까지 해결했다. 눈을 뜨면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 같이 있는 상대가 옆에 없다는 게 이렇게 허전할 줄이야. 같이 갈 수석님의 연락이 오자마자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회사까지 태워다주겠다며 차를 가지고 오셨다. 민규는 명호에게 갔다 오겠다는 말도 못 전한 채 떠난 게 마음에 걸렸으나 얻어 타는 차인데 휴대전화 꺼내기가 조심스러워 일단 탑승 전에는 연락해야겠다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이게 쉽지 않다. 워낙 대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함부로 행동하기가 조심스럽고 번잡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결국 제주도에 도착해 식을 치르고 뷔페에서 다른 팀 수석들을 잔뜩 만나 어깨가 굽어질 정도로 인사를 하고 나서야 민규는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김포공항인 자신을 발견한다. 오후를 넘긴 시간에 명호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아주 실컷 낮잠이라도 자나. 원래 낮에 잘 못 자서 일찍 깨어 있을 텐데. 그 좋아하는 명상을 하고 있나? 아니면 저 말고 다른 동기와 함께 점심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외국인이라는 같은 카테고리의 동기들과도 제법 잘 지내는 명호이기에 가능한 상상이다. 먼저 연락해? 말아. 마치 사귀기 전 간지럽게 연락을 주 받아야 하는 밀고 당기기의 처지에 놓인 것처럼 괜히 많은 생각이 든다. 한참 빤히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머니께 연락이 온다. 왜 오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어쩐지 기운이 쭉 빠진다는 생각에 민규는 보이는 택시를 잡아 올라탄다. 명호가 옆에 있었다면 헛돈 쓴다며 잔소리를 해댔을 것이다.

  “자고 가니?”
  “그럴게요.”
  “웬일이래. 자췻집에 뭐 맡겨놓은 것처럼 시간 없다며 가던 녀석이.”

  의외라는 듯 오면 바로 주려고 한 모양인지 담으려던 반찬통을 도로 제자리에 두는 엄마다. 참 이럴 때 보면 민규는 저 자신이 얼마나 무심한 사람인가 생각하게 한다. 남들은 모두 다 다정다감하다는데 가족에게는 그러기가 영 쉽지 않으니.

  “내가 그랬어?”
  “기억 안 나는 척하지 마. 너 헛짓 하는 것 아니지? 집에도 못 오게 하고.”
  “오세요, 언제든. 우리 집 비밀번호도 이참에 알려줄까?”
  “됐다 얘. 비밀번호까지 알면 내가 네 집 살림 다 해줘야 할 것 같잖아.”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뭐를?”
  “비밀번호 알면 부담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래. 아들이어도 사생활은 존중해야지.”

  부모조차도 호오가 갈리는 일에 너는 어쩌자고 덜컥 그렇게 금세 나에게 모든 것을 열어주었나. 나 또한 왜.

  움직이며 시간을 소비한 것 빼고는 집에 와서 할 거라고는 자췻집에서 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늘어지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거나 잠시 낮잠을 자거나. 누워 깨면 당연하게 보일 자그맣고 동그란 통수가 없어 허전하다 싶은 것도 신기한 일이다. 부러 의식하지 않으려 휴대전화를 저 멀리에 두었어도 어쩐 일인지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민규가 안절부절못하고 휴대전화를 가만 두지 못하자 엄마는 가만히 좀 있으라며 혼을 낸다. 그런데도 민규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 거면 그냥 네 집 가.”
  “아니야.”
  “뭘 아니야. 너 바른대로 말해. 혹시 사귀는 사람 생겼니? 그래서 그 사람 연락 기다려?”
  “그런 거 아니야. 회사에서 연락이 올 것 있는데 안 와서 기다리는 중이야.”
  “그래? 우리 아들은 회사 일이 참 좋나 보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면서 일거리를 기다릴 정도면.”
  “안 되겠다, 엄마. 나 그냥 갈게요. 어차피 집에 있어봤자 늘어지기만 하고.”

  휴대전화 액정을 켜자마자 보이는 것은 명호의 메시지다. 별다른 바 없는 메시지인데 그 메시지가 자꾸 눈에 밟힌다.

[결혼식 잘 다녀왔지? 혼자 있는 시간 방해 할까 봐 일부러 연락 안 했어. 잘 지내고 주말 지나서 봐. 오후 9시 12분]

  메시지 하나에 흔들리는 마음이라면 지금 해야 할 것은 생각을 실행하는 것이다. 민규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부엌으로 가서 밑반찬 싸둔 것을 제 짐 안에 넣는 엄마가 보인다. 민규는 놀란 눈으로 그런 엄마와 반찬을 번갈아 본다.

  “안 그래도 반찬 미리 싸놨어.”
  “내가 갈 줄 어떻게 알고?”
  “너 하는 것 보면 안 가는 게 이상해.”
  “아부지한테 얼굴 못 뵙고 가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아서라, 오늘 골프 라운딩 끝나고 숙소에서 자고 오셔. 저 자식 내 말은 듣기나 하고 간 건지.”

  인사만 겨우 하고 눈썹 휘날리게 가는 아들 보는 엄마의 등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으로 들썩거린다.

  마음은 급하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지하철 타고 가니 어느덧 한밤중이다. 이제 와 왔다고 표시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라 애매해서 명호의 집 앞에 아무 생각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문이 갑자기 확 열린다.

  “너 뭐해 김민규?”
  “어? 아니, 그게.”
  “왔으면 번호 누르고 들어오던가, 할 말 없으면 도로 집으로 가던가. 사람 신경 쓰이게 왜 문 앞에서 있는데.”
  “나 있는 것 어떻게 알았어?”
  “센서.”

  아, 그렇지. 사람 움직이면 반짝 움직이는 센서 등이 요란하게 깜빡인다. 점멸을 반복하다 지치기라도 한 듯 지금은 현관에 있는 센서만 오롯이 빛나 명호의 얼굴만 보일 뿐 민규의 얼굴은 명호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제주도 다녀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가서 쉬어. 너도 너만의 시간이 필요하잖아.”
  “명호야, 내가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라. 좀 들어가서 얘기하자. 혹시 누구 있어?”
  “지금 이 시각에 우리 집에 누가 있어, 너 말고.”

  그리고는 문을 열자 아늑한 명호만의 향기가 훅 따뜻한 바람을 타고 끼친다. 동시에 그 따뜻한 바람이 무슨 신호탄이라도 된 듯 민규는 돌아서려는 명호의 등을 조심스레 껴안는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불편함에 쿵쿵 뛰는 것이었나 보다. 명호를 안자마자 잦아드는 심장 소리가 그걸 말해준다. 설렘이 다가 아니라, 편안함에도 색이 다르다는 것을 민규는 미처 잊은 것이다.

  “이상하더라, 본가 가서 편하게 누워 있는 데도 불편했어.”
  “어디 안 좋은 것 아니야? 제주도에서 이상한 거 막 먹었지 또.”
  “그게 아니라 서명호.”
  “얼굴 좀 봐봐. 아까 센서 안 켜져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나 괜찮아.”
  “뭐가 불편한데, 그건 괜찮은 게 아니야.”

  마른 명호의 몸이 민규에게 닿았다가 이윽고 고집에 못 이겨 돌아선다. 그런 명호를 제대로 볼 자신이 없어 민규는 고개를 바닥에 파묻는다. 고개 들어보라니까? 정말 어디 안 좋은 거면 지금 병원 가고.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든 얼굴을 보려는 명호의 모습에서 불과 몇 시간 전 제 모습이 비친 민규는 울컥함이 더 앞선다. 와, 이게 말이나 되나. 고작 하루 되는 시간에 이 모든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밀려온다는 게.

  “김민규, 민규야 너 지금 울어?”
  “좀 안고 있으면 안 돼?”
  “왜 울어? 우는지 왜 알려주면.”
  “‘왜 우는지 알려주면’ 이겠지.”
  “중국어로 말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알아. 머리가 뒤숙박숙이야.”
  “뒤죽박죽.”
  “장난해?!”

  당황하면 한국말을 버벅거리는 명호가 답답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 들을 생각 하지 않는 민규의 목을 살며시 끌어다 제 쪽으로 가져가자 그제야 영화에서처럼 천천히 들리는 그 얼굴에 그만 뜨뜻하고 축축한 그 얼굴이 느껴지자마자 같이 울컥한 마음이 떠오른다. 그런 민규와 명호가 마침내 눈을 마주한다. 고작 하루 조금 안 되게 못 봤을 뿐인데 서로에게 숨기고 있던 것이 온통 터진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그 울컥함을 삼킨다.

  “네가 우는 이유랑 같아.”
  “나는 너 울어서 그러는데.”
  “나도 그래, 네 마음이 나한테 느껴져서 울어.”
  “내 마음이 어떤데 대체?”
  “나한테 서운하고 미안하고 답답하고 짜증 나고 미운데 그런데도.”
  “응, 그러니까.”
  “좋아하나보다 내가 너를.”
  “참, 그 말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어? 나도.”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느끼며 안는다. 가만가만히 뛰는 서로의 심장 소리도 듣고 가만가만히 서로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 그 무엇보다 조용한 명호의 집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이다. 조용한 공백은 결국 보다 꽉 찬 기쁨을 안겨준다.

  명호의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꽉 찬 침대 위에서 서로 손을 꼭 잡는다. 그러다 민규는 명호의 집에 드나들 때마다 느낀 생각이 퍼뜩 든다. 지나치게 간소하다. 민규가 명호 쪽으로 돌아눕자 온종일 제대로 쉬지 못해 눈 밑이 퀭해진 명호도 같이 돌아눕는다. 그 바람에 얇은 매트리스가 출렁이다가 만다. 시야가 잠시 울렁거리다가 이내 둘은 눈을 꼭 감았다 동시에 뜬다. 서로 다가가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라 솜털과 눈썹마저 내쉬는 숨에 간지러울 지경이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네 집에는 짐이 왜 이렇게 없어?”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준비가 몸에 배서. 어쨌든 나는 이방인이니까.”
  “…지금도 그런 느낌이야?”

  그러자 명호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앞으로 꽉 채울 거라고 답한다. 그런 명호의 눈 밑을 손으로 살살 쓸어주며 민규가 눈가와 코, 그리고 입술에 입맞춤하자 명호도 화답하듯 문을 열어준다. 내쉬는 숨이 하나가 되는 것만큼 둘이 사랑하는 그 시간도 이제부터 함께라는 이름으로 하루하루 달라진다. 나는 너를 지금 사랑하고 있다, 그 시간은 아마 평생 가도 갱신하듯 1일째일 것이다.

  자고 일어나자 둘 다 주말 새에 많은 걸 치른 모양새로 피곤해 꼼짝도 하기 싫어 그 좁은 침대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가 명호가 먼저 민규에게 말을 꺼낸다.

  “어제 다른 부서 직원이랑 점심 같이 먹었어.”
  “그럴 줄 알았어!”

  갑자기 열이 확 뻗치는 느낌에 민규가 품에서 명호를 떼어놓으려고 하자 명호가 더 푹 민규의 품에 안겨버린다. 하는 수 없이 명호의 정수리에 이마를 댄 민규가 장난치듯 딱딱 소리를 내며 턱을 움직인다.

  “뭘, 그렇게 열을 내. 너 없으면 가끔 점심 먹는 그 직원이랑 갔어. 내 말의 요점은 그게 아니라 같이 갔는데 내가 너한테 하는 것처럼 수저 챙겨주고 물 챙겨주니까 되게 이상하게 보더라, 나를.”
  “왜?”
  “왜 다 챙겨주냐고. 자신도 손발 다 있다고.”
  “챙겨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초점이 그게 아니잖아. 나는 너 챙겨주는 것에 익숙해져서 우리 사이도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다르더라고. 그 사람 챙길 때랑 너 챙길 때 마음이.”
  “어떻게 달랐는데?”
  “몰라, 표현은 못 해.”
  “중국어로도?”
  “응.”

  그리고는 다시 처음 맞이하는 하루인 것처럼 둘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해서.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이 시간이 곧 말로 표현 못 할 시간이라는 것을 둘은 이제야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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