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계절의 우리
W. 달달
#1
처음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도대체 저 단순하고 덜렁거리기 일 수인 저 인간에게 무슨 매력이 있어서 저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 코가 꿰여 연애를 지금 10년 가까이 하고 있는지…….
“내가 먼저 좋아했어.”
귤을 먹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명호오빠의 말에 목에 걸렸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니 오빠가요? 저 인간이 뭐가 좋아서요??”
궁금해서 물어 본 그 첫마디가 잘못된 거였다.
명호오빠의 한마디에 저 빙구같이 웃는 저 인간까지…….
봄
그냥 처음엔 시끄러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쉬는 시간의 시끌시끌함의 중심에는 그 아이가 있었다.
키 크고 까무잡잡한,
부모님 직장이 워낙 해외를 돌아다니는 직업인 탓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외국어가 들리는 환경은 익숙했으나 저 아이처럼 시끄러운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냥 그렇게 눈이 계속 갔다.
한국어가 아직 미숙한 탓에 자신감이 없어서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처음엔 호기심으로 다가왔던 아이들이 점점 멀어졌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들, “쟤는 말을 안 하더라. 뭐야 외국에서 왔다고 유세 떠는 거야?” 라고 하는 말들에 그저 무표정하게 있었을 뿐이었다.
읽고 듣는 건 그래도 되는데, 알아듣는데…….
몇몇 아이들이 하는 말은 상처가 되기도 했었다.
그럴 때 마다 그 아이는 “야, 말이 심하다?” 라며 중재를 해주었다.
그냥 그 말에 위로가 되곤 했다.
뭔가 내 편인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는데 아직 미숙한 나의 한국어 발음이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음악 시간에 실기로 가창시험을 친다고 했다.
세상에 노래를 부르라니
더듬더듬 읽는 모습 보이기 싫어 수업시간에는 그저 입만 벙긋 거렸는데
이 선생님은 나를 봐줄 생각도 하지 않고 “명호도 할 수 있지? 명호는 외국에서 왔으니까 어느 정도 감안하고 시험 치는 걸로 해줄게. 다들 동의하지?” 라고 이야기하고는 그냥 넘어가 버렸다.
아이들이 다 하교하고 텅 빈 교실
주번인 아이가 안가냐며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문 잠그고 학원 가야되는데……. 그럼 명호야 문 잠그고 교무실에 열쇠 가져다 놔주라” 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드디어 교실에 나 혼자였다.
“보리... 밭... 사이 길로”
더듬더듬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가고 있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면서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어? 안녕 명호야, 체육복 두고 가서…….”
라며 뚜벅뚜벅 자기 자리로 간 그 아이는 이 내 체육복을 꺼내들고는 “그럼 내일 보자”라고 이야기하며 나갔다.
다시 혼자였다.
“...보리.... 밭 사이길로 니위....이게 무슨 말이지? 니....뉘”
종이를 들고 혼자서 안 되는 발음에 입술이 비틀어지며 더듬더듬 읽을 때였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들어 본 교실 문 앞에는 그 아이가 서있었다.
“그... 다른게 아니고... 저... 그러니까! 그.. 내가... 도와줄까?”
라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도움을 요청했다.
눈치 보고 있던 그 아이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가창 시험까지 2주, 동안 나와 그 아이의 방과 후 한국어 시간이었다.
“뉘 라는 말이 누구의 라는 말이야 누군가가 날 부르는 소리가 있어 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거야”
“뉘? 어렵네.. 발음이 어려워”
“연습하면 될 거야”
더듬더듬 읽던 나를 계속 응원해주고 발음을 교정해주었다.
시험을 칠 때 쯤 엔 이젠 익숙해진 발음들이 내 입에서 나왔다.
“명호야 진짜 잘했어 우와 너 진짜 잘 부른다. 다들 놀랠걸?”
“고마워 민규야”
“고맙지? 그럼 오늘 집 가는 길에 햄버거 먹자 나 지금 배고파”
“응”
둘이 가방을 챙겨서 교실 밖을 나가기 무섭게 민규는 계속 인사를 했다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 다들 그 아이에게 인사했다.
옆에 있기 어색해서 뒤로 살짝 물러나면 그새 눈치 채고 “명호야”라고 불렀다.
그 아이 옆에 있는 나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서명호고 중국에서 왔어요.” 라고 설명까지 해주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은 왜 이리 많은지, 길가 고양이에게 까지 인사하고 가는 그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햄버거집도 자주 갔는지 들어가면서 크게 인사하는 아이였다.
직원분들이 “더블패티버거 세트?”라고 이야기했다. 얼마나 자주 왔으면 직원분들이 메뉴까지 기억하나 싶었다.
“네! 명호야 너는 뭐 먹을래? 여기 다 맛있어”
“나도 그냥 같은거...”
“그래 더블패티버거 세트 2개요”
라고 주문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명호야 여기 진짜 맛있어 나 학교마치면 거의 매일 와서 먹고 가거든”
“명호야 감자튀김 같이 나눠 먹자. 나는 친구들이랑 먹으면 항상 사이에 감자튀김 부어서 나눠 먹거든... 괜찮아?”
“응 상관없어”
타이밍 좋게 울리는 진동벨을 들고 가서 바로 받아오더니 감자튀김을 우리 사이에 와르르 부어서 먹었다.
“내일 음악시험이네 애들 진짜 놀라겠다.”
“응”
나는 지금 햄버거 크기에 놀라겠다. 이 큰 걸 혼자서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명호야 안 먹어? 별로야?”
사장님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하며 묻는 아이에게
“너무 커...”
“그른가...? 나는 항상 이거 먹어도 배고프던데... 잠시만”
라며 카운터에 가더니 플라스틱 칼을 받아 왔다.
“이걸로 반 잘라서 먹으면 될 거야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먹어 너무 내가 내 기준으로 생각했나봐”
라고 이야기하며 웃는 민규였다.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 해주는 이 아이와 이번 음악 실기시험을 치고 나면 우리 사이는 끝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에 있는 감자튀김을 그 아이가 서너 개씩 들고 먹을 때 마다 우리 사이가 이제 끝나가는 기분이었다.
“명호야 감자튀김도 먹어”
라며 입에 감자튀김을 넣어 주기에 받아먹는데 이거마저 다 먹으면 이런 친절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어..어...? 명호야 왜 울어”
라며 허둥지둥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너에게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이제 못 만나?”
“에? 왜 못 만나 매일 볼껀데”
“음악 시험도 끝났고... 너랑 나랑 이제 만날 일 없잖아 나는 너 계속 보고 싶어”
엉엉 우는 나를 달래주면서 옆자리로 옮겨 앉은 아이의 귓불이 빨게 지더니 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너가 좋아 명호야, 계속 옆에 있을 거야.”
라고 이야기해주면서 안아주는 그 아이의 품에서 안정이 되었다.
안정이 되고 나니 부끄러웠다.
세상에나 햄버거 먹다가 울다니
“이제 다 울었어? 식었겠다. 빨리 먹자”
라며 햄버거를 한입크기로 자르더니 입에 넣어 주었다.
반쯤 먹자 배가 불러와 못 먹겠다고 하니 나머지 반은 그 아이가 먹었다.
“이제 명호랑 와야겠다. 너랑 먹으니까 나도 딱 배가 불러”
그냥 그 때 알았다. 나 이 아이 좋아하는가 보다. 하고
#2
“그럼 고백을 명호오빠가 먼저 한 거예요?”
먼저 좋아할 구석이 있는가?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 되서 물었다.
“아니 고백은 내가 했어.”
반대편에 앉아서 귓불이 빨갛게 돼서 이야기하는 오빠 놈이 이야기했다.
“완전 그때로 돌아가면 그렇게는 고백 안 해. 진짜 유치했어.”
“왜? 그때 귀여웠는데”
진심으로 그 때의 김민규가 귀여웠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하는 명호오빠에게 진짜 존경심이 들었다. 앞뒤좌우로 뜯어봐도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어디가 귀여웠다는 말인가
명호오빠 말에 쑥스러워 하는 저 인간을 보니 미쳤나 싶다.
여름
춘추복에서 하복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명호는 음악 실기를 잘 끝냈다.
내가 다 기뻤다.
나는 명호랑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아이들이 명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만 알던 명호가 이젠 주변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명호는 구기 종목은 잘 못해서 체육시간에 축구를 한다고 하면 항상 그늘에서 쉬면서 우리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명호에게 시계나 져지를 맡겨두었다.
품이 큰 져지를 걸치고 앉아서 축구를 구경하는 명호는 꽤나 귀여웠다.
나는 내 물건을 가지고 있는 명호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삐뚤어진 소유욕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명호였는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명호는 내 친군데 라는 우정으로 포장된 삐뚤어진 소유욕
그렇게 나는 나의 이 마음을 우정으로 포장한 채 나 자신도 모르게 꼭꼭 숨겨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왔다.
어쩌면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거 일 수도 있는 것 같다.
남자끼리 연애라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었다.
대학가고는 연락 한 통도 안하던 승철이 형이 같이 농구하자며 연락이 왔다.
“대학생활이 그렇게 좋으신가 봐요. 아주 얼굴보기 힘들어”
“야 과제하다 끝나 조별과제에 내꺼 과제에 아니 교수님 자기들은 한 개 내준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듣는 수업이 자기 것 만 있냐고 어우 끔찍하다 야”
항상 만났던 공원에서 만나 형이랑 오랜만에 농구하며 뛰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뛰는 거하고 형하고 뛰는 거는 또 별개니까
오래된 짝꿍을 만난 기분으로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형이 사준 음료수 마시면서 쉬었다.
“형 대학가면 연애한다더니 하고는 있는거야?”
승철이 형이 고3시절 항상 하던 이야기였다. ‘대학가서 신나게 놀거야! 연애도하고 술도 마시고 놀거라고!’ 라고 하면서 공부하던 형이었다.
당황해 하며 음료수를 뱉는 형을 보며 무언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닌척 시치미 때는 형에게 끈질기게 물었다.
“어휴... 내가 잘 못 걸렸지...”
“그래서 예뻐?”
“어 예쁘다.”
옛날부터 인기 있던 승철이 형이지만 머리 꼭대기에 달린 눈 때문에 마음에 드는 사람 한명 없던 사람이 예쁘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예쁜 사람일까 싶었다.
“어떻게 만났는데?”
“그냥... 신입생 오티 때 만났는데 같은 수업 듣길래 친해져서 뭐... 그래”
그러던 중 형의 폰이 울렸다
그냥 빨간 하트 하나 되어 있는 그 이름이 얼마나 부럽던지
“응 아는 동생하고 농구하고 응응 이제 들어갈 거야 어딘데? 내가 그리로 갈까? 보고싶어서 그러지”
라며 다정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 내가 아는 형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응 전에 말하던 동생 응응 민규라고 응... 왜? 왜 민규를 니가 보고 싶어 하는데?? 어후... 알겠어 알겠어 데리고 갈게. 어, 질투나 너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해서 질투나. 나는 안 보고싶어? 어엉 나도 보고 싶다고? 헤헤 어엉 갈게 기다리고 있어.”
이 내 전화를 끊고는 폰을 보고 웃는 형을 보니 내가 괜히 간지러웠다.
“뭐야 왜 그렇게 웃어?”
“어...? 그냥 좋아서. 너 보고 싶다고 데리고 오래. 밥 사준다고 아르바이트 곧 끝나간다고 고기집으로 오라고 그러네. 오늘 힘들어서 몸보신해야한다고. 가자 고기 사줄께”
“나 지금 땀 흘리고 엉망이야 처음으로 형 애인분 만나는데 이게 뭐야”
“괜찮아 걔는 신경 안 써 그리고 니가 잘 보여서 뭐하게”
형 말 들어보니 또 맞는 말이라 쫄래 쫄래 따라갔다.
이 내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금발의 남자분이 머리를 묶은 채 앉아 있었다.
“야 최승철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미안, 그렇다고 성을 붙이냐... 얘가 내가 말한 동생 민규, 민규야 인사해 여긴 정한이”
“어.... 안녕하세요”
“어 안녕? 너가 민규야? 이야기 많이 들었어. 야 너 보다 잘생겼다 승철아”
“야 안 되겠어 김민규 너 가”
“어우 진짜 유치해. 앉아앉아 내가 더 쎄”
투닥투닥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면서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승철이 형 애인을 찾으려고 했다.
“형.. 애인분은 아직 안 오셨어?”
투닥 거리던 형들이 조용해 지면서 눈치보는 승철이형과 웃는 정한이 형을 보면서도 끝까지 나는 정한이 형이 형의 연애 상대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로 남자는 연애대상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나의 무식함이였다.
“나야”
“네?”
“승철이 애인, 나라고”
“어... 죄송해요 그런거 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그런거?”
순간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아, 내가 실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랑 연애 하는거요.”
“남자끼리 연애하면 안되니?”
그 날 나의 고정 관념이 사라진 것 같았다.
아 나는 왜 같은 성별끼리는 연애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챙기는 형들을 보면서 내가 잘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한이 형에게 이야기 했다.
“죄송해요 형.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형 진짜 예뻐요. 승철이 형이 진짜 눈이 높아서 웬만한 미인 아니면 안 사귈꺼라고 했는데 형 진짜 예쁘세요.”
“괜찮아 처음 들으면 놀랄만도 하지 그리고 난 예쁜게 아니고 잘생긴거야.”
“네 형, 근데 이런 질문 실례긴 한데 왜 승철이 형이에요? 같은 남자인데...”
“음... 같이 있고 싶고 계속 보고싶고 다른사람이랑 있으면 질투나고 나한테만 다정했으면 좋겠고... 그런거 생각하니까 아 내가 승철이 좋아하네 싶더라고, 좋아하는데 성별이 뭐가 문제겠어. 우리 마음이 통하면 되는거니까. 그리고 누구한테도 주고 싶지 않았어.”
승철이 형 얼굴이 붉어 지면서 ‘어후 여기 덥다.’ 라고 이야기 하는데 ‘왜 부끄럽냐? 얼굴 빨게’라고 웃으며 놀리는 정한이 형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저 바라만 봤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하던 정한이 형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승철이 형이 그만 먹으라고 너 먹이려면 거지되겠다며 뭐라고 할 때까지 맛있게 삼겹살 얻어먹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 다시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명호 주변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석민이 녀석이 명호 어깨에 팔을 걸치고 끌어안고 하는 동안 가만히 있는 명호를 보며 그 날 따라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명호의 손목을 잡고 학교 뒤뜰로 갔다.
석민이에게 안겨 있고 웃고 있는 명호를 보는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듯이 커져갔고 그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 자신을 위해 그 상황을 중단시키려고 무작정 명호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명호가 당황해하며 따라오며 내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민규야... 나 아파 어디까지 갈껀데”
아프다는 명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그래도 가느다란 명호 손목에 손자국이 붉게 남았다.
“미안해. 손자국 났다.”
“왜 그래 민규야 무슨일이야?”
걱정스럽게 나를 보는 그 얼굴에... 나와 마주 보는 그 눈동자에 우정이라고 포장된 선물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 들어있던 사랑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 사랑이구나 난 명호를 좋아하구나’ 깨달으면서 엉엉 울었던 것 같다.
“너가 석민이랑 그렇게 안고 있고 같이 어울리는 거 싫어. 나랑만 놀고 나랑만 이야기 하고 나랑만.... 나한테만 안기고 나한테만 웃어주면 좋겠어. 너가 좋아 명호야.”
울면서 고백하는 나를 명호는 크게 웃으면서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나도 너 좋아해”
#3
“그 구질구질한 고백을 받아줬다구요?”
“응, 진짜 귀여웠어. 그때”
“어우 진짜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아니야 귀여웠어. 난 그 모습보고 더 좋아했는데?”
라고 이야기하며 귤을 까서 김민규 입에 넣어주는 명호오빠는 천사였다.
나였으면 그런 고백 받아주지도 않았을거다.
“그럼 둘은 싸운 적 없어요?”
“왜 없어 엄청 싸웠는데 싸우고 화해하고 하면서 사는거지 지금도 싸워”
라고 이야기하면서 웃는 명호오빠는 무엇인가 통달한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가을
우리가 연애하면서 잠시 헤어졌을 때가 고3시절, 수험생이었을 때였다.
공부 때문에 운동을 못했던 민규는 운동 못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던 것을 못해서 축적 되는 와중에도 나를 챙겨주느라 바빴었다.
입맛이 없어서 밥 안 먹고 있으면 밥 먹으라고 챙겨주고, 공부하는 것도 도와주면서 이게 데이트라고 웃으면서 이야기 해주었다.
소소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나의 그 소소했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건 부모님이 다음 달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신 이 후였다.
이걸 민규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민규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그 아이에게 헤어지자고 이야기 하겠는가. 그렇다고 기다려 달라고 하기엔 너무 나의 이기심 같아 말 할 수 없었다.
말해야지 결심만 하고 입 밖으로 내 뱉지 못한 채 중국으로 돌아갈 날이 2주 남았을 때였다.
학교 선생님에겐 다 말 한 상황이었고 서류 준비도 다 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떠날 준비를 와중에 민규는 웃으며 나와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명호야 우리 대학가면 여행도 다니고 그러자”
“명호야 너 과는 정했어? 나는 영상이랑 사진 배우고 싶어”
“명호야”
웃으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너를 볼 때 마다 내 마음은 더욱 무거워져갔다.
그 날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디서 들었는지 석민이가
“명호야 너 중국 가는거 민규는 알아?”
라고 물어왔고
“내가 이야기 할 거야.. 민규 몰라”
민규가 몰랐으면 하는 나의 이기심에 내 자신이 싫었었다.
“빨리 말해야지... 민규 지금 너랑 같은 대학 갈거라고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알아.”
라고 말하며 고개 돌려 뒤돌아 봤을 땐 민규가 서 있었다.
“...무슨 이야기야? 중국? 명호 너... 중국가?”
“민규...”
“묻잖아 너 중국 가냐고”
큰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는 민규를 보며 나는 입을 다물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서명호, 날 생각 하긴 했니?”
“말하려고 했어”
“아니 넌 그냥 피하고만 있었을 뿐이야”
“말하려고 했다고 했잖아”
“넌 이런 상황이 오는 것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을 뿐이야. 넌 너만 생각해. 날 생각했으면 이렇게 못해”
“김민규, 말을 왜 그렇게 해?”
“민규야 왜 그러냐 명호도 말하려고 했데”
둘 사이에 끼인 석민이는 이도 저도 못하고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다.
“잠시 우리사이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좀 가지자.”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바로 뒤돌아 가는 민규를 붙잡지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작아지는 민규의 등을 볼 뿐이었다.
“명호야...”
우리 둘 사이를 유일하게 아는 석민이는 눈치를 볼 뿐이었다.
“괜찮아.. 나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 날 무슨 생각으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수업시간에 그저 멍하게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항상 같이 가던 길을 혼자가는 것은 생각보다 외롭고, 쓸쓸했다.
몇 일 전 민규가 은행잎이 색이 이쁘다며 파란빛 하늘이랑 노란색이 잘 어울린다고 했던 은행나무가 보였다.
민규가 떠오르니 ‘이렇게 헤어지는 건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님은 당장이라도 중국을 갈 준비를 하고 계시고, 나는 아직 결정을 못 내렸고, 미성년자였고, 아직 내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기에는 버거웠다.
그리고 그 날 이후 항상 내 옆에 있던 김민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눈도 안 마주치고 그냥 지나가는 민규를 볼 때 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고 눈엔 눈물이 고였다. 하루 이틀이지 중국으로 갈지도 모르는데 몇일 남지 않은 시간을 이렇게 보낼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날 보고 모른척 지나가는 민규를 보자 눈물이 아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야 너 언제까지 그럴껀데?”
지나가는 민규를 먼저 붙잡아서 따지듯이 물었다.
“누구신지, 저는 저 생각 안하시고 중국으로 가신다는 분 모르는데요”
민규도 단단히 꼬여있었다.
“야 김민규”
“뭐 서명호”
“나 중국 가면 우리 헤어지는거야?”
제일 궁금했다.
내가 중국가면 우린 헤어지는게 되는건지
“그럴 생각아니였어?”
중국가도 안 헤어지고 계속 만날 수 있는건 아닌지
“그래서 나한테 말 안한거 잖아 너”
내가 확신이 없어서 너한테 말 못했던 거였다.
“야, 서명호 너가 결정해 근데 난 너 안 놔줄 거야”
어디에서 나온 확신인지
당당하게 말하는 너를 보면서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터져 나왔는건지, 외로움이 터져나온 거였는지
꾹 참고 있던 눈물은 한, 두방울씩 흐르더니 결국 난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복도에서 엉엉 큰 소리로 울었다.
“안 헤어져 못 헤어져”
엉엉 울면서 이야기 하는 나를 너는 당황하더니 이내 웃으면서 꼭 안아 주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는 너랑 헤어지기 싫어서 말 안했는데 너가 막 나 모른척하고”
안기면서 그동안 서러웠던거를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나를 달래주면서 너는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하교길에 우리집까지 와서는 부모님께 “제가 명호 좋아합니다. 명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라며 자기 믿고 명호 한국에서 지내게 해달라는 너를 보면서 그냥 내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엄청 기뻤던 것 같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부모님이 크게 반대를 안 하셨다는 거였다.
하나뿐인 아들 애지중지 키웠더니 시커멓고 키 큰 녀석이 와서 데리고 간다고 아빠는 이야기 했지만 반대는 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웃으면서 ‘너가 하고싶은데로 했으면 좋겠다. 너가 민규 이야기 할 때 마다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너는 모를꺼다.’ 라고 이야기 하셨다.
이미 부모님은 눈치 채셨던 것 같았다.
그리고 몇 일 뒤 공항에서 부모님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나는 작은 방을 구해서 혼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린 수능을 쳤고 같은 대학에 붙었고, 둘이 같이 살고 있다.
#4
“그 때 그렇게 싸우고는 절대 혼자 고민 안 해. 고민할것이 있으면 둘이 이야기하고 풀어가는것 같아.”
“대화가 중요하지”
“누가 그러더라 연애는 둘이서 하는 사회생활이라고,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고 이해하고 하는거지 한 사람만 희생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아니니까”
라고 이야기하며 사과가 있었던 빈 접시를 치우는 명호 오빠따라
“내가 정리할게”
라고 이야기하며 벌떡 일어나는 김민규를 보니 영혼의 단짝이라며 둘이 저렇게 붙어 다니는 저 두 사람도 싸우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시선이 어떻든 김민규는 김민규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거고 그 사람도 김민규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머님께 반찬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화도 해야겠다.”
“응 역시 세심해 서명호씨”
서로 옆에 붙어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보니 알아서 잘 살고 있으면 됬다 싶었다.
“저 갈께요”
현관에 가서 신발신고 가려는 나를 명호오빠가 잡더니 요즘 해가 짧아 졌다며 시간 늦었으니 택시타고 가라며 택시까지 불러주고 집 앞 까지 나와 주었다.
그 옆엔 추운날씨임에도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나온 김민규도 있었다.
“호빵먹자 명호야”
“응 나 하나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귤 먹어서 배불러”
“사서 나눠 먹으면 되지 원래 호빵은 야채랑 팥이랑 한 개씩 사서 나눠 먹는거야”
“음... 그래. 나 다 못 먹으면 너가 먹어”
택시 문여는 나는 안중에도 없고 호빵이야기에 빠진 둘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사는 건 다 똑같다.
그냥 나랑 마음 맞고 서로를 배려해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게 행복한 삶인 것 같다.
그리고 겨울
옆에 함께 걸어갈 사람이 있다면 추운 겨울도 덜 외로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