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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race

​W. 가미

  시끄럽게 돌아가는 엔진과 타이어가 바닥에 밀려 찢어지듯 울리는 소리. 누구나 다 아는 고급 세단에야 또래만큼의 충분한 관심을 가졌지만 그 차들로 경쟁을 하는 모터스포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민규는 어색할 정도로 시끄럽게 울리는 굉음들에 저절로 귀를 막을 수 밖에 없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라기엔 좀 많이 큰 편이라 피할 수도 없이, 민규는 낯선 존재인 자신에게 향하는 스태프들의 시선이 꽤 따가웠다.

 

  "곧 명호 씨 피트인*인데 인사라도 하시겠어요?"

  "아, 네네!"

 

  *피트인 : 경주차의 수리, 조정, 점검, 연료 보급, 타이어 교환, 드라이버 교체 등의 목적으로 피트로 들어오는 것. 피트에서 팀 관계자가 계측을 하고 작전을 세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민규의 밝은 얼굴에는 기대감이 차 있었다.

카레이서 서명호. 민규의 할아버지이자 한국에서 꽤 큰 기업의 총수인 김 회장은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차와 모터스포츠 애호가로 재능있는 명호의 데뷔 준비부터 시작하여 이제까지 끊이지 않는 격려와 그에 맞는 두둑한 후원을 해왔다. 명호는 김 회장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국내외 대회에 꼬박꼬박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보였고, 심지어 꽤 유명한 다른 나라의 레이싱 팀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떠나지 않고 의리를 지켰다. 

민규는 명호가 무척 궁금했다. 아무리 모터스포츠는 모른다고 해도 '카레이서'라는 직업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멋있다는 감상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저와는 달리 이미 한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며 성장해 나가는 명호가 신기하면서도 동경하게 된 덕이었다. 

 

  "페달이 이상해요. 잘 안 밟히는 것 같은데. 전에 얘기한..."

  "안녕하세요, 서명호 씨!"

 

  민규는 피트인을 하자마자 붉은색으로 칠해진 차에서 내려 불만 섞인 말을 내뱉는 명호에게 절대로 못 들을 리가 없는 크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냅다 오른손을 내밀었다. 막 헬멧을 벗어 땀으로 젖은 긴 앞머리를 쓸어올리던 명호가 무어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민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급하게 일본에 넘어오며 대강 알아본 바로는 카레이서들은 키가 작은 편이 많다던데 생각보다 크다던가, 그와는 반대로 선은 생각한 것보다 가늘다든가 하는 민규는 척 보기에도 저 좋은 사람이에요! 라고 강하게 어필하는 말간 미소를 띠며 명호의 첫인상을 머리에 남겼다. 비록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명호의 전체적인 인상만큼은 나쁘지 않다 느끼며, 민규는 쭉 뻗은 손을 다시금 가볍게 흔들며 악수하기를 재촉했다.

 

  "김민규입니다! 서명호 씨 팀을 후원하고 있는 케이..."

  "...브레이크 좀 신경 써 주세요."

 

  호남형 얼굴에 눈에 띄는 큰 키와 건장한 체격, 민규 개인의 입지야 뒤로 미루더라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아듣는 기업 오너 일가의 한사람, 모난 데 없는 성격과 곰살맞은 태도. 민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사람으로서, 대답은커녕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가 버린 명호에게 전에 없던 '개무시'를 당했음을 잠시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Overrace

  김민규 X 서명호

 

 

 

 

 

 

 

  민규는 저에게 관심이라고는 길을 걸어가는 고양이에게보다도 없는 아버지가 뜬금없이 일본 출장을 지시했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인 김 회장이 차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 레이싱팀에 후원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매니아층이 두터운 스포츠이긴 했으나 적어도 대표를 맡은 아버지나 다른 친척들 입에서 명호, 더 나아가 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눈치가 빠르고 야무진 민규가 보기에 오로지 할아버지만이 팀에 대한 후원에 뜻을 가지고 있음이 훤했다. 

 

  큰돈이 들어가는 스포츠이니만큼 명호는 김 회장의 후원이 끊기지 않도록 특출난 것이라곤 없는 팀을 오로지 재능과 노력을 쏟아부어 열심히 이끈 것으로 보였다. 민규는 동질감과 함께 존경심이 들어 만나기도 전부터 서명호란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었다. 집안에서 썩 좋아하지도 않는 레이싱팀의 케어를 맡게 된 제 처지부터가 불쌍하다 여겼던 민규로서는 호의적인 반응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후원자 대리로서의 환대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당사자인 명호가 그걸 뻥 차버릴 줄은 순진하게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민규는 굉장히 민망하고 약간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십분 발휘하여 명호가 큰 대회를 앞두고 있어 예민한 상태라 그리 행동했을 거라 짐작했다. 아시아에서 꽤 이름난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유럽 쪽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니 민규 자신이 명호의 입장이었더라도 갑자기 튀어나와 인사하는 사람에게 경계심을 느낄 거라 여겼다. 후원 기업에서 굳이 응원을 보낸 것에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색하게 구는 스태프들의 반응도 있었으니, 민규는 더 밝은 행동으로 꾸준히 마주하다 보면 분명 명호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 것이라 확신했다.

 

  "야."

  "...예?"

  "김 대표가 뭘 시켰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만 알짱거려. 신경 쓰여서 더 짜증 난다고."

 

  민규의 이름하여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프로젝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먹혀들었으나 가장 중요한 대상인 명호에겐 전혀 아닌 듯했다. 민규는 깔끔한 정장이 아닌 얇은 반소매 티셔츠와 점프슈트, 즉 스태프에 더 가까운 편한 복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대회 규칙에 대해 듣다가 갑자기 저를 부르는 명호가 드디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있는 줄 알고 냉큼 쫓아갔던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명호는 민규의 아버지를 언급하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규를 다시 한번 노려보고는 사라졌다. 민규는 뒤늦게야 속으로 해야 할 말을 마구 내뱉었다. 시키긴 개뿔! 누군 뭐 이러고 싶은 줄 아나?! 성격 진짜 이상해!! 나도 나한테 대단한 걸 좀 시켰으면 좋겠다고!!! 

 

 

 

 

 

  * * *

 

 

 

 

 

  명호는 이어지는 예선마다 순조롭게 상위권으로 올라왔다. 민규를 여전히 무시하지만 민규는 화가 나지 않았다. 

  가장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또래의 스태프와 근처 이자카야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며 들은 바로는, 이제까지 꾸준히 명호와 함께 일해온 엔지니어들은 물론 매니징을 맡아 하던 사람까지 모두 교체되었다고 했다. 즉 아예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차에 올라탄다는 말이었다. 또래의 스태프는 일본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하며 민규보다 조금 더 일찍 지금의 팀에 합류한 것이었다 보니 왜 갑자기 손발을 맞춰온 사람들이 다 바뀌었는지 추측 정도로 끝낼 수밖에 없었으나 민규는 알 것 같았다. 

  얼마 전부터 김 회장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회사 운영은 물론 문화, 스포츠 후원에서까지 전반적으로 손을 떼게 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회사의 모든 중요한 일들은 민규의 아버지인 김 대표가 관리하게 되었으니 지금의 사달을 낸 장본인도 뻔했을 테고, 그의 아들로서 일본에 온 자신을 곱게 보지 않는 것도 참 당연했다.

 

  민규가 명호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를 관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가까이 서 있으면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가거나 불편한 티를 내었고 민규는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까지 어색해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기는 싫었다 보니 멀찍이서 명호를 바라보곤 했다. 명호는 잘 웃지 않았고, 스태프들과도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스태프들 역시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는 명호를 어려워하는 느낌이 강했다. 쟤는 저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나? 낯을 가려서 그러나? 저 혼자 주변에 벽을 두르고 나가려 하지 않는 맹수 같은 이미지였다. 민규는 명호의 성격을 이해하는 게 무척 어려웠으나, 그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더 어려웠다.

 

 

 

 

  "명호 씨는 체력 자체가 부족한 편이셔서 레이스를 다 돌 때까지 적당한 분배가 엄청 중요해요."

  "그러면 중간까지는 무난하게 가다가 끝나갈수록 엄청 빠르게 가는 게 그래서 그런 거예요?"

  "알고 계시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사실 그냥 빠르게 가는 수준이 아니라 엄청 오버페이스하는 거예요. 성적이랑은 별개로 이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 원래 말하면 안 되는데."

  "케어하려고 온 건데 저도 알아야죠! 모르는 척할게요, 진짜."

 

  민규는 특유의 미친 친화력으로 팀 닥터를, 민규 본인은 싫어하는 표현이었으나 달리 부를 말이 없으니 사용하자면 한마디로 '구워삶았'다. 다들 새로 들어온 팀인 데다 그 중심에 있는 명호가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보니 화목하게 뭉치기가 애매했었기에 오히려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애교스럽게 구는 민규의 등장이 반가울 지경이긴 했다. 닥터는 잠깐의 고민 끝에 명호의 신체적인 건강도 좋지 않지만 그보다도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그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라는 소견을 민규에게 슬쩍 읊어주었다.

 

 

 

 

  * * *

 

 

 

 

  "저, 명호 씨."

 

  연습이 끝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나갈 준비를 하는 명호에게 다가온 엔지니어 한 명이 먼저 불러놓고도 곧장 목적을 말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동안 명호는 보채지 않고 반듯하게 서서 가라앉은 눈으로 얌전히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빨리 말하라고 분명 닦달했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명호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대회 규정에 맞게 조정한 새로운 차가 아니라 자주 몰던 형태의 익숙한 차로 연습 삼아 트랙을 달린 덕분이었다. 어느 레이싱카든 간에 숨이 막힐 정도로 명호를 옥죄는 공간인 것은 똑같았으나 적어도 예전에 함께한 사람들의 손이 탄 차가 더 좋았다. 그래서 평소보다 늦어 해가 질 때까지 사람들을 붙잡아두게 되었고, 퇴근 시간을 지켜주지 못해 조금이지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오늘 단체 회식이 있어서요. 지금 다른 분들은 먼저 가 계시고..."

  "전 됐어요."

 

  명호는 지금의 가벼운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기 위해 곧바로 거절하고 몸을 돌렸다. 새롭게 일하게 된 엔지니어들은 명호의 피드백이나 요청사항보다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더욱 중요시하는, 명호가 아닌 이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이나 처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나 감히 이해하고 수용할 만큼의 여유가 명호에게는 없었다. 뒤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알고서도 굳이 돌아보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이 빌린 일본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차로 향하려던 명호는 오랜만에 걸어가기로 마음먹고 가로등이 켜진 긴 거리를 천천히 내디뎠다. 숙소로 돌아가면 바로 이전 대회 우승자들의 영상을 돌려볼 생각이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보고 분석하여 죄다 외울 수준이었음에도 턱없이 부족해 조바심이 울컥 쏟아질 지경이었다.

 

  "야!!!"

  "...야?"

 

  분명한 한국어, 그리고 분명하게 짜증이 섞인 부름에 명호는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로 멈춰서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꼭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차처럼 제 앞에 겨우 멈춰선 남자는 가쁜 숨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명호는 민규를 알아보자마자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반말은 네가 먼저 했잖아! 너 왜 회식 안 와? 얘기 못 들었냐?"

  "...가기 싫은데?"

  "전원 참석이야!"

  "누구 맘대로."

 

  이번에도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명호의 손목을 민규가 덥석 붙잡았고, 명호는 닿자마자 바로 뿌리쳐버렸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데다가 얼른 내쳐지기까지 하여 잔뜩 놀란 표정을 짓는 민규를 명호도 약간은 당황한 기색으로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긴다. 민규는 이번엔 완전히 자기 의지로 다시 명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명호도 제대로 의식하고 힘을 주었으나 이번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같이 얘기도 좀 하고 친하게 지내면 너한테 더 좋은 거 아냐? 왜 자꾸 삐딱하게 나오는 건데?"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니, 팀 케어를 위해서 온 사람한테!"

  "개소리 집어치워. 김 대표가 감시하라고 보낸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런 지시 들은 적 없거든? 사람 호의를 자꾸 무시하는 것도 진짜 별로인 건 모르냐?"

  "호의? 내놓은 팀이라고 소문난 마당에 놀리려고 온 거 아니고? 알지도 못하면서."

  "나라고 뭐 안 내놓은 자식인 줄 알아? 그리고 모르면 알려주면 되잖아!!!"

 

  명호는 입을 더 열려다 말고 핑 도는 시야에 이마를 짚으며 바닥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름대로 정신을 차분하게 바로잡  으려는 행동이었다. 민규는 큰소리를 칠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속이 조금이나마 후련해졌다. 그리고 먼저 말을 멈춘 명호에게 그만큼 미안하기도 했다. 

  명호는 당장 자리를 옮기거나 움직이지 않겠으니 이만 놓으라는 의미로 여전히 저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민규의 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놀란 민규가 얼른 손을 떼고 어색하게 팔딱거렸다.

 

  "아, 미안. 소리 지른 것도 미안. 근데... 너 진짜 오해하고 있거든?"

  "어쩌라고."

  "좀 들어봐! 나 진짜 아버지한테 감시니, 뭐니 그런 거 듣고 온 거 아냐. 나한테 그런 거 할 일도 없어. 내가... 주워온 애라서."

 

  내내 바닥에 꽂혀있던 명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민규에게로 향했다. 민규는 명호와 눈이 마주치기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분명 그런 말을 꺼낼 생각조차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 아니면 좀 더 돌려 말할 수도 있었을 거다. 명호는 이대로 계속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질문을 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을 고르기도 전에 민규가 먼저 침묵을 깼다.

 

  "주워온 건 좀 심했나..? 아버지가, 김 대표가 바깥에서 만든 자식이야. 뭐라더라. 혼외자식?"

  "......."

  "그렇게 이쁨받으면서 산 거 아니라고. 물론 네 입장에선 고작 그런 애가 온 게 더 짜증 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아니고...."

  "하여튼! 난 너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재수 없게 굴었어도 지금도 똑같으니까, 우승할 수 있게 돕고 싶다고."

 

  민규의 눈에 지금의 명호는, 이제껏 이빨이며 발톱을 세우고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가 되어있던 짐승의 모습이 아닌 물에 빠졌다가 겨우 건져 올려진 축 처진 고양이 같았다. 제 말이 앞으로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해줄지, 아니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 눈앞의 명호가 미워 보이진 않아 혼자 만족하기로 했다. 오히려 지금의 자그마한 모습이 더 명호다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회식.. 야, 야!!"

 

  명호는 민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확히는 회식이라는 단어가 무슨 발사장치를 가동하는 비밀코드였던 것처럼 빠르게 달려가 버렸다. 

  민규는 명호처럼 레이스 위의 스포츠카 같은 속도로 뛰진 못해도 지구력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충분히 덤벼볼 만하였지만 하필 회식 장소에서 명호가 오지 않는단 소식에 뛰어나오기 직전 집어먹은 가라아게 때문인지 옆구리가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명호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 *

 

 

 

 

 

  더위보다는 추위에 약한 명호였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열기와 습도는 한없이 사람을 지치게 했다. 거기다 무슨 문제인지 아무리 페달을 밟고 기어를 바꿔보아도 주행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실 경기에서 후반부의 오버페이스를 지금의 차가 충분히 따라와 줄지가 염려될 수준이었다. 이전 엔지니어들이 골라두었던 유럽산 부품이 있었으나 안 그래도 들여오는 데에 시간이며 돈이 많이 필요한 것을 급히 스태프들이 바뀌면서 준비할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어찌어찌 가져온다 하더라도 대회 날짜까지 적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명호로서는 지금의 엔지니어들이 자신의 운전 스타일에 맞춰 차를 잘 손봐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으나 오히려 그 점이 가장 힘들고 믿음이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명호는 온몸이 부서질 듯 울리는 중에도 경기장에 적응하기 위해 정해진 랩*을 완주한 후에야 무거운 걸음으로 스태프 중 유일하게 교체되지 않은 팀 닥터에게 향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휴식을 권했으나 명호는 고개를 저으며 두통약만을 받아 건물을 나섰다. 얼마 전 걸어서 숙소를 오간 이후로 명호는 내내 경기장을 제외한 모든 곳을 제 발로 움직였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운전이지만 당장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운전이었다.

* 랩 : 트랙의 한 바퀴, 혹은 그 한 바퀴를 도는 것

 

  "서명호!"

 

  언뜻 들리는 제 이름 세 글자에 우뚝 멈춘 명호는 곧 그 목소리가 피하고 싶은 누군가의 목소리임을 기억해내고 못 들은 척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더 불러대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로 바뀌었다. 애써 무시하려니 짧게 이어지던 소음은 곧 아이들이 멋대로 두드리는 악기처럼 길고 짧은 소리로 규칙적이지 못하게 터져 나왔고 산책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명호 쪽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 왜!!!"

  "빨리 타라고!!!!"

 

  뭘 어떻게 삶아 먹었는지, 목소리 자체가 높은 편이 아닌데도 귀에 꽂히는 고성에 명호는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민규는 그제야 느릿느릿 발을 놀리던 액셀 페달을 힘주어 눌러 시원한 엔진 출력 소리를 내며 도로를 달렸다. 몇몇 사람들이 오가던 인도와는 다르게 차도는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와 그 위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 말고는 민규가 운전하는 차 한 대만이 존재했다.

 

  "또 뭔데. 오늘은 회식 얘기 없었잖아."

  "회식도 너무 자주 하면 사람들 싫어해."

  "그럼 왜?"

  "나 드라이브할 건데 심심해서."

 

  매일 운전하는 게 일인 사람에게 드라이브 동참을 이런 식으로 받아내다니. 명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앞을 보며 핸들을 가볍게 조작하는 민규를 바라보다 말대꾸하기를 포기하고 조수석 쪽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문득 조수석에 앉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만임을 깨달았다. 

 

 

  알고 싶진 않았던 민규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이후에도 명호는 민규에게 살갑게 군다거나 대화를 받아주는 등 태도를 급하게 바꾸진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투명인간 취급하며 시선을 주지 않았던 전과는 다르게 민규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은근슬쩍 피하였고, 일부러 몸을 부딪치는 시비조의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싸늘한 관계였지만 늘 명호를 관찰하던 민규의 입장에서만큼은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명호의 반응이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부드러워진 명호에게 민규는 좀 더 다가가서, 명호가 얼마나 더 부드러워질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민규는 친해지고 싶었던 상대와는 자고로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가장 첫 번째이자 중요한 관문이라는 신념을 늘 가지고 있었기에, 예의까지 차리고자 일부러 깔끔한 셔츠를 챙겨입고 명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차를 몰고 나온 것이었다.

 

  "...야."

  "어? 아, 근데 우리 호칭 좀 바꾸자. 야는 너무하잖아."

  "너도 그렇게 불렀잖아."

  "그건 네가 먼저..! 으휴, 아니다. 왜 불렀니, 명호야~?"

 

  민규는 한국과는 반대로 향하는 낯선 일본의 도로에서 혹시나 실수하지는 않을까 싶어 운전에 최대한 집중하면서도 습관성 장난을 빼먹지 않았다. 민규는 명호의 성향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대부분은 웃음을 터뜨리는 지금의 말투에 만약 명호가 기분 나빠하더라도 알고 나면 앞으로 조심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여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명호는 아무 말 없이 시트에 몸을 차분히 기댄 상태로 창밖에서 흐르는 가로등 불빛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미안."

  "어어..?"

  "나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함부로 말했잖아. 미안하다고."

 

  운전 중이 아니었다면 민규는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헐, 우와! 너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애였어? 대-박, 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차도는 좌측동행이고, 불친절한 내비게이션에서는 겨우 언어설정을 바꿔 영어만이 흘러나오는 중이다. 민규는 헛기침과 함께 최대한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뭘 그런 걸로, 됐다! 명호가 그 우스꽝스러운 말투에 입을 꾹 다물며 터지려는 웃음을 참는 줄은 민규는 보지 못했다.

 

 

 

 

  "자, 여기."

  "...고마워."

 

  꾸준히 관찰한 결과가 드디어 써먹을 데가 생겨, 민규는 더운 날씨임에도 명호가 자주 마시던 따뜻한 차를 골라 사와 명호의 손에 쥐여주었다. 길게 이어지는 강과 다리, 수면 위로 반짝이는 조명의 향연이 실로 완벽한 풍경을 자아내는 지금의 장소는 SNS에서 여행 인플루언서로 유명한 민규의 친구가 알려준 비밀 명소였다. 그 친구는 민규가 일본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반해 고백이라도 하고자 묻는 줄 알고 알려주는 데에 각종 조건을 내걸었으나 동반하는 사람이 친구라는 심심한 대답에 맥이 빠져 그렇게 가기엔 조금 아깝다는 사족과 함께 온라인 지도에서 위치를 캡처해주었다. 

  민규는 같이 가는 사람을 구분하는 장소가 어디 있느냐고 타박하긴 했으나 직접 와보니 이해가 될 만큼 덩그러니 놓인 벤치와 그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은 다소 놀라울 정도로 로맨틱했다. 

 

  "아까 얘기한 거, 미안해하지 마. 사과시키려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난 네가 날 이해해줬으면 싶었거든."

  "...이해해.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민규는 명호가 따끈한 유리병을 입가에 대고 가볍게 기울였다가 옆에 조심히 내려놓는 것을 본 후에야 달칵 소리를 내며 캔 뚜껑을 따 톡톡 터지는 탄산음료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낮에는 후덥지근하던 날씨가 강가를 타고 흐르는 바람 덕인지 적당히 선선하여 야외에 앉아있기에 딱 알맞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쉬울 만큼 명호는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꺼내지 않았으나 민규는 대화를 이끄는 데에 나름의 자신이 있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하게 침묵이 흐르는 순간은 거의 없었다. 명호가 어떻게 차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민규의 할아버지의 눈에 띄어 후원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민규는 자신이 이제 막 모터스포츠를 접하며 느끼게 된 기분 같은 것을 차근차근 꺼내놓았다. 민규의 아버지와 명호 간의 불편한 상황이나 민규가 팀 닥터에게 들은 명호의 불안함 같은 것들은 좁은 골목을 지나치는 오토바이처럼 아슬아슬하면서도 확실하게 피했다. 

 

  "솔직히 쉬어본 적이 거의 없어. 앞만 보고 달려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는 느낌이 계속 들더라고."

  "그래도 멋지다. 좀 부럽기도 하고. 난 뭘 하면 좋을지 아직 못 정해서."

 

  처음 날을 세우던 사람이랑은 얼굴만 똑같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명호는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민규의 솔직한 감상과 함께 돌아온 흥미를 가득 담은 까만 눈을 마주 본 명호가 눈꺼풀을 연신 깜빡인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꼬리를 움직여 웃어버린다. 무척 잔잔한 미소였지만 민규는 놀라버렸다. 친구가 알려주었던, 사랑에 빠지기 좋다고 불리는 지금 장소의 별명이 정말 적격이라 느꼈다.

 

 

 

 

  "고마워, 민규."

  "어?"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는 거 사실 안 좋아하거든. 실제로 타지도 않아. 근데 오늘은... 너무 편했어. 방금 올 때 조금 졸 뻔하기도 했고."

 

  명호의 숙소는 민규가 잡은 숙소와 같은 곳은 아니지만 바로 근처에 있는 호텔이었다. 민규는 차도를 따라가면 먼저 나오는 민규의 숙소 앞에서 내려 걸어가겠다는 명호의 아주 효율적인 의견도 무시하고 굳이 차를 돌려 명호의 숙소 후문 근처에 차를 세웠다. 거기다 굳이 차에서 내려 그 후문까지 배웅했고, 명호는 바로 출발하지 않고 따라나서는 민규에게 말할지 말지 고민했던 인사를 건네었다. 항상 솔직하게 행동하는 민규에 대한 예의를 차리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괜찮다고 너스레를 떨 줄 알았던 민규가 곧장 대답하지 않자 명호는 어울리지 않게 이런저런 소리를 대충 꺼내었다. 괜한 창피함에 귀 끝이 따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원래 절대 안 졸아. 비행기 탈 때도 안 자는데, 그렇다고 진짜로 잤다는 게 아니라..."

  "야, 명호야."

  "어?"

  "나도 내가 진짜 이상한 거 알고 지금 하려는 말도 완전 미친 소리인 거 알겠는데 한 번만 들어 봐봐."

  "뭔데 그래?"

  "원래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나 너한테 반한 것 같아. 혹시 키스해도 돼?"

 

  건물의 정문과는 달리 지상 주차장이 연결되어있는 후문 앞은 어두컴컴해서 명호는 민규의 뺨이 지금 자신의 귀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인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명호는 전보다 훨씬 더 놀라 자기도 모르게 제 입을 가려버렸다.

 

  "........미쳤냐...?"

 

 

 

 

 

  * * *

 

 

 

 

 

  명호의 레이스팀에 변화가 생겼다면, 단연 민규와 명호의 사이였다. 한 차례 명호의 날이 누그러지면서 바뀐 적이 있긴 하였으나 그때의 변화는 민규를 제외한 대부분이 알아차리지 못하였다면 이번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확연했다. 명호가 전체에게 쌀쌀맞게 구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민규가 곁에 오면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지곤 했고, 둘이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민규가 살갑게 굴 때 명호가 질색하며 밀어내는 장면도 많은 사람이 보았으나 그저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장난을 치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피트인을 할 때면 무서울 정도로 냉담하던 명호가 피트에서 구경하는 민규를 마주치면 일부러라도 화를 내지 않으려고 마음을 정돈하는 것을 그나마 가까이에서 차를 케어하던 엔지니어 몇 명이 알아보았다. 

 

  차의 컨디션이나 명호가 몸으로 받아내는 부담 또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매번 스트레스를 푸는 과정을 생략하고 경기력에 집중하는 데에 여가를 온전히 사용하던 명호는 때로는 민규와 근처 시내에서 저녁을 먹거나 구경을 하고, 또 때로는 약간은 거리가 있는 시외로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했다. 명호는 민규가 자신을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마다 키스하고 싶은 생각 없다고 일갈했다. 그럼 매번 민규는 자신이야말로 그럴 마음도 없다고 바락바락 대꾸하곤 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어도 둘은 이따금 손을 마주 잡았고 그보다 더 적은 횟수지만 서로의 눈을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며 말없이 웃기도 하였다.

 

 

 

 

  [ 본경기 끝나면 바로 귀국할 것 ]

 

  용건만이 짤막하게 남은 메시지를 확인한 민규는 머리에 얹어져 있던 수건을 의자 등받이에 대충 걸쳐두고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어차피 후원자로서의 체면을 최소한이라도 지키고자 저를 보낸 것이 뻔한 아버지는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도 않으면서 명호가 우승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은근한 압박을 끊임없이 가하였다. 내심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단 생각을 버리지 못하던 민규로서는 처음엔 하라는 대로 꼭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었으나 지금은 아버지가 바라서가 아닌, 명호가 바라기에 꼭 우승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커져 있었다.

 

  그래서 명호와 가깝게 지내면서 모터스포츠에 관한 공부를 조금씩 꾸준히 했다. 옆에서 알짱거리며 주워듣는 것들도 물론 많았지만, 매번 물어가며 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적어도 근 몇 년은 오로지 레이싱에만 매달려 산 명호가 무의식적으로 뱉는 관련 용어 같은 것들은 민규가 혼자서 공부를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틈틈이 책이며 인터넷을 뒤져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금의 차 성능이나 대회 방식 자체가 명호의 주행 스타일과는 거리가 꽤 있고, 팀의 꼼꼼한 케어가 필수라는 점도 알아낼 수 있었다. 

 

  민규가 전날 공부한 것을 명호의 앞에서 아는 체할 때면 명호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 기특하다는 듯 웃어주었다. 민규는 명호의 웃는 얼굴이 날이 갈수록 못 견디게 좋았고, 명호가 그만큼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같이 있으면 행복해한다는 것은 알았으며 그보다도 레이싱을 좋아하는 것도 알았기에 명호와 명호의 레이싱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명호뿐만 아니라 자신의 앞길을 알려줄 지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래서 민규는 언제 어떤 경기라도, 그게 연습이라도 최선을 다해 응원할 수 있도록 오늘도 녹을 듯 피곤한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는다.

 

 

 

 

  * * *

 

 

 

 

  "키스할래?"

  "또 시작이네."

  "너 긴장 풀어주려고 그러는 거지!"

  "너나 풀어!"

 

  슈트를 갖춰 입은 명호가 팔꿈치로 민규의 가슴팍을 가볍게 쳤다. 의도야 어떻든 민규는 명호의 팀을 후원하는 기업을 대표하여 와있었고 명호가 아무리 차와 맞지 않더라도 이제까지 각종 대회에서 우승한 실력자이니만큼 순조롭게 최종 시합에까지 올라왔으니 예의를 갖추어 처음 만난 날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때와 비교해보니 둘 사이가 많이 바뀌어서 민규는 감회가 남달랐다. 명호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은 해보았지만 겉으론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명호 씨, 곧 시작해요."

  "네. ...나 갈게."

  "응. 바로 위에 있을게. 나 보고 싶을 때 바로 볼 수 있게."

  "누가 보고 싶다 그래?"

 

  질색하는 말투라도 표정은 그렇지 않다. 명호는 바로 나가려다 말고 다시 민규에게 돌아왔다. 평소보다 가까워지기에 귓속말이라도 하려나 싶어 무릎을 살짝 굽혀주니 뺨에 말랑한 무언가가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다. 민규는 혹시 제 착각인가 싶어 멍하니 눈만 껌뻑이다 느리게 고개를 움직여 여전히 앞에 서 있는 명호를 바라봤다. 또 귀가 빨갛게 변한 것을 보고 착각이 아님을 깨닫는다.

 

  "키스는 내가 우승하면... 그때 하자. 오늘 예쁘다, 민규야."

 

  표정을 더 자세히 보고 싶었던 마음을 눈치챈 건지 얼른 헬멧을 써버리는 바람에 민규는 약간은 시무룩해질 뻔하였으나 이내 들리는 말에 금방 기운을 차려서는 네가 더 멋있으니 꼭 우승하라는 말을 응원인지 협박인지 모르게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명호는 분명한 이번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다. 하지만 그 후보에 명호만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초중반까지 적정 속도를 지키다가 후반에 빠른 속도로 랩타임*을 줄이는 명호의 스타일과는 다르게 꾸준히 상위권의 속도를 지키는 일본 출신의 선수 또한 뛰어난 기량으로 우승 후보에 자주 거론되고 있었다. 

* 랩타임 : 랩을 한 번 도는 데에 걸리는 시간. 

 

  첫 스타트 라인에서부터 한 차의 브레이크 문제로 사고가 나 여러 선수들이 리타이어하는 바람에 어수선한 분위기로 경기가 이어졌다. 민규는 피트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명호에게 말한 대로 바로 위 관중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명호는 출발 직전 민규에게 가벼운 손 인사를 마지막으로 한번도 피트인을 하지 않고 레이스를 달렸다. 

  상대 선수는 예상보다도 요령이 좋았다. 게다가 차를 업그레이드한 것인지 엔진 출력 소리가 여전히 아마추어 정도의 지식을 가진 민규가 듣기에도 청량에 가까울 정도로 시원했다. 명호는 피트인하여 내내 불만을 가지던 브레이크 감도에 대해 말하려다가 저보다도 더 걱정으로 가득한 민규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물을 한 모금 마시기만 할 뿐 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민규 님. 대표님 전화 받으시죠."

 

  명호가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여 랩타임을 착실하게 줄여나가는 내내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민규의 등을, 평소 그를 방치에 가깝게 내버려 두던 수행비서가 톡톡 두드리더니 휴대전화를 건네었다. 제 아버지의 이름과 통화 중인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민규에게 분명 먼저 전화를 걸었겠지만 시끄러운 경기장 내부에서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벨 소리도 진동도 무용지물에 가까웠을 것이다. 

 

  "...네."

  [ 여러 사람을 귀찮게 하는구나. ]

  "죄송합니다. 지금 결승이..."

  [ 할아버지가 많이 위독하시니 당장 돌아와라. ]

  "네?"

 

  마침 여러 대의 차들이 가까워지고 있는지 주변이 단숨에 소음과 환호성으로 시끄러워졌다. 민규는 아버지와의 통화와 명호의 기록 체크 사이에서 허둥거리다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명호의 차를 겨우 확인하고는 관중석을 빠져나갔다. 김 대표가 호통을 칠 것을 걱정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점잖은 목소리였다.

 

  [ 공항이 가까우니 지금 이동해서 ] 

  "...아버지. 죄송하지만 결승이 끝나면 정리하는 대로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 뭐? ]

  "명호, 서 명호 선수 지금 성적 나쁘지 않아요.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네가 뭘 안다고 지금, ] 

  "알 수 있어요. 이번에 우승하면 바로 유럽이니까, 분명 회사에도..."

 

  말을 끊었다는 이유로 혼쭐이 날 것을 각오하고 또박또박 이어가던 민규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얕은 웃음소리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웃음은 곧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으로 바뀌었고, 이어지는 말을 민규는 단 한 번도 끊을 수 없었다. 

 

  [ 얘기 못 들은 거냐? 미안하지만 모터스포츠 쪽 후원은 이번 대회가 마지막이다. 서 선수랑도 이야기가 다 되어있고,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 다음 은퇴하기로 이미 약속한 부분이야. 안그래도 우리 회사가 케어를 제대로 안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던데 괜히 다른 팀으로 옮기면 기정사실이 되니, 서 선수 은퇴를 핑계로 후원을 그만하게 되는 게 훨씬 자연스럽지. ] 

  "...그럼 서명호 선수는..."

  [ 돈도 꽤 벌었고 퇴직금도 두둑히 받아 갈 예정이니 나쁘지 않을 거다. 박수칠 때 떠나란 말도 있으니. 친해졌다더니 그런 건 얘기 안 한 거냐? 쯧. ]

 

  스태프들을 통해 명호와 가까이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민규는 종종 넉살 좋은 그의 성격을 허울만 좋고 속이 비었다 타박하던 잔소리가 떠올랐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지 다시금 몇 대의 차가 지나가며 뿜어내는 굉음이 문 너머로 들렸다. 민규는 출력음을 구분할 줄 모르면서도 방금 지나간 차가 명호의 차라는 것을 직감했다. 

 

  정말 명호가 원해서 은퇴를 하기로 약속했다고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 민규와의 공통적인 관심 분야를 가장 자주 이야기하긴 했지만 명호는 차에 대한 이야기나 레이스 위에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거워 보였다. 힘들어하고 있음을 뻔히 아는데도 닥터의 소견이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고 싶을 만큼 명호의 눈이 빛났다. 유럽으로 가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민규는 질투가 날 정도로 명호가 가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랑을 옆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래도 경기는 다 볼 겁니다."

  [ 뭐? ] 

  "못 보게 하면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제가 돌아가신 사모님 아들이라고 거짓말한 거 다 얘기할게요."

  [ ..이놈이, ] 

  "아니면 지금 다른 여자분 만나는 거 삼촌들한테 말할까요? 제 친엄마랑 똑같은..."

  [ 어디다 대고 말을 함부로 하는 거냐! ] 

 

  민규는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에 가슴이 쓰라릴 지경이었다. 답답함에 숨까지 막히는 기분이 들어, 울려대는 휴대전화를 다시 귓가에 가져가지 못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는 바닥에 대충 던져두고서 그대로 무릎을 구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명호는 왜 그런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은 걸까. 민규에게 있어 명호는 특별했다. 고작 몇 달간의 만남으로 원하기엔 감히 주제넘은 바람이라 하더라도 명호에게 있어 자신이 특별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비록 명호의 첫 번째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신념을 가졌기에 더 좋았다. 차와 경기장을 바라볼 때 언뜻 비치는 맑은 눈이 자신을 향할 때면 명호에게 고백한 숙소 후문 앞으로,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강가의 벤치로, 처음 인사했던 피트로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그다음의 미래를 의논하기엔 민규가 너무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걸까. 저를 견제하고 쫓아내려는 김 대표의 아들이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민규가 명호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을까. 

 

  곧 경기장에서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환호성이 터졌다. 민규는 가라앉던 정신을 억지로 잡아 일으키려는 그 소리를 따라 삽시간에 무거워진 몸을 바르게 세웠다. 경기가 끝나고 우승자가 나왔음이 분명한 반응이었다. 온갖 소음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억지로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찰나에 이번에는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언뜻 들린다. 실내등만을 쐬던 시야가 문틈으로 쏟아지는 햇빛으로 잠시 무능력해졌다. 천천히 눈을 뜨니 전광판에 1이라는 숫자와 함께 최종 랩타임, 그리고 차를 운전한 카레이서의 이름이 뜬다. 서-명-호. 

 

  그리고 그 길이가 고작 몇 미터밖에 안 되는 VIP 관중석을 가로질러 트랙이 보이는 위치로 향한 민규의 시선은 이상하게도 피니쉬 라인을 한참 지나 저 멀리, 충돌의 충격을 막기 위해 가드레일에 설치된 크래시 패드에 앞 범퍼를 처박고 새카만 연기를 뿜어대는 붉은색 차로 향한다. 피트에서 뛰어나가는 스태프들, 연기 속에서 빠르게 피어오르는 불꽃, 그리고 차 뒤편에도 꼼꼼히 새겨진, 차를 운전한 카레이서의 이름.

  서-명-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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